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의 딜레마
푸른빛의 홀로그램 노이즈 속에서, 마침내 아버지가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애틋한 재회의 순간을 만끽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수경 재배 온실의 습하고 따뜻한 유기적 공기를 가르며, 도현의 낡은 초극단파 아날로그 무전기가 거칠게 지익지익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도현 형! 들려요? 제발 들린다고 해줘요!”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신기율의 목소리는 극도의 공포와 절박함으로 뒤틀려 있었다. 도현은 보존 챔버의 투명한 배양액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끼 추출물 덕분에 세포 붕괴 지수는 가까스로 안전 단계로 내려앉았지만, 수로를 잠수 돌파하며 얻은 오른쪽 발목의 산성 화상 흉터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유발했다. 여전히 마비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 무력하게 늘어진 왼팔을 오른손으로 붙잡으며, 도현은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기율아, 침착해라. 무슨 일이지?”
“가스예요! 제국 녀석들이... 브론즈의 치안대 놈들이 난민 수용소 ‘아크-지하’의 메인 환기 배관을 수동으로 잠그고 은빛 나노 마비 가스를 흘려보내고 있어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기계 의체를 이식한 사람들까지 전부 신경이 마비돼서 쓰러지고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형!”
도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국 치안국이 하층의 무등록 유기체 난민들을 청소하기 위해 마침내 군용 생화학 병기를 꺼내 든 것이었다.
도현은 온실 격벽 입구로 기어 나왔다. 그곳에는 가슴 장갑판이 파손되어 내부 전선이 흉측하게 노출된 안드로이드 제로가 묵묵히 서 있었다. 제로의 황색 안구 센서가 힘없이 깜빡였다.
“동반자 도현. 잔여 전력 5.8%. 보조 구동 모터 과열 중. 물리적 전투 및 고속 기동 불가능.”
“알고 있어, 제로. 무리하지 마라.”
도현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온실을 벗어나 스팀 슬럼의 어두운 하부 파이프라인을 달리기 시작했다. 유기 전자기 방호 재킷의 절연 고무가 쓸릴 때마다 각질이 일어난 발목의 화상 부위가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도현은 입술을 깨물며 질주했다. 그의 품 안에는 방금 전 온실에서 회수한 ‘나노 백신 배양용 간이 인큐베이터’와 단 한 병만 남아 있는 귀중한 ‘안헬릭스 활성 촉매제’, 그리고 정제된 순수 이끼 추출물이 들어 있었다. 이것들은 도현 자신의 세포 붕괴를 막고 목숨을 연장할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낡은 철골 프레임과 천막들이 기워져 만들어진 지하 난민 수용소 ‘아크-지하’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도현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숨을 들이켰다.
“아으으... 헉...!”
수용소 내부의 천막들 사이로 차갑고 은밀한 은빛 안개가 장막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가스가 닿은 유기체 인간들은 목을 움켜쥔 채 산소 부족으로 각혈하며 쓰러졌고, 신체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 사이보그 난민들은 기계 신경의 접합부에서 불꽃을 뿜으며 관절이 강제로 잠겨 비명을 질렀다. 군용 나노 마비 가스. 그것은 유기 세포의 산소 흡입을 차단하는 동시에, 기계 의체의 액추에이터 주파수를 교란해 전신을 강직시키는 제국의 무자비한 청소 도구였다.
“도현 선생... 왔는가...”
난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오선생이 낡은 모직 옷을 피와 먼지로 적신 채 텐트 기둥을 붙잡고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의 한쪽 기계 다리는 이미 과부하로 정지해 붉은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노인의 인자했던 눈빛은 죽음의 공포로 흐려져 있었다.
도현은 급히 가슴의 바이오 페이서를 확인하고 방호 재킷의 마스크 필터를 밀폐했다. 그리고 메인 가스 밸브가 위치한 수용소 중앙 배관으로 뛰어갔다. 어떻게든 가스 유입을 막아야 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제네틱 컴퍼스를 꺼내 배관 제어반의 무선 주파수를 조율했다. 바이오-시그널 해킹으로 밸브의 제어 칩을 장악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컴퍼스의 화면에 붉은색 오류 격자가 떴다.
[경고: 물리적 잠금 상태. 제어 회로가 기계식 자물쇠와 사슬로 수동 고정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해킹 불가능.]
“젠장...!”
도현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브론즈의 대원들은 해킹을 방지하기 위해 밸브의 디지털 모터를 차단하고, 무겁고 투박한 아날로그 철사슬로 밸브를 꽁꽁 묶어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마비된 왼팔과 저전력 상태의 제로의 힘으로는 이 두꺼운 사슬을 물리적으로 끊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해킹이라는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고전적인 물리 법칙 앞에서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은빛 가스는 점점 더 빠르게 수용소 내부를 채워갔다. 난민들의 호흡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고, 아이들의 신음 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이대로 3분만 지나면 수용소의 300여 명은 전멸할 터였다.
도현은 가슴속의 간이 인큐베이터를 내려다보았다.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공기 중에 퍼진 나노 로봇들을 화학적으로 분해할 광역 중화 백신을 즉석에서 합성해 살포하는 것.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방금 전 채취한 순수 이끼 추출물 전체와, 자신의 생명을 일시 유지해 주는 유일한 약물인 ‘안헬릭스 활성 촉매제’의 70%를 쏟아부어야 했다.
머릿속에서 과학자로서의 이성적인 연산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안헬릭스를 70% 소모하면 내 세포 안정화 유지 시간은 48시간 이내로 단축된다. 백신을 완성하기 전에 내 몸이 먼저 붕괴해 죽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해. 도망쳐야 한다. 이 난민들을 살리는 것은 내 생존 확률을 극단적으로 떨어뜨리는 비합리적인 결정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 쓰러진 민이의 붉은색 스웨터가 들어왔다. 도현을 친형처럼 따르며 주머니에 구형 진공관을 넣어주던 아이가, 지금은 은빛 먼지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차가운 기계의 연산은 도망치라 속삭였지만, 날것의 뜨거운 인간성은 그의 발을 붙잡았다.
