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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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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동 DMC의 한적한 지하, ‘아우라 테크’ 연구소의 공기는 납땜 인두기에서 피어오른 매캐한 연기와 식어버린 캔커피 냄새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빨간색 경고장이 인쇄된 연체 고지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사설 금융권에서 넘어온 채무 독촉장과 일산 요양 병원에서 보내온 아버지 정민우의 이번 달 병원비 청구서. 합산 금액 5억 원이라는 숫자는 이제 막 스물여섯이 된 하윤의 어깨를 짓누르는 거대한 벽이었다.


“빛은 굴절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윤은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중얼거리며 손끝에 쥔 초소형 핀셋을 다잡았다. 현미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지름 14밀리미터, 두께 0.1밀리미터의 투명한 하이드로겔 막이었다. 그 표면 위로 머리카락보다 얇은 나노 회로와 푸른빛을 발산하는 미세 도파관이 정교하게 얽혀 있었다. 하윤이 3년간 청춘을 갈아 넣은 독자적 기술의 결정체, ‘아우라 렌즈 프로토타입 v1.0’이었다.


그때, 연구소의 낡은 철제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들어선 이는 단정한 백발에 브라운 가죽 가방을 든 노신사였다. 그의 수트 깃에 달린 은색 배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정하윤 대표님 되십니까?”


그는 자신을 태성그룹 전무 강우진의 개인 법률 대리인이자 신탁 자산 관리인인 최성필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최성필은 가방에서 두꺼운 비밀 유지 서약서와 함께 계약금 10억 원이 찍힌 은행 잔액 증명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태성그룹 강우진 전무가 일시적 실명 상태에 빠졌습니다. 외부에는 단순 안구 건조증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상은 정교하게 기획된 화학 테러입니다. 각막 세포가 괴사하고 시신경이 마비되었지 소요되는 시간은 단 120일. 주치의인 서준호 원장조차 현대 의학으로는 마비 주파수를 깨울 수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오직 정 대표님이 개발하신 스마트 렌즈의 미세 전류 자극 기술만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하윤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식약처 승인도 나지 않은 프로토타입을 인간의 안구에 직접 피팅하는 것은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자 불법 무면허 시술이었다. 적발되는 순간 엔지니어로서의 커리어는 영원히 끝장날 터였다.


“이건 불법이에요. 제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최성필은 온화하지만 타협 없는 눈빛으로 하윤을 응시했다.


“정민우 연구원님이 일산 요양 병원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일체의 비용을 평생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정 대표님이 대기업의 특허 찬탈 위협으로부터 아우라 테크를 지켜낼 수 있도록, 제가 법적 방패가 되어 드리지요. 계약금 10억 원은 즉시 집행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하윤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정혜 일파에게 특허를 빼앗기고 충격으로 쓰러진 아버지. 그의 목숨을 유지하는 산소호흡기 비용조차 대지 못해 절망하던 스스로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하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만년필을 쥐었다. 서명 란에 잉크가 스며드는 순간, 그녀는 거대한 대기업의 잔혹한 후계 싸움 한가운데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음을 직감했다.


***


몇 시간 후, 하윤은 최성필이 준비한 차량을 타고 강남 ‘세인트 안과 병원’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8층 VIP 병동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반무테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하윤을 가로막았다. 우진의 대학 동창이자 이 병원의 원장인 서준호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전파 스캐너를 꺼내 하윤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밀 수색했다.


“도청 장치는 없군. 미안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한정혜 이사장이 보낸 스파이들이 간병인으로 위장해 병실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까요.”


서준호는 병실 주변의 무선 신호 차단기(재머)가 정상 가동 중임을 확인한 뒤, 무거운 철제 방음문을 열어주었다. 병실 안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암흑이었다. 미세한 의료 장비의 기계음과 차가운 공기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 어둠의 중심,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사내가 있었다. 태성그룹 전무 강우진. 실명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턱선은 날카로웠고, 다부진 체구는 위압감을 풍겼다. 우진은 낯선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차고 있던 수동식 아날로그 시계의 용두를 만지작거리며 차갑게 읊조렸다.


“준호야, 내가 낯선 사람은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우진아, 이분이 최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아우라 테크의 정하윤 대표다. 네 시신경을 깨울 유일한 렌즈를 개발한 천재 엔지니어지.”


우진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하윤의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초점 없는 검은 동공은 깊은 심연처럼 흐려져 있었지만, 그 눈빛에 서린 경계심은 살기만큼이나 매서웠다.


“엔지니어라니. 내 눈을 마루타 삼아 임상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당장 내보내.”


차가운 거부감에 서준호가 당황하며 우진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하윤은 한 걸음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갔다. 그녀는 침대 옆 모니터에 표시된 우진의 심박수를 이성적으로 응시했다. 분당 110회. 비정상적으로 가쁜 호흡.


“심박수가 너무 높으시네요, 강우진 전무님.”


하윤의 맑고 차분한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우진의 귀에 꽂혔다.


“지금 전무님이 보여주시는 건 분노가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실명과 인간 불신이 가져다준 극도의 불안감이죠. 저는 제 기술을 시험하러 온 게 아닙니다. 데이터를 거래하러 왔을 뿐이에요. 제 스마트 렌즈는 전무님의 각막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미세 전류로 시세포를 자극해 신경을 재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 기술이 가진 물리적 데이터 수치라도 믿으시죠.”


하윤의 거침없고 이성적인 분석에 우진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낯선 이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단단함과 지적인 확신이 그의 경계심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우진은 시계를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좋아. 해봐.”


하윤은 깊은 호흡을 내쉬며 가방에서 푸른 빛을 발산하는 휴대용 광학 조율기를 꺼냈다. 어두운 병실 안이 순식간에 신비로운 푸른색 광원으로 채워지며, 우진의 조각 같은 실루엣이 차갑게 드러났다. 하윤은 방진복 가운을 매만지며 우진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불과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초밀착 상태가 되자, 우진의 코끝으로 하윤의 수수한 비누 향이 스며들었고, 하윤의 귓가에는 우진의 긴장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눈을 크게 뜨세요. 조금 시릴 겁니다.”


하윤은 미세 핀셋을 이용해 0.1밀리미터 두께의 아우라 렌즈를 집어 올려 우진의 오른쪽 안구 표면에 조심스럽게 안착시켰다. 렌즈가 각막에 닿는 순간, 렌즈 가장자리의 미세 회로가 푸른빛을 번쩍이며 우진의 동공 주위로 매끄럽게 흡수되듯 밀착되었다.


동시에 하윤의 조율기 화면에 ‘망막 레이아웃 매핑 시작: 동기화율 12%’라는 푸른색 진행 바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진의 흐려진 시야 위로 얇은 녹색 격자선들이 희미한 실루엣을 그리기 시작한 바로 그 찰나였다.


철컥,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병실 문고리가 삐걱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무님, 안약 넣을 시간입니다. 어머, 병실에 외부인이 있으시네요?”


문틈 사이로 한정혜가 보낸 위장 간병인 장미란의 날카롭고 의심 가득한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 들어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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