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현실의 족쇄를 끊다
아린의 목덜미에 새겨진 올림포스의 계약 문양이 피처럼 붉게 타오르며 요란한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경고: 계약 이행 조항 위반 감지.]
[청부 대상 말살 실패 및 비밀 누설 조항 발동. 즉결 처형 프로토콜을 기동합니다.]
[뇌파 동조 자폭 장치 작동까지 남은 시간: 3초.]
“치익…… 윽!”
아린의 가냘픈 목덜미에서 지독한 타는 냄새와 함께 붉은 전류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목을 조여오는 나노 와이어 인장이 살을 파고들며 그녀의 뇌 신경망으로 직접 치명적인 고전압 펄스를 주입하려 하고 있었다. 온몸이 티타늄 와이어에 묶여 있던 아린은 고통으로 신음하며 고개를 꺾었다. 동생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올림포스의 사냥개가 되어 온갖 더러운 피를 손에 묻혀왔건만, 돌아온 것은 가차 없는 용도 폐기였다.
“비켜라! 내가 저 장치를 베어내겠다!”
태희가 서슬 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아스칼론을 치켜들었다. 푸른 전격이 대검의 검신을 타고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경훈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태희의 검끝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저건 단순한 기계식 폭탄이 아니야! 아린 씨의 뇌파와 동기화된 신경망 인장입니다. 외부에서 강제로 충격을 가해 파괴하는 순간, 뇌 세포가 통째로 타버려 즉사해요!”
경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뇌파 오버클럭의 부작용으로 오른쪽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이명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고, 입안에서는 쇠맛밖에 나지 않는 극심한 미각 마비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지만, 그의 두뇌만큼은 얼음처럼 차갑고 정교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단 2초.
경훈은 주저 없이 품에서 센티넬 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아린에게로 몸을 던졌다. 어깨의 검창 자상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내렸으나, 경훈은 개의치 않고 패드의 보조 전원 케이블을 아린의 목걸이 단자에 물리적으로 꽂아 넣었다.
탁!
[외부 기기 접속 감지. 동기화 주파수 탐색 중.]
“오라클! 백도어 포트를 열어!”
경훈이 마음속으로 울부짖자, 센티넬 패드의 화면이 푸른색 홀로그램 노이즈로 뒤덮이며 스승인 오라클의 음성이 귀가 아닌 뇌리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 미쳤군, 꼬맹이! 올림포스의 다이렉트 킬 스위치다! 메인 프레임의 보안 방화벽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어. 내가 루트 99의 우회 경로를 열어줄 테니, 3초 안에 계약서의 소스코드를 통째로 재작성해라! 실패하면 네 뇌도 같이 타버린다!
동시에 패드 화면에 아린의 목숨을 옭아매고 있는 복잡한 신경 코딩 체인, ‘영혼 저당 청부 계약서’의 붉은색 실행 루프가 떠올랐다.
[자폭 프로토콜 기동까지 남은 시간: 1초.]
경훈은 이빨을 악물며 자신의 고유 특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오버클럭 뇌파, 가동!’
징————!
순간, 경훈의 눈동자가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풍경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흐려졌고, 요란하게 울리던 자폭 경고음마저 극도로 느려진 테이프 리코더처럼 늘어졌다. 1초의 시간이 수백 배로 늘어나는 초연산의 세계.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경훈의 우측 귀에서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으나, 경훈은 패드의 가상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번개처럼 놀렸다.
[보안 방화벽 우회 칩 이식 완료. 코딩 재작성 시작.]
그 순간, 관리국 제어실에서 상황을 모니터링하던 에이전트 블레이크의 화면에 경고등이 켜졌다.
“뭐지? 1구역의 하찮은 데트 플레이어가 즉결 처형 코드를 해킹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즉시 해당 단말기를 강제 포맷해라!”
블레이크가 거칠게 콘솔을 두드리자, 아린의 목걸이를 향해 붉은색 강제 포맷 명령 데이터 장벽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해킹 코드가 완성되기 전에 경훈의 센티넬 패드를 통째로 태워버릴 기세였다.
- 꼬맹이! 포맷 프로그램이 온다! 피해!
오라클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경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하나의 궤적만이 그려지고 있었다.
‘피하면 죽는다. 포맷 명령이 도달하는 속도는 초속 300메가바이트. 하지만 내 오버클럭 연산 속도는 그보다 빠르다.’
