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뱀의 둥지
축축한 늪지의 새벽안개를 뚫고, 두 개의 그림자가 운몽택 동부의 거대한 절벽을 향해 소리 없이 나아갔다. 앞장선 이는 가죽 약초 망태기를 메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는 열여섯 세의 약초꾼 소녀, 임소희였다. 그 뒤를 따르는 백무한의 안색은 평소보다 더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배천수의 장부에서 알아낸 철마웅의 순찰 경로를 역용해 그자를 생포하려면, 무인의 내력을 완벽히 무력화하는 극독 ‘기맥역행산’의 정제가 시급했다. 그리고 그 독의 핵심 원료인 ‘혈룡사(血龍蛇)’는 오직 이 절벽 아래의 금단 구역에만 자생하고 있었다.
“의원님, 정말 이 아래로 내려가시려는 거예요? 여긴 약초꾼들도 발을 들이지 않는 귀곡 동굴이에요. 살을 파먹는 전갈떼가 득실거린다고요.”
소희가 절벽 가장자리에 밧줄을 매며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한은 대답 대신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틀어막았다.
“쿨럭, 쿨럭…….”
손수건을 치우자 붉은 선혈이 점점이 배어 있었다. 철검문의 학살 당시 부러진 갈비뼈의 내상이 아직 아물지 않은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폐맥이 뒤틀리는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무한은 오른손의 화상 흉터를 가린 하얀 붕대를 다시 한번 질끈 동여매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철마웅의 목줄을 쥘 수만 있다면, 저승의 문턱이라도 밟아야지. 내려가자.”
무한은 내공이 전혀 없는 폐맥지체(廢脈之體)였다. 이 험난한 절벽을 내려가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나, 그의 이성은 얼음처럼 냉정했다. 소희의 안내에 따라 밧줄을 잡고 절벽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한 지 반 시진, 마침내 두 사람은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동굴 입구에 도달했다.
동굴 내부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의 심연이었다. 소희가 조심스럽게 등불을 켜자, 사방의 기괴한 석순들이 마치 괴물의 이빨처럼 일어섰다.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의 진흙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올라왔고, 사방에서 수천 마리의 곤충이 기어 다니는 불길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좀 보세요! 저게 혈룡사예요!”
소희가 가리킨 동굴 벽면 틈새에, 마치 붉은 뱀 수십 마리가 뒤엉켜 꿈틀거리는 듯한 기괴한 형상의 독초들이 붉은 광채를 미세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무인의 기가 흐르는 경락을 급격히 수축시키는 전설적인 맹독, 혈룡사였다.
무한이 혈룡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동굴 안쪽에서 강한 역풍이 불어왔다.
휘이이잉!
갑작스러운 바람에 소희가 들고 있던 등불이 격렬하게 흔들렸고, 무한이 허리춤에서 꺼내려던 해독 분말 가루 주머니가 허공으로 흩날려 사라졌다. 첫 번째 준비가 허무하게 실패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의 뒤를 이어, 바닥의 어둠 속에서 무수한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껍질이 단단한 검푸른 식사갈(食蛇蝎)들이었다. 사람의 살을 파먹는 맹독 전갈떼가 등불의 빛과 인간의 온기를 감지하고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아악! 의원님!”
소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수천 마리의 전갈들이 꼬리의 독침을 세운 채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무공이 없는 무한에게는 단 한 마리의 독침만으로도 즉사에 이를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무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심안진맥(心眼診脈).’
제 몸에 기가 흐르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대기의 미세한 진동과 전갈들이 기어오는 주파수가 머릿속에 삼차원 입체 지도로 그려졌다. 적들의 움직임이 소리보다 먼저 그의 감각에 포착되었다. 무한은 왼손으로 품속의 약주머니를 뒤적여 유황 가루와 미리 준비해 둔 독사 쓸개즙을 꺼냈다.
그는 횃불의 뜨거운 불꽃 위에 유황 가루를 뿌린 뒤, 그 위에 독사 쓸개즙 액체를 흘려보냈다.
