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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를 넘는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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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사도의 산채가 뿜어내는 붉은 화염은 밤하늘의 먹구름마저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뒤로한 채, 육무봉은 묵묵히 바위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우는 어느덧 가늘어져 보슬비로 변해 있었지만, 황무지의 밤바람은 살을 깎아낼 듯이 차가웠다.


바위산 초입의 어두운 동굴 앞에 이르자, 무봉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전신에서는 피비린내와 숯검댕이 냄새, 그리고 적사도의 부방주 독수가 뿌렸던 골식독의 매캐한 유독 가스 잔해가 풍기고 있었다. 이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간 눈이 먼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방울이에게 독기가 미칠 터였다.


무봉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차가운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가죽 앞치마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거친 흙과 물을 움켜쥐고 가죽 표면을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굳은살이 박인 그의 왼손 끝이 마비독의 여파로 가늘게 떨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죽 앞치마에 묻은 독물 잔해를 완전히 씻어냈다. 전신의 살기를 지워내는 백발도인의 명상법 구절을 나직하게 되뇌자, 끓어오르던 도살자의 살성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투박한 대장장이의 온기가 되살아났다.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늙은 당나귀 삼순이가 나직하게 울며 귀를 흔들었다. 삼순이의 목을 안고 웅크려 있던 방울이가 맑은 은방울 소리와 함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저씨...? 아저씨 맞아요?"


무봉은 대답 대신 방울이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빗물에 씻겨 차가워진 손을 자신의 품속 왼쪽 가슴, 아내 설아의 나무 빗과 칠복이의 미완성 편자가 있는 자리에 대어 온기를 만든 후, 방울이의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가자.


무봉의 목소리는 대장간의 묵직한 모루처럼 나직했다. 방울이는 아저씨의 거친 손길을 느끼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저씨의 옷자락에서 희미한 탄내와 함께,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비린내가 풍겼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진안부로 향하는 황무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모래와 바위의 대지였다. 외팔이 대장장이의 몸으로 장님 소녀를 데리고 이 거친 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봉은 황무지 변방의 한 무너진 가마터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거구의 마당쇠 돌쇠를 발견했다.


돌쇠는 바위를 번쩍 들 정도로 괴력을 지녔으나, 가난에 찌들어 굶어 죽기 직전인 사내였다. 무봉이 품속에서 묵직한 은자 몇 푼을 꺼내어 그의 손에 쥐여주자, 돌쇠는 눈을 크게 뜨며 무봉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리! 이 돌쇠, 목숨을 바쳐 아기씨를 모시겠습니다!"


돌쇠는 황무지의 단단한 참대나무를 베어다가 며칠 만에 튼튼하고 안락한 대나무 가마를 벼려냈다. 삼순이의 낡은 안장에는 방울이가 장시간 이동해도 척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설아가 생전에 솜을 채워 꿰매어 준 가죽 안장이 얹혀 있었고, 방울이는 때로는 삼순이의 등에, 때로는 돌쇠가 메는 대나무 가마에 누워 황무지의 거친 길을 나아갔다.


피난길은 고요했다. 돌쇠는 무봉의 위압적인 침묵과 소매 아래 숨겨진 거대한 무쇠망치의 기세에 압도되어 감히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땀을 흘리며 가마를 멜 뿐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황무지의 사흘째 밤, 대지 위로 급격한 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국경 지대의 밤공기는 칼날처럼 차가웠고, 사막의 서리가 대나무 가마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무봉은 밤이 깊어지자 황무지 한가운데의 버려진 토굴 속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불을 피웠다. 품속에서 백영초를 꺼내어 달인 따뜻한 탕약을 방울이에게 먹이려던 참이었다.


"우윽... 쿨럭!"


갑자기 가마 안에서 기괴한 신음과 함께 둔탁한 각혈 소리가 들려왔다.


무봉이 급히 가마의 휘장을 걷어젖혔을 때, 방울이는 이미 전신을 바르르 떨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이의 입술 사이로 한눈에 보아도 탁하고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적사도 부방주 독수가 뿌렸던 변종 골식독의 잔존 독기가 밤공기의 가혹한 한기와 반응하여 방울이의 미약한 심장과 경맥을 타고 폭발적인 발작을 일으킨 것이었다.


"아, 아기씨! 나리, 아기씨가...!"


불을 지피던 돌쇠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방울이의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실명한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향해 뒤집혔고, 가느다란 목줄기에는 검푸른 독선(毒線)이 뱀처럼 솟구쳐 올랐다. 각혈한 검은 피가 방울이의 하얀 저고리와 목에 걸린 은방울을 더럽혔다. 은방울은 아이의 격렬한 경련에 맞춰 미친 듯이 청아하고도 슬픈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독기가 심장으로 향하고 있다.'


