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몽택의 기침 소리
낙엽곡을 집어삼키던 뜨거운 불길은 사라졌으나,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살을 에는 듯한 축축한 한기였다.
백무한은 진흙탕 속을 기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부러진 갈비뼈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를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고, 뇌진탕의 여파로 시야는 온통 흐릿한 핏빛으로 번져 있었다. 머리를 흔들며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그의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갈대밭과 검푸른 안개가 일렁이는 거대한 늪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범죄자들과 병자들의 마지막 요새이자 무법천지라 불리는 곳, 운몽택(雲夢澤)의 입구였다.
“쿨럭, 쿨럭……!”
결국 참지 못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마른 기침과 함께 검붉은 선혈이 진흙바닥을 적셨다. 운몽택의 독특한 기후가 만들어낸 유독하고 습한 안개가 폐맥지체(廢脈之體)인 그의 망가진 기관지를 가차 없이 자극한 탓이었다. 내공이 한 톨도 없는 그의 몸은 이 음산한 안개마저 독약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한은 품속을 더듬었다. 사부의 유골함과 피에 젖은 《낙엽의경 사본》, 그리고 서른다섯 자루의 은침이 담긴 《백옥은침통》이 그대로 있었다. 가슴팍의 놋쇠 약저울판은 여전히 둔중한 무게감으로 그의 심장 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스스슥.
갈대밭 너머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들렸다. 무한은 즉각 진흙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기가 흐르지 않는 그의 체질은 적들의 기척 감지망을 피하기에 최적이었으나, 지금은 그조차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체가 무너져 있었다.
“누구냐? 거기 누워 있는 놈.”
걸걸하고 의심 가득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갈대 서너 포기가 갈라지며 낡은 어부의 옷을 입은 주름진 얼굴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의 등 뒤에는 가죽 약초 망태기를 멘 활기찬 기운의 어린 소녀가 서 있었다. 은퇴한 포교 출신의 임노인과 그의 손녀 임소희였다.
임노인은 허리가 굽어 있었으나, 손에 쥔 녹슨 추포용 쇠사슬을 가볍게 흔드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흐릿한 눈빛 속에 전직 포교 특유의 경계심과 날카로움이 번뜩였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낙엽곡에서 도망친 쥐새끼인가? 아니면 철검문의 첩자인가?”
임노인이 쇠사슬을 들어 올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무한은 대답 대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만큼은 이성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한은 임노인의 뒤에 서 있는 소녀, 임소희를 응시했다.
소녀의 오른손 끝이 미세하게 푸른빛으로 착색되어 있었다. 피부 아래의 모세혈관이 비정상적으로 수축해 검푸른 줄무늬가 번져가는 꼴이 무한의 ‘심안진맥’에 포착되었다.
“소녀의…… 손을 보십시오.”
무한이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라?”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끝마디가 이미 푸르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사흘간…… 운몽택 동쪽 절벽 밑 동굴에 들어간 적이 있겠지요.”
임노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뒤에 서 있던 임소희 역시 놀란 듯 제 손을 감추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곳에 자생하는 희귀 독초인 ‘혈룡사(血龍蛇)’를 만진 흔적입니다. 무색무취의 독성이 피부를 통해 침투해, 앞으로 두 시진 뒤면 전신 경맥이 경화되어 심장이 멈출 것입니다. 지금…… 명치끝이 찌르는 듯이 아프고 호흡이 가쁘지 않느냐?”
무한의 날카로운 지적에 임소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실제로 사경을 헤매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임노인의 경계심 가득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과 절박함으로 뒤바뀌었다.
“이, 이 아이를 살릴 방법을 아는 건가? 네놈, 정체가 뭐냐!”
“살리고 싶다면…… 나를 늪지 안쪽으로 숨겨 주십시오. 그리고…….”
무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갈대밭 외곽에서 거친 외침과 함께 횃불의 붉은 불빛들이 어둠을 찢고 솟구쳐 올랐다.
“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낙엽곡의 생존자가 이 근처로 기어 들어왔다는 보고가 있었다! 쥐새끼 한 마리도 살려보내지 마라!”
철검문 삼분타의 하급 조장 고팔(高八)의 목소리였다. 무자비한 쇳소리와 함께 피난민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수색 무사들이 늪지 경계의 무고한 유민들을 도륙하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제길,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군!”
