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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단죄, 그리고 독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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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구구구구—!


대지를 뒤흔드는 진각의 울림과 함께 육무봉의 무쇠망치가 내리꽂혔다. 폭우가 걷힌 적사도 산채 마당에는 빗물이 고인 진흙과 깨진 목책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산채의 핵심 방어 무사였던 강철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의 거대한 강철방패 정중앙, 청철안(聽鐵眼)으로 간파해 낸 미세한 기의 균열 지점에 정확히 망치의 타격면이 맞닿았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금속 파열음이 밤하늘을 찢었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기스조차 낼 수 없다던 두꺼운 강철방패가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튕겨 나간 쇳조각들이 빗속을 뚫고 적사도 도적들의 뺨과 어깨를 스치며 붉은 선혈을 뿌렸다.


“끄아아아악!”


강철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방패를 뚫고 들어온 천강망치질 기공의 묵직한 충격파가 그의 철갑을 찌그러뜨리고 가슴뼈를 그대로 함몰시켰다. 입과 코로 검붉은 선혈을 쏟아낸 강철의 신형이 마당 진흙바닥에 무겁게 처박혔다. 단 한 합이었다. 적사도 최강의 방패가 무너지자, 마당을 에워싸고 있던 수십 명의 도적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무봉은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찢어지는 듯한 격통에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끊어진 경맥이 욱신거리며 검은 피를 토해내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왼손으로 망치 자루를 나직하게 고쳐 잡으며, 쓰러진 강철을 뒤로하고 산채 내부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그의 가죽앞치마에 묻은 숯검댕이를 씻어내렸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방주님! 독수 형님! 놈이 들어옵니다!”


살아남은 도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산채 본당 안쪽으로 도망쳤다. 무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이 디딜 때마다 칠복이가 아끼던 대장간 집게의 흔적, 설아가 정성스레 짜 두었던 무명천 조각들이 도적들의 발에 밟혀 찢어진 채 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왼쪽 가슴 품속, 칠복이의 미완성 편자와 설아의 나무 빗이 닿아 있는 자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분노는 이미 뜨거운 화염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고요한 살기가 되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쿠웅—!


무봉이 쇠망치 끝으로 본당의 붉은 목조 문을 밀어젖혔다.


본당 내부에는 거대한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적사도의 방주, 적사(赤蛇)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소매가 넓은 음침한 옷을 입고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든 부방주 독수(毒手)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무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외팔이 대장장이 놈이 기어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적사가 허리춤에서 핏빛으로 빛나는 유연한 연검, 적사검(赤蛇劍)을 뽑아 들며 이빨을 드러냈다.


“조열 대감의 은자 몇 푼에 우각촌 놈들을 도살해 주었더니, 사냥개 한 마리가 주인을 물겠다고 날뛰는 격이로다. 독수, 저놈의 사지를 썩혀버려라.”


적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방주 독수가 소매 속에서 기괴한 무늬가 새겨진 도자기 만독 항아리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항아리가 깨짐과 동시에, 사방으로 진득한 녹색의 액체가 튀며 순식간에 기화되어 짙은 녹색의 부식성 독무(毒霧)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닿는 목조 기둥들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검게 녹아내렸다. 스치기만 해도 살을 썩혀 뼈만 남긴다는 마교 계열의 골식독 변종이었다.


“크하하! 이 독무 속에서 네놈의 무쇠망치가 얼마나 버틸지 보자꾸나!”


독수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독무는 빠른 속도로 본당 내부를 메우며 무봉의 코앞까지 밀려들었다.


무봉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는 대장간에서 수없이 불을 다루며 공기의 흐름과 연소의 요결을 터득한 장인이었다. 독무가 전장을 완전히 뒤덮기 전에 화력을 가해 독기를 태워버려야 했다.


무봉은 본당 한구석, 겨울철 난방을 위해 쌓아두었던 고운 석탄 가루 자루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무영보(無影步)의 신묘한 신법이 전개되며 그의 신형이 안개처럼 흔들렸다.


콰앙!