무봉의 심장이 철렁 주저앉았다. 과거 천하제일을 다투던 살수 시절에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공포가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혜관 의원이 남겨준 백영초 탕약을 억지로 먹이려 했으나, 방울이의 목구멍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삼키지 못하고 피와 함께 약물을 뱉어냈다. 이대로 몇 분만 지나면 독기가 심장 판막을 녹여 아이는 숨을 거둘 터였다.


무봉은 주저하지 않고 품속에서 낡은 가죽 주머니, 혜관 의원이 유품으로 남겨준 은침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펼치자 푸르스름한 은빛을 뿜어내는 가느다란 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혜관에게서 귀동냥으로 전수받은 인체 365개 경맥의 흐름을 제어하는 비전 침술서, 천맥침경(天脈針經)의 요결을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되뇌었다.


하지만 침을 쥐려던 무봉의 오른손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적사도 전투에서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올린 탓에, 오른팔의 끊어진 경맥이 비틀리며 가혹한 반동 격통을 일으키고 있었다. 손끝이 떨려 가느다란 은침을 정확한 혈도에 꽂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아이의 경맥을 터뜨려 즉사시킬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닥쳐라.'


무봉은 자신의 망가진 육체를 향해 속으로 냉혹하게 포효했다. 그는 은침 주머니에서 가장 길고 두꺼운 은침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오른쪽 목덜미와 어깨가 만나는 비장혈 깊숙이 침을 찔러 넣었다.


자학적인 신체 한계 돌파 기술, 금침제통(禁針制痛)이었다.


"으윽...!"


무봉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뒤틀린 경맥이 강제로 고정되며 뼈가 마디마디 부러지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강타했으나, 찰나의 순간 통증이 마법처럼 사라지고 오른손의 떨림이 완벽하게 멈췄. 향후 며칠간 전신의 감각이 무뎌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지금은 방울이를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감각이 마비된 차가운 손으로, 무봉은 세 자루의 은침을 동시에 쥐었다. 그의 눈빛은 대장간에서 가장 정밀한 흑철 병기를 주조할 때처럼 극도로 가라앉았다.


"돌쇠, 아이의 사지를 잡아라.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


무봉의 지엄한 명령에 돌쇠는 침을 삼키며 방울이의 떨리는 어깨와 다리를 단단히 내리눌렀.


무봉은 첫 번째 은침을 방울이의 목덜미 아래 천돌혈(天突穴)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미세하게 남은 전성기 시절의 정순한 내력을 침 끝으로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쇠망치를 두드릴 때의 미세한 진동 제어력이 침 끝에서 재현되었다. 은침이 미세하게 떨리며, 역류하던 검은 독기가 천돌혈 부근에서 멈칫하며 멈춰 섰다.


이어 두 번째 침이 정수리의 신회혈(囟會穴)에, 세 번째 침이 가슴 중앙의 전중혈(膻中穴)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깊숙이 박혔.


천맥침경의 배독 요결이 무봉의 손끝을 통해 전개되었다. 무봉은 내력을 부드러운 파도처럼 운행하여 방울이의 심장 주변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심장으로 향하던 골식독의 검푸른 독기를 사지 끝으로 강제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우으으윽...!"


방울이의 가슴팍에 고여 있던 검은 독혈이 은침의 유도를 따라 어깨와 팔꿈치를 지나 손가락 끝으로, 허벅지와 무릎을 지나 발가락 끝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독기가 사지로 분산되자, 아이의 손톱과 발톱이 순식간에 칠흑처럼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뼈를 갉아먹는 독기를 생명에 지장이 없는 사지 끝으로 몰아넣어 임시로 봉인하는 처절한 방책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토굴 내부에는 눅눅한 땀 냄새와 매캐한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다.


마침내 방울이의 목줄기에 솟구쳤던 검푸른 독선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뒤집혔던 두 눈이 감기고, 딱딱하게 굳어 가던 전신의 근육이 부드럽게 풀렸다.


스으으읍—


아이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길고 정돈된 숨결이 흘러나왔다. 각혈이 멈추고, 미약하지만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무봉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딸랑.


방울이가 깊은 잠에 빠져들며 가볍게 몸을 뒤척이자, 더러워진 은방울이 청아하고도 쓸쓸한 소리를 내며 마지막 울림을 남겼다.


무봉은 은침을 조심스럽게 회수하여 주머니에 넣은 뒤,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금침제통의 반동으로 전신의 맥박이 급격히 내려앉으며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만신창이가 된 거구의 대장장이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깊이 잠든 방울이의 작은 손을 꼭 쥔 채 어둠 속의 황무지 지평선을 묵묵히 응시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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