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조건, 흔들리는 붉은 실
치지직, 치직! 쿠구구구구—!
격리실의 철창 벽이 무너지며 뿜어낸 백색의 고압 증기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뜨거운 수증기 사이로 붉은 비상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쇠가 긁히고 톱니가 뒤틀리는 굉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으윽……!”
민경훈은 무너진 격리실 바닥에서 간신히 기어 나와 차가운 철판 바닥을 짚었다. 어깨의 가죽 끈이 찢어진 틈새로 검풍에 베인 얕은 상처에서 붉은 선혈이 울컥 배어 나왔다. 하지만 어깨의 통증보다 더 끔찍한 것은 뇌를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었다.
[위험. 시스템이 인가되지 않은 동맹 행위를 감지했습니다.]
[‘동맹 금지의 패널티 법칙’을 강제 발동합니다.]
머리 위 허공에서 붉은색 감시 레이저가 낙하하듯 쏟아지더니, 경훈과 강태희의 전신을 옭아맸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턱 막히는 압박감이 짓눌러왔다. 몸에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사지가 무거워졌고, 시야 가장자리가 핏빛 오라로 일렁였다.
“하아, 하아…… 마력이, 반으로 꺾였어.”
옆에서 대검 ‘아스칼론’을 짚고 일어서던 강태희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몸을 감싸던 서슬 퍼런 전격 오라가 눈에 띄게 흐려져 있었다. 실버 엘리트급의 강력한 검사였던 그녀조차 동맹 패널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마력의 순환이 강제로 제어당해 절반의 힘밖에 낼 수 없는 상태였다.
경훈은 입술을 깨물며 센티넬 패드를 켜려 했다. 하지만 뇌파 오버클럭의 반동으로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귀가 먹먹해지더니 사방의 소음이 아득한 수중 속 소리처럼 흐릿하게 변했다. 일시적인 청각 소실이었다. 피비린내조차 느끼지 못하는 미각 상실에 이어 청각마저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타다다다닥—!
그때, 붉은 안개가 자욱한 미로 통로 저편에서 기계식 관절이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소리만이 아니었다. 상공의 천장 배관 사이로 푸른빛 안광을 번뜩이는 비행체들이 떼를 지어 날아왔다.
[시스템 감시 드론 ‘아이-01’ 무리가 접근 중입니다.]
빨간색 레이저 스캔 라인이 거미줄처럼 벽면과 바닥을 훑으며 두 사람이 서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좁혀왔다. 일명 ‘시스템의 눈’이라 불리는 자폭 정찰 드론들이었다. 락온이 완료되는 순간, 수십 마리의 드론이 일제히 날아와 스스로를 폭발시켜 침입자를 소멸시킬 터였다.
“쥐새끼 같은 기계 놈들이……!”
태희가 이를 갈며 대검을 고쳐 쥐었다. 비록 마력이 반토막 났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도망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가 검신에 전격을 모아 상공의 드론들을 향해 휘두르려던 찰나, 경훈이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은빛 손목 보호대를 강하게 붙잡았다.
“안 돼……!”
경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스스로가 내뱉는 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는 상태였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태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검기를 날리면…… 음향 센서가 즉각 반응해. 주변 2구역에 대기 중인 기계 사냥개 본대까지 전부 이리로 몰려올 거다. 지금 우리 능력치로는 감당 못 해.”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저 드론들의 스캔에 걸려 자폭 폭격을 맞게 된다!”
태희가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말대로 레이저 스캔의 붉은 선은 이미 그들의 발밑 5미터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단 몇 초 뒤면 꼼짝없이 정체가 노출될 위기였다.
경훈은 주저앉은 채 센티넬 패드를 들어 올렸다. 화면에 주파수 변조 대역폭을 띄웠으나, 손끝이 사정없이 떨려 정밀한 조작이 불가능했다. 뇌파가 한계 이상으로 과부하되어 손가락 근육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뚝, 뚝. 경훈의 코끝에서 붉은 선혈이 떨어져 패드 액션을 적셨다.
“이거…… 잡아.”
경훈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태희의 손에 센티넬 패드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뭐? 내가 이걸 어떻게 만지라는 거야! 나는 이런 기계 장치는 모른다!”
태희의 차가운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어린 기색이 역력하게 스쳤다. 평생 검만을 쥐고 살아온 그녀에게 홀로그램 데이터가 어지럽게 흐르는 공학 패드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해…… 좌측 상단의 푸른색 노드를 길게 눌러.”