경훈은 아르카나 설계도의 주파수 공식을 응용하여, 아린의 계약서 소스코드 맨 밑줄에 새로운 코드를 삽입했다.
[계약 주체 변환: 올림포스 코포레이션 -> 민경훈]
[처형 프로토콜 비활성화. 종속 계약 파쇄.]
타닥!
경훈이 마지막 엔터 키를 누른 순간은, 블레이크의 강제 포맷 명령이 단자에 닿기 딱 0.1초 전이었다.
파지직!
아린의 목덜미를 시뻘겋게 태우던 붉은 인장 문양이 순간 푸른빛으로 점멸하더니, 유리가 깨지는 듯한 맑은 소리와 함께 완전히 산산조각 나며 소멸했다.
[알림: '영혼 저당 청부 계약서'가 완전히 파쇄되었습니다.]
[설아린의 즉결 처형 프로토콜이 해제되었습니다.]
“허억……! 하아, 하아……!”
목을 죄어오던 죽음의 쇠사슬이 사라지자, 아린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붉은 화상 자국만이 남았을 뿐, 더 이상 자폭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즉결 처형 코드가…… 지워졌다고?”
아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평생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며 죽음의 공포로 지배하던 올림포스의 족쇄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기계 패드 하나와 눈앞의 나약한 남자의 손끝에서 허무하게 깨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은 뇌파 오버클럭의 심각한 반동으로 인해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그가 치른 대가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살았…… 네요, 아린 씨.”
경훈이 쉭쉭거리는 거친 숨을 내쉬며 희미하게 웃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 자신의 목소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온화했다.
아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붕괴해 내렸다.
그녀는 평생 올림포스의 도구이자 살인 병기로만 길러졌다. 실패하면 죽는 것, 약자는 도태되는 것이 아레나의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암살자인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아무런 이득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뇌 세포를 태워가며 피를 흘렸다.
그것은 아린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조건 없는 구원이었다.
스르륵.
경훈의 티타늄 와이어 덫이 해제되자, 자유로워진 아린은 도망치는 대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은빛 단발머리를 늘어뜨린 채, 경훈의 앞으로 기어 와 그의 피 묻은 오른손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경훈의 손등에 가만히 맞대었다.
“……내 영혼을 구원해 준 나의 주인.”
아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차가운 암살자의 것이 아니었다. 열에 들뜬 듯 미세하게 떨리는, 맹목적인 복종과 광적인 소유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올림포스의 족쇄는 풀렸습니다. 이제 제 목숨도, 제 단검도, 제 그림자도 전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가리키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베어버리겠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경훈을 향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집착의 안광을 뿜어냈다. 평생의 한이었던 동생의 복수와 자신의 생존이라는 목적이, 이제 오직 '민경훈'이라는 존재 하나로 완벽하게 수렴된 순간이었다.
태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대검 아스칼론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녀의 심장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불꽃과 함께 강렬한 질투의 오라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이봐, 암살자.”
태희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푸른색 전격 스파크가 다시금 사납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그 손을 만지는 거지? 경훈 씨는 나와 먼저 동맹을 맺은 사람이다. 그의 방패는 나 하나로 충분해. 그림자 주제에 감히 선을 넘지 마라.”
아린은 이마를 뗀 채 고개를 돌려 태희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방패는 정면의 공격만 막을 뿐이죠. 그의 등 뒤를 지키는 그림자는 오직 나뿐입니다. 먼저 손을 잡았다고 해서 독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검사.”
두 여성 최강자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서로를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오라가 격돌하는 와중에도,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침상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는 경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경훈은 극심한 두통과 함께 일시적인 균형 감각 소실로 몸이 비틀거렸다.
“어라…… 왜 세상이 도는 것 같지……”
그가 쓰러지려 하자, 태희와 아린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붙잡았다.
“경훈 씨!”
“주인님!”
두 여자의 손이 경훈의 몸을 붙잡으며 서로를 향해 다시 한번 으르렁거리는 찰나, 안전 가옥 A-3의 외곽 감시 안테나가 붉은빛을 내뿜으며 요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경고: 외부 감시 센서 출력 급증 감지.]
[에이전트 블레이크가 미로 1구역의 전자기 스캔 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립니다.]
블레이크의 해킹 실패에 대한 분노가 미로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안전 가옥의 두꺼운 철문 너머로, 수십 마리의 기계 사냥개들이 철창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불길한 소리가 서서히 가옥 주변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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