*치이이익!*
순식간에 동굴 내부에 악취를 풍기는 황색 유독 가스가 기화되어 퍼져나갔다. 유황의 자극적인 성분과 뱀독의 상극 반응이 결합된 가스였다. 전갈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무한의 정교한 약리적 대처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물러서던 전갈 중 한 마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소희의 오른손목을 스쳐 지나갔다.
“앗……!”
소희의 손목에 붉은 찰과상과 함께 검은 독선이 순식간에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갈의 맹독이 심장으로 흐르는 주맥인 궐음심포경(厥陰心包經)을 타고 급격히 확산되는 징후였다. 이대로 두면 일 시진도 되지 않아 전신 마비로 사망할 터였다.
무한은 주저 없이 백옥은침통에서 가장 예리한 은침 두 자루를 왼손으로 뽑아 들었다. 그의 오른손은 화상 흉터로 떨리고 있었기에, 오직 피나는 수련으로 단련된 왼손의 손가락 감각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툭, 툭!*
무한의 은침이 소희의 손목 내관혈(內關穴)과 팔꿈치의 극문혈(隙門穴)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찔러 들어갔. 내공이 실리지 않은 물리적인 타격이었으나, 경혈을 정확히 압박하여 혈류를 강제로 수축시키는 신묘한 침술이었다. 소녀의 팔을 타고 기어오르던 검은 독선이 은침이 박힌 자리에 가로막혀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전갈의 독성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은침의 봉인을 뚫고 미세한 독기가 심장을 향해 꿈틀거렸다.
무한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왼손 검지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리고 솟구쳐 나오는 자신의 피 한 방울을 소희의 상처 부위에 떨어뜨렸다. 무한은 어릴 적부터 온갖 약초와 독초의 가루를 다루며 몸속에 미세한 내성을 쌓아온 ‘독성 면역력(毒性 免疫)’의 소유자였다. 그의 피는 그 자체로 강력한 산성 독을 중화시키는 상극의 해독 성분을 품고 있었다.
무한의 피가 소희의 상처에 닿자, 부글부글 끓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독혈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이내 소희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극적인 중화 반응의 성공이었다.
“살…… 살았어요?”
소희가 헐떡이며 물었다. 무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무리하게 침술을 전개하고 피를 흘린 탓에 전신에 오한이 들며 다리가 풀렸다. 동굴 벽을 짚고 비틀거리던 무한은, 소희의 은가위로 혈룡사의 뿌리를 조심스럽게 채취하여 약상자에 담았다. 복수의 가장 강력한 칼날이 준비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혈룡사가 뽑혀 나간 동굴 벽면 안쪽의 흙이 흘러내리며 기괴한 흔적이 드러났다.
자연적인 바위가 아니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인공 석벽(人工 石壁)의 모서리였다. 무한이 등불을 비추자, 석벽 표면에 새겨진 고대 묘족 문자(古代 苗族 文字)들이 어둠 속에서 기이하게 일어섰. 과거 가문의 서재에서 보았던 오독교의 비전 독경의 서체와 일치하는 흔적이었다.
석벽 한가운데에는 붉은 안료로 기묘한 주석이 적혀 있었다.
[만독의 뿌리는 하나이며, 생명을 살리는 침 끝에서 독 또한 완성된다. 낙엽(落葉)의 의도가 어찌하여 황실의 개들에게 짓밟혀야 하는가.]
무한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낙엽곡 가문의 상징인 '낙엽'의 글귀와 오독교 선대 교주의 흔적이 이 깊은 동굴 속에 함께 묻혀 있었다. 가문을 멸망시킨 천기자와 오독교, 그리고 낙엽곡의 의술이 얽힌 거대한 음모의 단서가 이 붉은 뱀의 둥지 아래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의원님…… 저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소희가 겁에 질린 채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절벽 위 지상에서부터, 자욱한 안개를 뚫고 비명 소리와 함께 무언가 타들어 가는 불쾌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동굴 안쪽으로 흘러들어왔다. 철마웅의 군대가 무한의 행방을 찾기 위해 운몽택의 무고한 유민들이 모여 사는 어부마을을 무차별 학살하며 불을 지르고 있는 참혹한 비명이었다.
무한은 채취한 혈룡사 상자를 품에 꽉 움켜쥐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푸른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복수의 시간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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