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안식처
네오 에덴의 지하 5,000미터 아래에 위치한 스팀 슬럼 4번 구역. 이곳의 공기는 늘 차갑고 비린 금속성 황산 가스와 함께 기계 의체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냉각 증기로 뒤섞여 있었다. 녹슨 철판을 기워 만든 한태만 박사의 비밀 지하 의원 내부에는 오직 아날로그 진공관 치료 장비들이 내뿜는 희미한 주황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도현아, 세포 붕괴 수치가 또 흔들린다. 심박 제어기를 너무 자주 과부하시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한태만 박사는 낡은 수술용 가운의 먼지를 털어내며 돋보기안경 너머로 임도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기계화된 제국의 시민들과 달리, 아직 온전한 유기체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도현은 가슴팍에 이식된 자가 발전식 생체 박동 조율기, ‘바이오 페이서’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차가운 티타늄 하우징 아래에서 그의 유기적 심장이 분당 60회의 규칙적인 리듬을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웅웅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인 ‘제네틱 컴퍼스’가 들려 있었다. 손잡이형의 기괴한 아날로그 크롬 장치는 도현의 순수 유기체 DNA를 실시간으로 스캔하며 붉은색 노이즈를 화면에 띄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선생님. 제국의 광역 생체 스캐너망이 하부 환기구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제 유전자 파동을 감추려면 심박수를 시체 수준으로 낮추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이건 미련한 짓이다. 너는 이 은하계에 남은 마지막 ‘타입-오리진’ 유전자형이야. 제국의 기계 세포 붕괴 바이러스에 대항할 백신을 완성하기 전에 네 몸이 먼저 무너진다면, 임진우 박사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한 박사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과 무거운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도현의 아버지, 임진우 박사는 기계화 강제 법안에 반대하다 제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가 남긴 유일한 희망이 바로 도현의 핏속에 흐르는 순수 유기체 유전자였다.
그 순간, 의원 천장을 가로지르는 낡은 환기 파이프가 비정상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기지 내부의 구형 아날로그 경보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적색 광선이 어두운 연구실 벽면을 거칠게 쓸었다. 도현의 제네틱 컴퍼스 화면에 감지된 전자기 노이즈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경고: 고출력 양자 스캔 전파 감지. 제국 치안국 정예 타격대 접근 중.]
“발각되었군.” 한 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쿠우웅—!
의원 천장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와 크롬 합금판이 강한 포격에 뜯겨 나가며 먼지 폭풍을 일으켰다. 무너진 천장 틈새로 날렵한 백색 군용 장갑복을 입은 제국 집행관, ‘발키리’의 전술 드론들이 먼지를 뚫고 진입했다. 드론들의 붉은색 레이저 조준선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어두운 방 안을 기하학적인 그물망처럼 채웠다.
“유기체 오염원 식별 시도 중. 코드명 타입-오리진의 생체 반응을 감지했다. 즉시 사살 혹은 생포하라.”
발키리의 차갑고 기계적인 음성이 붕괴된 천장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드론들의 하부에 장착된 12mm 플라즈마 캐논이 도현을 향해 조준선을 정렬했다. 충전되는 푸른빛이 번뜩였다.
“도현아, 지금이다! 어서 주입해라!” 한 박사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도현은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 속에서도 주머니에서 녹색 액체가 담긴 나노 인젝터 건을 꺼냈다. 아직 동물 실험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은, 면역 거부 반응이 극대화된 미완성 백신 유전자였다. 주입하는 순간 세포가 스스로를 공격해 자멸할 수 있는 양날의 검.
도현은 ‘미완성 유전자 자가 주입 안전 수칙’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주입 시 반드시 심박수를 분당 40회 이하로 유지할 것. 그렇지 않으면 급격한 혈류 공급으로 심장이 터져 쇼크사한다.’
하지만 조준선이 그의 가슴에 닿은 순간, 도현은 수칙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바이오 페이서의 수동 조율 다이얼을 낚아채듯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 경동맥에 인젝터의 차가운 바늘을 거칠게 밀어 넣고 트리거를 격발했다.
틱— 콰아아아!
녹색의 차가운 유전 물질이 경동맥을 타고 그의 심장으로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아아아악!”
도현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줄기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유기 발광선이 전신 핏줄을 타고 흐르며 유기 세포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세포 수준에서의 격렬한 면역 거부 거부 반응. 그의 유전자 등급은 불안정한 ‘타입-오리진 0단계’로 급속히 추락했고, 전신 피부가 백색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쿵. 도현의 심장이 일시 정지했다. 뇌로 가는 산소가 끊기며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그때, 도현의 가슴 중앙에 이식된 바이오 페이서가 강한 비프음과 함께 초고전압 심폐 소생 전류를 방출했다.
지이이잉— 콰드득!
