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송곳니, 덫에 걸리다
“몰락한 가문의 어린 검사여, 그리고 시스템의 룰을 깨부순 이방인이여.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가지 말라.”
낡은 후드 아래로 흘러나온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으나, 미로 전체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진동처럼 묵직한 힘을 담고 있었다.
강태희는 본능적으로 가슴이 턱 막히는 위압감을 느꼈다. 동맹 금지 패널티로 인해 몸을 감싸던 푸른 전격 오라는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상태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붉은색 감쇄 오라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고, 등 뒤에 업힌 민경훈의 마른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누구냐, 영감.”
태희는 이를 악물며 대검 아스칼론의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력이 절반이나 감쇄된 상태였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살기를 뿜어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약한 숨을 몰아쉬는 경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눈앞의 정체 모를 노인의 목이라도 당장 베어버릴 기세였다.
백발의 노인, 노아는 그런 태희의 살기 어린 경계를 느긋하게 받아치며 지팡이 끝으로 바닥의 철판을 톡, 톡 두드렸다.
“네 등의 청년은 이미 뇌파 오버클럭의 대가로 신경계가 타들어가고 있군. 이대로 가다간 뇌사(腦死)에 이를 터. 내 뒤편에 있는 ‘안전 가옥 A-3’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노아의 시선이 경훈의 주머니 틈새로 비치는 낡은 수첩으로 향했다.
“이 미로의 가변 주기는 12시간. 하지만 시스템의 본질을 해킹하지 않고서는 결코 열 수 없는 고대 아르카나의 톱니바퀴가 존재하지. 그 톱니의 주파수를 맞출 기하학적 열쇠가 무엇인지 아느냐?”
“무슨 헛소리를……!”
태희가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그녀의 어깨 너머로 뻗어 나온 가냘프고 떨리는 손가락이 노아의 시선을 붙잡았다.
“……443.”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경훈이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다. 오버클럭의 부작용으로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이명이 가득했고, 입안에서는 쇠맛밖에 나지 않는 미각 상실 상태였지만, 그의 두뇌만큼은 여전히 차갑게 회전하고 있었다.
경훈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센티넬 패드를 켜고, 머릿속에 각인된 아버지 민병선의 수첩 속 기하학 기호를 복사해 화면에 띄웠다.
“아버지가 남긴 수첩…… 12페이지의 기하학 기호. 그것은 단순한 공학 기호가 아니라 고대 아르카나 엔진의 주파수 공식입니다. 기본 대역폭 443Hz에 공명 주파수 1.618을 곱한 값…… 그것이 당신들이 숨겨둔 백도어의 진동수죠.”
노아의 눈동자가 후드 그늘 속에서 번쩍였다. 노인은 깊은 침묵 끝에 허탈한 듯, 혹은 경이로운 듯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민병선의 자식인가. 아비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군.”
노아는 지팡이를 거두며 허리춤에서 고대의 청동 열쇠 하나를 던졌다.
“가라. 그 안전 가옥은 이제 너희들의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라. 아비의 유산을 완성할 첫 번째 열쇠다.”
노아가 던진 또 다른 물건은 낡은 양가죽 종이 조각이었다. 경훈이 그것을 받아 들자 센티넬 패드가 요란하게 반응했다.
[고대 함정 도면 ‘아르카나 설계도 (1페이지)’ 획득 완료.]
[물리 법칙 왜곡 함정의 구조 해석을 시작합니다.]
“고맙군, 영감.”
태희는 노아가 길을 비켜서자마자 경훈을 업고 안전 가옥 A-3의 두꺼운 강철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전 가옥 내부는 아레나의 삼엄한 감시 전파가 전혀 닿지 않는 완벽한 차폐 공간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두 사람의 전신을 옭아매던 붉은색 동맹 패널티 오라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력이 정상적으로 순환하기 시작하자, 태희는 긴장이 풀려 경훈을 부드러운 침상에 눕히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바보 같은 놈.”
태희는 침대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경훈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코끝에는 아직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무력은 0에 가까운 나약한 존재인데, 왜 이 남자의 앞에만 서면 가슴이 이토록 뛰고, 그를 잃을까 봐 두려워지는 것일까.
그녀는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경훈의 얼굴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평생 검만을 쥐어 거칠어진 그녀의 손길이었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배신하지 않는 동맹이라니…… 내게 이런 안식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민경훈.’
태희의 차가운 눈동자에 묘한 독점욕과 수호의 불꽃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훈은 쉴 틈이 없었다. 그는 기어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센티넬 패드를 켰다. 귀의 이명은 여전했고 몸은 무거웠지만, 뇌는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태희 씨, 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우리 위치가 일시적으로 가려졌을 뿐, 시스템은 반드시 사냥개를 보낼 겁니다. 특히 내 해킹 능력을 경계하는 관리자가 직접 움직였다면 더더욱.”
경훈은 안전 가옥 내부 창고를 뒤져 고강도 티타늄 와이어를 찾아냈다. 그리고 방금 노아에게 받은 ‘아르카나 설계도 (1페이지)’를 패드로 스캔해 기하학적 궤적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르카나 설계도에 담긴 물리 왜곡의 원리…… 특정 장력 하에서 와이어의 진동 주파수를 극대화하면, 접촉하는 물체의 운동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제로(0)로 만들고 분자 결합을 끊어낼 수 있다.’
