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망치에 깃든 살기
어두운 폐광 동굴 바닥에서 녹슨 철상자를 박차고 뿜어져 나오는, 과거 '도살자'가 사용하던 파쇄도의 핏빛 예기.
그 서늘한 붉은빛이 갱도의 가파른 암벽을 날카롭게 그어내릴 때, 육무봉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파쇄도의 진동은 5년 동안 억눌러왔던 그의 살성을 사정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봉은 붉게 끓어오르는 살기를 단전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내 설아가 남긴 마지막 유언, ‘방울이만은 어둠에 물들지 않게 지켜달라’던 그 피 맺힌 목소리가 품속 대추나무 빗의 묵직한 감각을 통해 가슴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무봉은 왼손으로 파쇄도를 가죽 천에 다시 단단히 감아 등에 매고, 상자 안에 남아 있던 흑철광 원석들과 차가운 만년한철 조각을 가죽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오른팔 경맥은 여전히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으로 마비되어 매달려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갱도 밖으로 나오자, 밤새 우각촌을 짓밟던 폭우는 어느새 가늘어진 보슬비로 변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폐광 입구에는 늙은 당나귀 삼순이가 한쪽 귀를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삼순이의 낡은 안장 위에는 실명한 방울이가 전신을 가늘게 떨며 엎드려 있었다.
목에 걸린 작은 은방울이 비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청아하고 쓸쓸한 소리를 냈다. 무봉이 다가가 삼순이의 고삐를 쥐자, 방울이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했다.
“아저씨... 아저씨예요? 매운 연기 냄새는 사라졌는데... 아저씨 손이 너무 차가워요.”
무봉은 아무 말 없이 왼손으로 방울이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의 입은 열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벙어리 행세를 집어던지겠다고 무덤 앞에서 다짐했건만, 겁에 질린 아이 앞에서는 차마 핏빛 복수를 읊조릴 수 없었다. 무봉은 묵묵히 삼순이의 고삐를 끌고 산길을 내려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불타버린 우각촌의 잔해, 그리고 반쯤 무너진 대장간이었다.
마을은 참혹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풍기던 초가집들은 잿더미가 되어 주저앉았고, 이웃들의 온기는 검은 그을음과 피비린내로 변해 있었다. 대장간 역시 지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채, 앙상한 뼈대만 남기고 서 있었다. 화덕 주변의 진흙바닥에는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못한 붉은 핏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무봉은 방울이를 대장간 뒤편,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무너진 돌담 구석에 삼순이와 함께 머물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홀로 재와 숯검댕이로 가득 찬 대장간 내부로 들어섰다.
모루 옆을 지나던 무봉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흙먼지와 그을음 속에 반쯤 묻혀 있던 둥근 쇳조각이었다. 무봉이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올렸다. 아직 불순물도 제대로 빠지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당나귀 편자였다.
숨이 턱 막혔다. 그것은 대장간 조수였던 칠복이가 죽기 직전까지 삼순이에게 맞춰주겠다며 두드리고 있던 미완성 편자였다. 편자의 표면에는 칠복이의 손때와 함께 검게 눌어붙은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무봉의 거친 손가락이 쇳조각을 움켜쥐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지독한 죄책감과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나 때문이다. 내가 이 마을에 어둠을 끌고 들어왔다.’
무봉은 칠복이의 미완성 편자를 품속 왼쪽 가슴, 설아의 나무 빗 바로 옆에 밀어 넣었다. 아내의 유품과 조수의 유작이 가슴을 무겁게 누르자, 그의 눈빛은 비장함을 넘어 서늘한 살기로 가득 찼다. 이제 슬퍼할 시간은 끝났다. 적들을 도살할 무기를 벼려야 했다.
무봉은 반쯤 무너진 돌 화덕 앞으로 걸어갔다. 화덕 내부의 진흙 벽은 깨져 있었지만, 열기를 가두는 핵심 석조 구조는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철기방을 통해 은밀히 비축해 두었던 최고급 화덕용 무연탄을 화덕 깊숙한 곳에 채워 넣었다. 서역에서 들여온 이 무연탄은 순간 온도를 섭씨 천 오백 도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극고열의 연료였다.
부싯돌을 튕겨 불씨를 당기자, 무연탄이 푸른빛을 띠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봉은 왼손으로 낡은 풀무의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밀고 당겼다. 슈우욱, 슈우욱! 풀무질이 거듭될수록 화덕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대장간 잔해 속으로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가죽 주머니에서 흑철광 원석들과 만년한철 조각을 꺼내 도가니에 담았다. 그리고 고열의 화덕 한가운데에 밀어 넣었다. 푸른 불꽃이 흑철을 감싸 안으며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제 망치를 잡아야 했다. 무봉은 평소 농기구를 고칠 때 쓰던 투박한 무쇠망치를 집어 들었다. 오랜 메질로 인해 망치 머리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자루의 가죽 끈은 해져 있었다. 이대로는 절정 고수들의 도검을 상대할 수 없었다. 적의 무기와 뼈를 일격에 분쇄할 신병기가 필요했다.