“합리성 따위... 개나 주라지.”
도현은 오른손으로 인큐베이터의 주입구를 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안헬릭스 활성 촉매제 실린더를 꺾어 약물의 70%를 배양액 속에 주입했다. 연이어 푸른빛을 뿜는 순수 이끼 추출 유기물을 투입했다.
웅웅웅—!
간이 인큐베이터가 요란한 진동을 내며 초고속 합성을 시작했다. 도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네틱 컴퍼스로 약물의 나노 결합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주파수를 미세 조정했다. 그의 뇌 신경망이 컴퍼스와 공명하며 찌르는 듯한 편두통을 유발했지만, 도현은 눈을 부릅뜨고 수치를 읽었다.
[중화 백신 합성 완료율: 100%]
“기율아! 수용소 외곽의 산성 가스 중화제 분무 장치를 가져와! 고압 노즐을 이 인큐베이터 배출구에 직접 연결해라!”
“네, 형!”
기율이 낡은 분무 장치의 호스를 잘라내고, 도현의 인큐베이터 밸브에 임시 고무 패킹을 덧대어 밀착시켰다. 도현은 분무 장치의 압력 코일을 과부하시켜 고압 미스트 분사 모드로 개조했다. 제국의 나노 로봇들이 대기 중의 정전기와 미세한 습도를 매개로 이동한다는 물리적 특성을 역이용한 전술이었다. 고밀도의 알칼리 수분 미스트를 살포하여 나노 로봇들의 전기적 구동 모터를 강제로 단락시키고 화학적으로 용해하려는 계산이었다.
“쏜다!”
도현이 분무 장치의 트리거를 당겼다.
콰아아아아—!
인큐베이터에서 정제된 에메랄드빛의 고농축 수분 미스트가 수용소 대기 중으로 폭풍처럼 분사되었다. 은빛 안개와 초록색 미스트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쉭쉭거리는 화학 반응 소음과 함께, 공기 중에 부유하던 나노 마비 가스의 입자들이 알칼리 미스트에 닿는 즉시 검은색 무해한 금속 분진으로 변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미 난민들의 호흡기와 기계 접합부 내부로 침투한 나노 로봇들이 제국 치안국의 원격 신호를 받고 최종 자폭(내부 전류 방전) 프로토콜을 가동하려 하고 있었다. 쓰러진 난민들의 몸에서 미세한 붉은 스파크가 일기 시작했다.
“안 돼... 체내 방전이 일어나면 뇌 신경이 완전히 타버려!”
도현은 오른손에 쥔 제네틱 컴퍼스의 다이얼을 낚아채듯 돌렸다. 그의 전자기적 공감각이 공기 중을 흐르는 제국의 제어 주파수를 포착했다.
“주파수 24.8GHz... 나노 로봇들의 통신 프로토콜을 강제로 다운시킨다!”
도현은 컴퍼스의 전력 코어 에너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역위상의 방해 전파를 무선으로 송출했다.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밀려와 눈앞이 붉게 일렁였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며 주파수를 고정했다.
파지직—!
컴퍼스에서 방출된 강력한 아날로그 교란 전파가 난민들의 몸속에 침투한 나노 로봇들의 수신 안테나를 직격했다. 자폭 명령을 수신하던 나노 로봇들의 회로가 실시간으로 강제 셧다운되며 무력화되었다.
“허어억...!”
민이가 먼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빛 안개가 완전히 걷힌 수용소 바닥에서, 쓰러져 있던 300여 명의 난민들이 차례로 기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직되었던 사이보그들의 기계 관절이 청색 안정 신호와 함께 부드럽게 풀렸다.
“살았다... 우리가 살았어!”
수용소 곳곳에서 울음 섞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선생은 떨리는 다리로 도현에게 다가와 그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의 맑은 유기체 눈동자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임 선생... 자네가 우리 모두를 구했네. 자네는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야. 우리의... 우리 지하 세계의 ‘녹색의 구원자’일세.”
난민들이 도현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를 향해 경외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도현은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제네틱 컴퍼스를 내려다보았다. 컴퍼스의 액정에 표시된 안헬릭스 잔량은 이제 겨우 30% 남짓이었다. 자신의 생존 타임라인이 절반 이상 깎여 나간 대가였다. 가슴속에서 씁쓸한 과학적 냉소와 묵직한 책임감이 얽혀 딜레마의 찌꺼기를 남겼다.
그때, 환호하는 난민들의 틈새에서, 남루한 천 조각을 걸친 한 가녀린 소녀가 도현을 향해 다가왔다. 큰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이며 도현의 소매를 잡는 소녀, 제이드(Jade)였다.
“감사해요,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제이드는 도현의 품에 안기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도현의 시야가 닿지 않는 그녀의 목덜미 아래, 피부 밑 깊숙한 곳에서 아주 미세한 은빛 나노 회로가 차갑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제이드의 반투명한 동공 너머로, 도현이 방금 전 가동했던 간이 인큐베이터의 화학 배합비와 제네틱 컴퍼스의 역위상 주파수 데이터가 실시간 데이터 스트림으로 변환되어 흐르고 있었다.
지익, 지이익.
그녀의 피부 밑에 이식된 초미세 양자 송신기가 도현의 눈앞에서 정제된 나노 백신의 핵심 배양 데이터를 제국 정보부의 최상위 메인프레임으로 소리 없이 전송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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