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동맹
차갑고 축축한 오물이 뺨에 닿는 감각과 함께 임도현은 번쩍 눈을 떴다. 지독한 악취와 황산 가스가 섞인 매캐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스팀 슬럼 4번 구역의 하수 처리장 지하 허브. 네오 에덴의 가장 깊고 더러운 내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도현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왼쪽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는 마치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미완성 백신 유전자를 강제 주입한 부작용이었다. 타입-오리진 0단계의 불안정한 나선이 그의 유기체 신경망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가슴 중앙에 이식된 자가 발전식 생체 박동 조율기, ‘바이오 페이서’가 피부 밑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웅— 웅— 웅—
[경고: 세포 붕괴 지수 62%. 임계 단계(Critical) 진입. 다발성 신경 마비 및 시야 협착 진행 중.]
제네틱 컴퍼스의 붉은 경고등이 흐릿해진 도현의 시야를 물들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도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것은, 바로 눈앞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황색 안구 센서였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거대한 형체. 왼쪽 어깨 장갑판이 유실되어 내부의 복잡한 광섬유 전선들이 핏줄처럼 날것으로 드러난 구형 전투용 안드로이드였다. 그의 발밑에는 방금 전까지 도현을 추격하던 제국 치안국의 경비 드론 세 대가 완전히 찌그러진 채 스파크를 뿜어대고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흘린 유기체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온 드론들을 순식간에 파괴한 것이 분명했다.
“유기체 생체 신호 감지.”
기계적이면서도 미세한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였다. 안드로이드의 황색 안구 센서가 도현의 전신을 스캔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제국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오염 물질. 타입-오리진. 당신은... 무엇인가?”
스파지직—!
갑자기 안드로이드의 관절 부위에서 거친 스파크가 튀었다. 제동 장치가 망가진 기계 팔이 무자비하게 뻗어 나와 도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티타늄의 악력이 목뼈를 부러뜨릴 듯 조여왔다. 마비되지 않은 오른손에 쥔 제네틱 컴퍼스가 바닥에 떨어지려 하자, 도현은 필사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숨이 막혀왔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빠르게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 안드로이드는 감정 회로가 복구된 불량품이다. 하지만 제어 계통의 과부하로 인해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직전이었다. 도현은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대신, 죽어가는 뇌세포를 쥐어짜 내어 이 상황을 타개할 과학적 해결책을 계산했다.
컴퍼스의 액정에 비친 안드로이드의 내부 상태가 머릿속에 시각화되었다.
‘연산 코어 온도 94도. 3번 냉각 핀 파손으로 인한 열폭주 상태. 제동 장치 제어 불능.’
도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구멍을 찢고 나오는 쇳소리로 소리쳤다.
“냉각... 냉각 핀 3번 바이패스 라인을... 강제 개방해! 안 그러면... 45초 이내에 네 연산 코어가 녹아내릴 거다!”
안드로이드의 황색 안구가 격렬하게 깜빡였다. 내부 연산 장치가 도현이 제시한 물리적 공식을 분석하는 듯했다. 목을 죄어오던 티타늄 손아귀의 힘이 미세하게 약해졌다.
“...인간의 언어. 기계 제어 프로토콜 주입 감지. 우회 경로 탐색 중.”
“빨리 개방해! 주파수 14.2MHz로... 동조 신호를 보내라!”
도현은 마지막 남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바닥에 떨어진 제네틱 컴퍼스의 다이얼을 수동으로 조율했다. 컴퍼스 끝단에서 방출된 미세한 주파수가 안드로이드의 노출된 어깨 전선망으로 스며들었다.
지이이잉—!
안드로이드의 가슴팍에서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백색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제 재부팅 시퀀스가 가동된 것이었다. 황색 안구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가, 이내 부드러운 주황빛을 띠며 다시 켜졌다. 기계의 전신을 지배하던 광기 어린 스파크가 가라앉았다.
쿵.
안드로이드가 도현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오물 속에 처박힌 도현은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검붉은 피가 하수구의 썩은 물 위로 번졌다.
“연산 코어 온도 52도로 하강. 시스템 안정화 완료.”
기계가 자신의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기체는 나약하고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당신은... 제국의 시스템 규격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내 자아 코드를 수선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군.”
“하아... 하아... 나는 생물공학자다. 기계를 고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아.”
도현은 마비된 왼쪽 다리를 끌며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했다. 스스로 도망쳐야 했다. 기계를 신뢰하는 것은 네오 에덴에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왼다리에 체중을 싣는 순간, 신경계의 마비 충격이 전신을 덮쳤다.
턱!
도현은 단 세 걸음도 걷지 못하고 다시 오물 더미 위로 쓰러졌다. 가슴의 바이오 페이서가 비명 지르듯 날카로운 비프음을 송출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 창조주의 후예여.”
안드로이드가 다가와 도현의 오른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차갑지만 단단한 지지대였다.
“나는 제로(Zero). 제국의 폐기 처분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친 ‘안드로이드 해방 전선 스페어즈’의 일원이다. 당신이 흘린 순수 유기체의 피 냄새가 이 하수구 전체로 퍼지고 있다. 제국의 사냥꾼들이 곧 이곳을 덮칠 것이다.”
도현은 제로의 황색 센서 너머에 깃든 기묘한 아날로그적 온기를 느꼈다. 이 기계는 단순한 고철이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있는 진정한 지성체였다.
“나를... 도우면 너도 위험해진다, 제로.”
“내 연산 코어는 이미 당신과의 동맹이 생존 확률을 42% 상승시킨다고 결론 내렸다. 가자. 임시 은신처로 안내하겠다.”
그때였다. 하수구 상부의 녹슨 파이프 라인을 타고 둔탁하고 날카로운 금속성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이—
도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그의 특수 감각인 ‘전자기적 공감각’이 각성했다. 하수구 어둠 속에서 흐르는 미세한 전파 신호들이 붉은색 파동의 리플이 되어 썩은 콘크리트 벽면을 때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치안국 수색대장 레오다.” 도현이 낮게 신음했다. “놈이 바이오 사냥개들을 풀었어.”
하수구 저편에서부터 기괴하고 역겨운 인공 페로몬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유기체의 냄새를 추적하기 위해 합성된 치명적인 화학 물질의 냄새였다. 동시에, 하수구 파이프 라인을 거칠게 긁으며 다가오는 수십 개의 금속 발톱 소리가 도현의 코끝과 귀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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