경훈은 안전 가옥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병목 구간인 어두운 골목 입구에 주목했다. 그는 골목 벽면의 녹슨 파이프와 철근 틈새에 고밀도 티타늄 와이어를 기하학적 격자 형태로 촘촘히 얽어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공기의 굴절률마저 계산해 은폐시킨 치명적인 절단 덫이었다.
“이런 실오라기 같은 선으로 침입자를 막을 수 있다는 건가?”
태희가 대검을 짚은 채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단순한 와이어가 아닙니다. 이건 아르카나 공식을 대입해 장력을 극대화한 ‘분자 절단 와이어 덫’입니다. 공중으로 뛰어드는 날렵한 자일수록, 자신의 속도 때문에 온몸이 갈가리 찢기게 될 겁니다.”
경훈은 쉭쉭거리는 거친 숨을 고르며 패드의 원격 기폭 장치 주파수를 와이어의 고정 앵커에 동기화했다. 틱. 셋업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가옥 주변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밀폐된 미로 속에서, 아주 미세한 공기의 진동이 경훈의 ‘오버클럭 뇌파’ 감지망에 포착되었다.
‘왔군.’
경훈은 즉시 태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태희는 아스칼론을 비껴 쥐며 가옥의 입구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스으으읍—!
어둠 속에서 푸른빛 안광조차 감춘 은밀한 그림자가 벽면을 타고 번개처럼 쇄도했다. 올림포스 코포레이션의 비밀 청부를 받고 경훈의 목을 베기 위해 파견된 정예 암살자, 설아린이었다.
아린은 ‘그림자 습격’ 기술을 사용하여 완벽한 무음 상태로 가옥의 지붕을 타고 도약했다. 그녀의 고양이 같은 매혹적인 눈동자에는 오직 목표물인 경훈의 숨통을 끊겠다는 잔혹한 살기만이 서려 있었다.
“거기냐!”
태희가 기척을 느끼고 대검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막아섰다. 푸른 전격이 대검 아스칼론의 검신을 타고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아린은 공중에서 기괴할 정도로 유연하게 신체를 비틀었다. 그녀의 고유 무공인 공간 왜곡 보법이 발동하며 태희의 전격 참격은 단 1센티미터 차이로 허공을 갈랐다.
“나약한 방패 따위가 막을 수 없다.”
아린은 태희의 등 뒤를 밟고 도약하며, 허리춤에서 전자기 차폐 나노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신체는 다시 한번 그림자 속으로 완벽히 녹아들었고, 그녀의 착지 예정지는 정확히 경훈이 서 있는 가옥 입구 정면이었다.
태희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훈 씨! 피해요!”
그러나 경훈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은빛 눈동자는 이미 아린의 도약 궤적과 착지점, 그리고 그녀가 밟을 마지막 타일의 위치를 ‘함정 예측안’의 붉은 선으로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걸렸어.’
경훈은 차분하게 센티넬 패드의 화면을 터치했다.
징————!
골목 입구의 허공에서 고주파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고밀도 티타늄 와이어들이 아르카나 주파수에 공명하며 보이지 않는 기하학적 장막으로 화했다.
“……앗?!”
공중에서 급강하하던 아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은신해 있던 그녀의 나노 슈트 표면이 허공에 닿는 순간, 보이지 않는 와이어의 엄청난 탄성과 장력에 걸려 강제로 스텔스가 해제되었다.
스카각, 카각!
“으아악!”
아린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 가죽 슈트가 와이어의 초고강도 장력에 눌려 찢겨 나갔고, 티타늄 와이어들이 그녀의 양팔과 다리, 목줄기를 정밀하게 결박하여 옭아맸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와이어가 살을 파고들어 뼈를 끊어낼 기세였다.
그녀의 손에서 나노 단검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철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아린은 온몸이 묶인 채 바닥에 엎드려 경훈을 노려보았다. 은빛 단발머리가 헝클어진 채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에는 굴욕과 독기가 가득했다.
태희가 대검을 아린의 목에 겨누며 차갑게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라. 목뼈가 단숨에 절단될 것이다.”
하지만 아린은 평생 올림포스의 도구로 살아온 살수였다. 그녀는 실패의 대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다물어지며, 어금니 뒤편에 숨겨둔 초소형 독침을 경훈의 목덜미를 향해 뱉어내려 기동했다.
그 찰나의 움직임마저 경훈의 예측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경훈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센티넬 패드를 들어 올렸다. 패드의 화면에서 푸른색 홀로그램 문서 하나가 공중에 투영되었다.
그것은 올림포스 코포레이션의 극비 서버에서 경훈이 직접 해킹해 추출한, 설아린의 ‘영혼 저당 청부 계약서’ 원본 데이터였다.
“입안의 독침을 뱉기 전에 내 말을 먼저 듣는 게 좋을 겁니다, 설아린 씨.”
경훈의 목소리가 좁은 골목에 차갑게 울렸다.
“네가 사람을 죽일 때마다 현실의 가족 빚이 탕감된다는 계약…… 그거, 올림포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한 허위 부채더군요. 네 진짜 동생은 이미 3년 전에 사망 처리되었고, 네가 벌어들인 크레딧은 전부 이사진들의 가상 베팅 자금으로 세탁되었습니다.”
“……뭐?”
아린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어금니 사이에 물려 있던 독침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고양이 같던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는 충격과 패닉으로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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