무봉이 쇠망치로 석탄 자루 세 개를 동시에 때려 부수었다. 사방으로 시커먼 숯가루가 폭풍처럼 흩날리며 본당 허공을 가득 메웠다. 숯가루 살포(炭粉撒) 전술이었다.


“무슨 짓을...!”


적사가 당황하여 외치는 찰나, 무봉은 무쇠망치 머리를 바닥의 석조 돌판에 강하게 긁었다. 만년한철과 흑철이 마찰하며 거대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콰아아아앙—!


허공에 가득 차 있던 고운 숯가루가 불꽃과 만나며 강력한 분진 폭발을 일으켰다. 거대한 백색 불꽃과 열기가 본당 내부의 산소를 순식간에 연소시키며 밀려들던 녹색 독무를 폭발적으로 상쇄시켰다. 독기의 근원인 가스가 화염 속에 타들어가며 매캐한 연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커헉! 쿨럭!”


폭발의 충격과 산소 부족으로 독수가 각혈하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자욱한 연기 장막을 뚫고 붉은 빛이 뱀처럼 흔들리며 쇄도했다. 방주 적사였다. 그는 흔들리는 적사검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무봉의 오른팔 뒤편, 끊어진 경맥의 혈도를 정확히 노려 연격을 가해 왔다. 연검 특유의 예측 불가능한 궤적이 사방에서 무봉을 옥죄었다.


키이이잉!


적사검의 핏빛 검날이 무봉의 오른팔 소매를 스치려 했다. 무봉은 억지로 내력을 가동하려 했으나, 오른팔의 격통으로 망치의 속도가 미세하게 늦어졌다. 찰나의 순간, 적사검이 채찍처럼 무쇠망치의 자루를 감아쥐며 무봉의 왼손 가죽 장갑을 찢어발겼다.


찌르르한 마비 독의 기운이 찢어진 가죽 장갑 틈새로 침투하며 그의 왼손가락 마디마디에 격통을 유발했다.


‘조급해하지 마라. 튕겨 나간 힘은 반드시 되돌아오는 법.’


무봉은 이빨을 악물며 왼손의 마비를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망치 머리에 실린 만년한철의 차가운 한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망치 자루를 감싸고 있던 적사검의 날이 한기에 얼어붙으며 유연함을 잃고 뻣뻣해진 순간, 무봉은 망치를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반탄망치질(返彈鍛)의 초식을 전개했다.


깡—!


얼어붙은 연검이 망치의 강력한 회전 반동력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적사검의 회전 궤적이 완전히 무너지며, 적사의 신형 또한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무봉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적사의 몸에 시선이 쏠린 독수가 품속에서 또 다른 독 항아리를 꺼내려 손을 움직이는 것이 살기감응에 포착되었다.


스윽.


무봉의 왼손이 등 뒤로 향했다. 가죽 끈으로 칭칭 감겨 있던 부러진 명검의 잔해, 파쇄도(破碎刀)가 소리 없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탓!


무봉의 신형이 유령처럼 독수의 등 뒤로 스며들었다. 화려한 초식도, 바람 소리도 없었다. 오직 인체의 가장 취약한 급소만을 도려내는 살수 시절의 극의, 무영단정(無影斷喉)이었다.


서걱—!


은빛 단사(斷絲) 같은 파쇄도의 부러진 날이 독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그어 지나갔다. 독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의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검붉은 피가 본당 바닥을 적셨고, 독수의 몸뚱이는 눈을 부릅뜬 채 바닥으로 쓰러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독수가...!”


적사가 경악하며 부러진 적사검을 추스려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무봉의 무쇠망치는 이미 그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무봉은 망치를 비스듬히 뉘어 적사의 오른쪽 무릎관절을 정확히 내리쳤.


우득—!


“아아아악!”


뼈가 완전히 가루가 되는 처참한 소리와 함께 적사가 무릎을 꿇었다. 무봉은 멈추지 않고 망치의 좁은 모서리 면으로 적사의 왼쪽 팔꿈치와 어깨 관절을 차례로 타격했다. 사지절단술(四肢切斷)이었다. 관절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이며 적사는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 그의 핏빛 적사검이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무봉은 피 묻은 파쇄도를 적사의 목덜미에 차갑게 겨누었다.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울이의 눈을 멀게 한 독이 무엇이냐.”