임노인이 이빨을 갈며 쇠사슬을 움켜쥐었다. 무한은 밀려오는 기침 발작을 억누르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갈대밭의 바람 방향을 읽었다. 남동풍이었다. 적들은 바람을 등지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한은 품속에서 작은 종이 주머니를 꺼냈다. 낙엽곡에서 탈출할 때 비상용으로 챙겼던 미세 약초 가루들이었다. 향기를 맡는 즉시 전신 신경을 마비시키고 환각을 일으키는 ‘약향 장막(藥香帳幕)’의 원료였다.
“노인장, 소희를 데리고 내 등 뒤로 엎드리십시오. 숨을 참아야 합니다.”
무한은 송학도인에게 배웠던 거기조식법(馭氣調息法)을 전개했다. 단전에 기는 없었으나, 호흡의 주기를 극단적으로 늦추어 전신의 기척과 심장 박동 소리를 완벽히 죽였다. 이윽고 서른 명에 달하는 철검문 무사들이 횃불을 치켜들고 갈대밭을 헤치며 나타났다. 선두에 선 고팔의 험악한 얼굴이 횃불 빛에 그을려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쪽에 핏자국이 있다! 멀리 가지 못했을 터, 갈대를 모조리 베어버려라!”
고팔의 지시에 무사들이 일제히 철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무한과의 거리는 불과 오 장.
무한은 왼손 끝으로 약향 주머니를 가볍게 터뜨렸다. 바람이 붉은색에 가까운 미세한 약초 가루를 부채꼴 모양으로 흩날리며 철검문 무사들의 안면을 덮쳤다. 자욱한 안개와 섞인 약향은 무색무취에 가까워 적들은 그것이 독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흡? 콜록! 이게 무슨 냄새…….”
“어, 어라? 눈앞이 왜 이러지? 왜 갈대들이 뱀으로 보이는 거냐!”
약향 가루를 들이마신 무사들이 갑자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풀리며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환각에 빠진 무사들은 발걸음을 헛디뎌 운몽택 특유의 깊은 진흙 구덩이 속으로 허우적대며 빠져 들어갔다. 늪의 끈적한 진흙이 그들의 무거운 가죽 갑옷을 아래로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으아악! 살려줘! 발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이곳에 귀신이 있다! 보이지 않는 귀신이!”
아수라장이 된 진형 뒤편에서 고팔이 이빨을 깨물었다. 그는 삼류 무사치고는 눈치가 빠른 자였다. 무언가 기묘한 약리적 함정에 당했음을 직감한 그가 소리를 질렀다.
“당황하지 마라! 궁수들, 저 안개 속을 향해 맹목적으로 화살을 날려라! 쏴라!”
슈슈슈슉!
수십 발의 화살이 어둠을 뚫고 무한이 엎드린 갈대밭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억눌러왔던 무한의 뒤틀린 폐맥이 한계에 도달했다. 가슴을 찢는 듯한 기침 발작이 터져 나왔다.
“쿠, 쿨럭……!”
기침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앞으로 크게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무너짐이 아니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몸의 무게중심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는 반동을 이용한 기묘한 비전 보법, ‘기침 회피 보법(咳避步)’이었다.
독 화살 한 자루가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을 스치며 진흙바닥에 박혔고, 또 다른 화살은 가슴팍의 놋쇠 약저울판을 긁으며 불꽃을 튕겼다. 무한은 기침을 쏟아낼 때마다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상체를 꺾고 바닥을 구르며 쏟아지는 화살의 궤적을 귀신같이 피해 나갔다. 내공이 전혀 없는 그의 몸이었기에 가능했던, 물리적 역학을 극한으로 이용한 도주였다.
“저기다! 저기 기침 소리가 들린다! 불을 질러라!”
고팔이 광포하게 외치며 횃불을 갈대밭 한가운데로 던졌다. 기름이 묻은 갈대들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며 거대한 화마의 장막이 무한의 배후를 덮쳐왔다. 뜨거운 열기와 매연이 다시금 그의 폐를 죄어오기 시작했다.
임노인이 소희를 짊어진 채 무한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의원 양반! 이쪽이네! 나를 따르게!”
무한은 입가에 고인 핏자국을 하얀 붕대가 감긴 오른손으로 닦아내며, 불길이 치솟는 갈대밭 너머의 깊은 진흙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는 고팔의 횃불들이 운몽택의 안개를 붉게 물들이며 무서운 기세로 추격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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