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속에서 기어 나온 의원
매캐한 매연과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낙엽곡(落葉谷)의 밤하늘을 삼키고 있었다. 대대로 인술을 펼치며 무림의 상흔을 치료하던 의문(醫門)의 요람은 단 하룻밤 만에 지옥도로 변해 있었다. 불타 무너진 전각의 잔해 아래, 백무한(白慕寒)은 서서히 눈을 떴다.
"윽……!"
숨을 들이쉬려 했으나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압박감과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목구멍을 타고 울컥 솟구친 검붉은 핏덩이가 마른 흙바닥을 적셨다. 무한의 몸 위를 덮고 있는 것은 차갑게 식어가는 부친이자 사부인 백소문(白素問)의 육신이었다. 습격이 시작되던 순간, 백소문은 무공 한 자루 쓸 줄 모르는 병약한 아들을 제 몸으로 감싸 안고 타오르는 약창의 불길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무한은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 피를 토하며 품에 안겨주었던 책을 움켜쥐었다. 가문의 정통 의학 비전서인 《낙엽의경 사본(落葉醫經 寫本)》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부의 유품인 《백옥은침통(白玉銀針筒)》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한은 뼈마디가 드러난 창백한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가슴팍 안쪽에서 묵직한 쇳소리가 들렸다. 품을 더듬자 가문의 저울질에 쓰이던 두꺼운 놋쇠 약저울판(鍮石 藥秤盤)이 만져졌다. 철검문(鐵劍門) 무사의 치명적인 검날이 그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우연히 품에 지니고 있던 이 두꺼운 저울판이 검 끝을 물리적으로 가로막아 튕겨낸 것이었다. 저울판 중심에는 깊게 파인 검 자국이 선명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무한 역시 이미 저 차가운 시체 더미의 일원이 되었을 터였다.
무한은 간신히 몸을 움직여 아버지의 시신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갈비뼈 부근이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뇌진탕과 골절의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한을 괴롭히는 것은 태생적인 지병이었다.
폐맥지체(廢脈之體).
그는 날 때부터 단전에 기를 모을 수 없고 전신의 경락이 뒤틀린 불구였다. 무공을 익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몸. 삼류 무사조차 그에게는 천하무적의 괴물과 같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제 몸에 기가 한 톨도 흐르지 않았기에 무한은 타인의 몸속에 흐르는 진기의 미세한 파동을 그 누구보다 객관적이고 예리하게 진단할 수 있었다. 오직 의원으로서의 감각만으로 도달한 신비로운 경지, 심안진맥(心眼診脈)이었다.
사방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 너머로, 불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가볍지 않고 거칠며, 내공의 흐름이 정제되지 않아 흙먼지를 일으키는 발소리였다. 무한은 즉각 숨을 죽였다. 전방 이십 장 거리에 두 명. 내력이 단전에서 발끝으로 투박하게 흘러가는 꼴을 보니 철검문의 삼류 무사(三流 武士)들이 틀림없었다. 학살을 자행한 뒤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는지 수색하는 잔당들이었다.
"제길, 폐맥이 또 발작하려는 건가."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오르며 기침이 터져 나오려 했다. 이 상황에서 기침 소리가 새어 나간다면 즉시 목이 베일 터였다. 무한은 급히 백옥은침통을 열어 가늘고 정교한 은침 한 자루를 꺼냈다. 손가락 끝의 떨림을 극단적으로 제어하며, 제 목덜미의 통증 제어 혈도인 천돌혈(天突穴)과 대추혈(大椎穴)을 정확히 찔렀다.
은침이 살을 뚫고 들어가 경맥의 흐름을 억누르자, 발작하려던 기침과 극심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기를 쓰지 않고 순수한 해부학적 지식만으로 제 신체의 반응을 강제로 통제한 것이었다. 무한은 불타 무너진 약장 그늘 뒤로 몸을 바짝 숨겼다.
"어이, 이쪽은 전부 시체뿐이다. 낙엽곡 늙은이들은 무공도 없는 약골들이라 그런지 찌르는 족족 죽어나가는군."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가죽 갑옷을 입은 철검문 무사 한 명이 약창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 쥔 철검 끝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사는 귀찮다는 듯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들을 검으로 대충 찔러 확인하며 무한이 숨은 약장 쪽으로 다가왔다.
열 장, 다섯 장, 세 장…….
무사의 거친 호흡 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무한은 좁은 틈새로 적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무사의 단전에서 검을 쥔 오른손으로 진기가 흐르는 주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찰나의 틈이 삼차원 입체 지도처럼 무한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무공은 없으나, 적의 기맥 흐름을 완벽히 읽어내는 눈이 번뜩였다.
무사가 마침내 무한이 숨은 약장 옆의 시체 더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스윽!
검날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오는 순간, 무한은 품속의 유석 약저울판을 움켜쥐고 시체 사이로 교묘하게 밀어 넣었다.
깡!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시체를 찌른 줄 알았던 검 끝이 단단한 황동 판에 가로막히자, 무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뭐, 뭐야?!"
적이 경악하여 상체를 뒤로 물리며 단전의 진기를 방출하려던 바로 그 찰나, 무사의 호흡 주기가 완벽히 흐트러졌다. 진기가 경맥의 중심에서 갈 길을 잃고 요동치는 가장 취약한 순간이었다.
무한은 망설이지 않고 왼손 소매 속에 장착된 탄성 사출 장치의 실을 당겼다. 무음(無音)의 은침이 허공을 갈랐다.
픽!
은침은 정확하게 무사의 목덜미 뒤편,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아문혈(啞門穴)에 관통했다. 무사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목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당황한 무사가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무한은 이미 그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무한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적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무공이 없는 약골 의원의 몸뚱이였지만, 적의 관절이 꺾이는 궤적을 미리 읽었기에 가능한 침투였다. 무한은 두 번째 은침으로 무사의 손목 안쪽 내관혈(內關穴)을 강하게 찔렀다.
"흡……!"
내관혈에 박힌 은침의 미세한 진동이 무사가 억지로 끌어올리던 진기의 흐름을 강제로 차단했다. 갈 길을 잃은 진기가 역류하며 적의 경맥을 안에서부터 찢어발겼다. 무사는 전신이 굳어버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전신 마비 상태였다.
무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무사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다시 감돌았다. 내공 없이 정밀한 사혈 타격을 가한 대가로 그의 뒤틀린 폐맥이 다시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은침 한 자루를 적의 목덜미에 꽂아둔 채 회수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때, 바깥에서 다른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서 무슨 소리가 난 거냐? 대답해라!"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한은 쓰러진 무사의 손에서 흘러내린 철검을 바라보았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 쓰러진 철검문 무사의 칼자루 끝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철검문의 문양이 아니었다.
낙엽곡 백씨 가문에서만 대대로 사용되던, 기경팔맥의 이치를 형상화한 은밀한 가문의 비전 문양이었다. 수년 전 의술의 한계를 느끼고 가문을 배신해 달아났던 그의 숙부 백소우, 즉 지금은 천하를 약물로 지배하려 드는 가짜 의선 천기자(天機子)의 표식이었다.
"……숙부."
무한의 창백한 얼굴이 분노와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낙엽곡을 도륙한 자들의 칼날 뒤에 가문의 배신자가 서 있었다. 가슴을 찌르는 진실이 타오르는 불길보다 더 뜨겁게 그의 영혼을 불태웠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약창 문턱을 넘기 직전, 백무한은 《낙엽의경 사본》을 가슴에 품은 채, 연기 자욱한 뒤편의 무너진 벽 틈새를 향해 처절하게 몸을 던졌다.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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