무봉의 목소리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쇳소리처럼 나직하고 무거웠. 적사는 사지의 뼈가 바스러지는 극통 속에서 침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


“사, 살려다오...! 말할 테니 목숨만은...!”


“말해라.”


“그, 그 독은... 마교의 비전 기독인 골식독(骨食毒)의 변종이다...! 독수가 사천당가에서 훔쳐온 독초와 결합해 만든 극독이지...! 일반 의술로는 평생 고칠 수 없다!”


무봉의 심장이 가늘게 떨렸다. 골식독. 뼈와 신경을 녹여 시력과 모든 감각을 영구히 마비시키는 극악무도한 독이었다.


“해독 방법은 무엇이냐.”


“내, 내게는 해독약이 없다...! 하지만 독수의 품속에 골식독의 전이를 일시적으로 막아주는 골식독 해독초(骨食毒 解毒草) 조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해독법은... 우리에게 우각촌 습격을 의뢰한 무영각 철혈지부장 조열(趙烈)의 비밀 금고 속에 숨겨진... 고대 의서 ‘설산빙련(雪山氷蓮)’의 기록에 적혀 있다...! 그 영약만이 아이의 눈을 고칠 수 있다! 진짜다! 믿어다오!”


적사는 살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토해냈다. 진안부 지하에 숨겨진 철혈지부의 위치와 조열의 금고에 대한 단서까지.


무봉은 쓰러진 독수의 시신을 발로 차내어 그의 품속 가죽 주머니를 찢었다. 그 안에서 기괴한 녹색빛을 띠는 마른 약초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 방울이의 생명을 임시로 연장해 줄 유일한 소모품, 골식독 해독초였다. 무봉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수거하여 가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적사는 무봉이 약초를 챙기는 모습을 보며 비굴하게 손을 비벼댔.


“이, 이제 정보를 주었으니 살려... 살려줄 거지? 나는 그저 조열의 명령을 따랐을 뿐...”


무봉은 적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쪽 가슴 품속에서 칠복이의 미완성 편자가 무겁게 가슴을 찔렀다. 이 자들이 우각촌의 순박한 이웃들을 학살할 때, 그들에게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살의 약조는 이미 잿더미가 되었다.


서걱—!


무봉의 파쇄도가 적사의 목덜미를 가차 없이 그었다. 적사의 비굴한 눈동자가 빛을 잃으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적사도의 수뇌부가 완벽하게 단죄되는 순간이었다.


무봉은 본당 벽면에 걸려 있던 횃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도적들이 우각촌에서 약탈해 온 물건들과 도적들의 시신 위로 횃불을 던졌다. 불길이 순식간에 마른 나무와 호랑이 가죽에 옮겨붙으며 거대한 화마로 피어올랐.


산채 내부를 가득 메우던 피비린내와 추악한 탐욕의 흔적들이 붉은 화염 속으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무봉은 불타오르는 적사도 산채를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열기와 붉은 불꽃이 황무지의 어두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품속에서 방금 획득한 골식독 해독초 조각을 꺼내 거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빗물에 젖은 약초 조각이 희미한 녹색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비록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이 약초가 있다면 방울이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완전한 해독을 위해서는 진안부로 가야 했다. 철혈지부장 조열의 목을 베고, 그의 철갑 금고 속에 숨겨진 설산빙련의 단서를 기어이 확보해야만 했다.


무봉은 약초 조각을 품속 깊은 곳, 아내의 피 묻은 나무 빗 바로 옆에 소중히 밀어 넣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던 적사의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지만, 가슴속에 새겨진 핏빛 살로는 이제 겨우 시작이었.


불타오르는 산채를 뒤로하고, 품속에서 꺼낸 골식독 해독초 조각을 바라보며 방울이의 실명을 치료하기 위해 반드시 조열을 죽이겠다고 다짐하는 무봉.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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