경훈은 태희의 손가락을 직접 붙잡아 패드 위로 유도했다. 그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가죽 멜빵바지 새로 드러난 몸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태희는 순간적으로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와 온몸에서 풍기는 처절한 생존의 의지에 묘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자신을 배신하고 목숨을 구걸하던 현실의 인간들과는 달랐다. 이 남자는 무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시스템의 룰을 깨부수고 스스로의 뇌를 태워가며 판을 짜고 있었다.
“눌렀어. 다음은?”
“우측 슬라이드 바를…… 443Hz 대역으로 조절해. 그리고 하단의 우회 스위치를 켜.”
경훈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 지시에 따라 태희는 난생처음 만지는 터치스크린을 조심스럽게 조작했다.
삐이이이—!
그 순간, 드론 ‘아이-01’의 붉은 레이저 광선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정확히 관통했다. 태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대검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경훈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 내리며 바닥으로 밀착시켰다.
스우우웅.
패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푸른색 전자기 구체가 방출되어 두 사람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경훈이 독학으로 설계한 ‘위장 펄스 교란법’이 가동된 것이다.
감시 드론들의 붉은 안구가 두 사람의 위치에서 잠시 멈칫했다. 펄스 장치에서 방출된 반대 위상의 주파수가 시스템의 동맹 감지 신호를 상쇄시켰고, 드론들의 레이더에는 두 사람이 단순한 미로의 폐기물 고철더미로 인식되었다.
이어 패드가 근처 벽면에 가짜 소음 신호 데이터를 무선으로 방출하자, 드론들은 웅웅거리는 날개 소리와 함께 가짜 신호를 쫓아 미로 저편으로 흩어졌다.
“……살았군.”
태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를 내렸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녀의 품 안으로 묵직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야, 데트 플레이어! 정신 차려!”
경훈이 센티넬 패드를 놓치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고, 입술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과도한 오버클럭 뇌파 가동으로 인한 신경계 쇼크였다. 귀에서는 미세한 이명이 들렸고, 그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태희는 쓰러진 경훈을 내려다보았다.
이 지옥 같은 데스게임 ‘아레나 세린’에서 타인은 오직 죽여야 할 적이거나, 밟고 올라서야 할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녀 역시 가문이 파산하고 올림포스 코포레이션의 음모에 의해 강제로 이곳에 끌려온 이후,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믿음의 끝은 항상 잔혹한 배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마르고 나약한 남자는 달랐다. 자신을 죽이고 단 하나의 산소 마스크를 독점할 수 있었음에도, 기계를 해킹해 벽을 허물어 함께 살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의 폐와 뇌를 깎아가며 자신을 구했다.
‘배신하지 않는…… 동맹.’
태희의 얼어붙었던 심장 가장자리에 묘한 균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동료애를 넘어, 이 지략가를 온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지켜내겠다는 기묘한 집착의 싹이었다. 이 남자가 죽는다면, 자신 역시 이 미로를 살아서 나갈 수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의 목숨은 이제 자신에게 빚진 것이었다.
“내 허락 없이는 못 죽는다.”
태희는 낮게 읊조리며 아스칼론을 등에 메고, 경훈의 마른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등 뒤로 들쳐멨다. 동맹 패널티로 인해 신체가 여전히 무거웠지만, 기어코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경훈의 어깨 상처에서 흘러내린 따뜻한 피가 그녀의 은빛 갑옷을 붉게 적셨다.
태희는 패드 화면에 기록된 미로의 외곽 안전 구역 매핑 데이터를 따라 은밀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욱한 붉은 안개와 산성 가스가 흐르는 폐허의 통로를 지나, 시스템의 감시가 닿지 않는 임시 대피소 ‘안전 가옥 A-3’이 위치한 낡은 폐기물 구역으로 깊숙이 진입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거대한 녹슨 톱니바퀴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는 어두운 모퉁이를 돌았을 때, 태희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검자루를 꽉 쥐었다. 전방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스윽.
어둠 속에서 낡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 남자의 형상이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후드 아래로 덥수룩하게 자라난 백발의 수염과,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담은 깊은 주름이 보였다. 그의 전신에서는 마력을 완전히 숨긴 ‘무심결’의 기이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1세대 아레나 생존자이자 미로의 은둔자, 노아(Noah)였다.
노아는 태희의 등에 업힌 채 신음하고 있는 경훈을 슬그머니 바라보더니, 낮고 쉰 목소리로 길목을 막아섰다.
“몰락한 가문의 어린 검사여, 그리고 시스템의 룰을 깨부순 이방인이여.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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