강한 전기 충격이 그의 척수와 심장 근육을 직접 때렸다. 멈췄던 심장이 둔탁하게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유전자 쇼크의 부작용으로 왼쪽 어깨와 팔의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어 고목나무처럼 늘어졌다. 도현은 바닥으로 쓰러지며 겨우 오른손으로 제네틱 컴퍼스를 품에 꼭 안았다.
“도현아! 정신 차려라!”
한태만 박사는 도현이 쓰레기 더미 뒤로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수술대 밑에 숨겨진 구형 아날로그 전력 차단기로 몸을 던졌다.
철컥!
차단기가 내려가는 순간, 의원 내부의 모든 조명과 기계 장치들이 꺼지며 완벽한 암전이 찾아왔다. 동시에 한 박사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고온 고열 소독기의 가스 밸브를 강제로 개방하고 아날로그 라이터를 격발했다.
콰아아앙—!
강렬한 화염 폭풍이 의원 중앙을 집어삼켰다. 고열의 열 방출은 발키리의 드론들이 가동하고 있던 양자 스캐너와 열감지 센서의 모니터를 완벽한 백색 노이즈 장막으로 뒤덮어 마비시켰다.
“크윽, 아날로그식 물리 교란이다! 수색대, 수동 제어로 전환하라!”
천장 너머에서 발키리의 정예 집행관들이 하강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박사는 기침을 터뜨리며 바닥을 기어 도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는 도현을 하수구와 연결된 비밀 바닥 해치 위로 밀어 넣었다.
“태만 선생님... 같이 가셔야...” 도현이 마비되어 가는 혀를 굴려 겨우 속삭였다.
“아니다. 둘이 움직이면 스캔 전파를 피할 수 없어. 내가 저들의 시선을 끌 테니, 너는 하수구를 통해 탈출해라. 그리고 기억해라... 바벨 타워 지하의 에덴-오리진을 찾아가야 한다. 네 아버지가 그곳에...”
한 박사는 도현의 품에 제네틱 컴퍼스를 단단히 쥐여준 뒤, 비밀 해치 문을 닫아걸었다.
철컥.
어두운 해치 너머로 한 박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염 속으로 걸어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유기체 반역자가 있다! 쏠 테면 쏴라, 기계 노예들아!”
한 박사의 당당한 외침과 함께, 제국 수색병들의 차가운 기계식 중화기 포격 소리가 의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뒤이어 “반역자 한태만을 체포하라. 뇌 데이터를 강제로 추출한다”라는 발키리의 잔인한 명령이 해치 틈새로 아스라이 스며들었다.
“선생님...!”
도현은 슬픔과 분노로 눈물을 흘렸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포 붕괴 지수가 40%를 돌파하며 왼쪽 어깨의 마비가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도현은 굴러떨어진 하수구 파이프 라인의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해치를 잠가 추격을 막기 위해 벽면의 전자 자물쇠 포트에 오른손을 대고 바이오-시그널 해킹을 시도했다. 하지만 유전자 쇼크로 인한 신경계의 극심한 떨림 때문에 단 0.01Hz의 주파수조차 동조시키지 못했다.
파지직—!
오히려 자물쇠에서 역류한 고전압 전자기 노이즈가 그의 뇌 신경망을 직격했다. 도현은 입가로 검붉은 유기체 피를 한 움큼 쏟아내며 바닥으로 뒹굴었다.
멀리서 제국 드론들의 비행 소음이 하수구 상부 환기구를 타고 좁혀오고 있었다. 이대로 기어가다가는 열감지 센서에 단 3초 만에 걸릴 터였다. 도현은 마지막 이성을 쥐어짜 내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분석했다.
차가운 하수구의 부식성 오물과 화학 폐기수.
도현은 마비되지 않은 오른팔을 뻗어 스스로를 차갑고 더러운 하수구 진흙과 폐기수 밑으로 밀어 넣었다. 부식성 액체가 피부를 따갑게 찔렀지만, 차가운 물과 화학 물질의 이중 격막은 제국의 양자 탐지망과 열감지 스캐너를 물리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천연 차폐막이었다.
도현은 숨을 죽인 채 오물 속에 몸을 묻었다.
머리 위 환기구 틈새로 드론들의 붉은색 스캔 레이저가 하수구 표면을 쓸고 지나갔다. 차가운 오물 덕분에 그의 생체 열 신호는 감지되지 않았고, 드론들은 경보음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바이오 페이서의 경보음이 그의 귓가에서 점점 멀어졌다. 세포 붕괴의 고통과 차가운 피폭의 오한이 그의 의식을 심연 속으로 끌어당겼다.
정신을 잃어가는 도현의 흐릿한 시야 너머로, 하수구 깊은 어둠 속에서 물을 가르는 둔탁한 금속성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철벅... 철벅...
이윽고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한쪽 안구에 기괴하게 번뜩이는 차가운 황색 안구 센서를 박아 넣은 구형 전투용 안드로이드의 거대한 형체였다. 기계 지성체의 센서가 오물 속에 쓰러진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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