무봉은 도가니 속에서 붉게 녹아내린 흑철 액체를 집게로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무쇠망치 머리 부분에 흑철을 덧씌우기 시작했다.
깡! 깡! 깡!
오른손에 망치를 쥐고 메질을 시작하는 순간, 가혹한 제약이 그의 육체를 덮쳤다. 경맥 파손도(3단계 중 1단계)의 격통이었다. 단전에서 뿜어 올린 내력이 끊어진 오른팔 경맥에 닿을 때마다, 뼛속에 송곳을 박아 넣고 비트는 듯한 치명적인 고통이 일었다. 오른손의 악력이 순간적으로 풀리며 망치가 모루 바닥으로 떨어지려 했다.
“으음...!”
무봉은 이빨을 악물며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면서도 메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백발도인의 명상법 요결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폭주하려는 기혈을 강제로 억눌렀다. 전신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떨렸고, 목구멍으로 검은 핏방울이 울컥 솟구쳤으나 그는 피를 바닥에 뱉어내며 메질의 리듬을 유지했다.
천강망치질(天剛鍛鐵功)의 구결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쇠를 때릴 때의 일정한 리듬과 내력의 반탄력을 조율하는 기공법이었다. 무봉은 오른팔의 고통을 왼손의 풀무질 리듬과 일치시켰다. 타격의 순간마다 내력을 망치 머리에 주입하여 불순물을 정교하게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망치 머리에 흑철이 완벽하게 접합되자, 무봉은 마지막으로 차가운 만년한철 조각을 망치의 타격면 중심에 심어 넣었다. 극고열의 흑철과 극음의 만년한철이 만나자, 치이익 하는 날카로운 수증기 소리와 함께 대장간 내부에 푸른빛과 검은빛이 교차하는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망치를 찬물에 담그자, 콰아아 하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백색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수증기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전의 투박함을 벗어던진 묵직하고 거대한 ‘특수 무쇠망치’였다. 자루는 질긴 참나무에 가죽을 칭칭 감아 고정했고, 검게 그을린 망치 머리의 타격면에는 만년한철의 푸른 한기가 서려 있었다. 웬만한 명검조차 일격에 부러뜨릴 수 있는 무식한 파괴력을 지닌 병기였다.
무봉이 새로 벼린 망치를 쥐고 가볍게 무게를 가늠하는 순간, 대장간 마당 너머 거친 빗물 소리를 뚫고 말발굽 소리와 거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 이 깡촌 구석에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멍이 있었군!”
대장간 마당으로 십여 명의 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어깨에는 호랑이 가죽이 걸려 있었고, 손에는 이가 빠진 거대한 대도와 철퇴가 들려 있었다. 우각촌 인근 황무지를 지배하며 무영각 철혈지부의 하청을 받아 보급로를 차단하고 약탈을 일삼던 삼류 산적 집단, 적사도의 무리였다.
그들의 선두에는 얼굴에 거대한 검은 흉터가 있는 거한이 서 있었다. 적사도의 두목, 흑호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한쪽 눈에 가죽 안대를 한 채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두목 독눈이가 서 있었다.
“두목! 저기 대장간 구석에 늙은 당나귀랑 장님 가시나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요!”
독눈이가 무너진 돌담 뒤편에 숨어 있던 방울이와 삼순이를 발견하고는 침을 흘리며 외쳤다. 방울이는 갑작스러운 거친 목소리에 놀라 삼순이의 목을 꼭 안은 채 은방울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흑호가 대도를 어깨에 걸친 채 대장간 안쪽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화덕 앞에 묵묵히 서 있는 무봉의 거구와 그가 들고 있는 거대한 무쇠망치에 머물렀다.
“허, 외팔이 벙어리 대장장이라더니 용케 살아남았군. 조열 지부장님이 마을을 쓸어버릴 때 구석에 처박혀 숨어 있었나 보지? 손에 들고 있는 그 망치 꼬락서니를 보니 제법 좋은 철을 쓴 모양인데, 순순히 넘기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무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이미 인간의 감정을 비워낸 듯 고요하고 차가웠다. 그는 묵묵히 걸어 나와 방울이가 숨어 있는 돌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넓은 등판이 방울이의 시야(비록 보이지 않지만)와 적들의 살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 새끼가 귀까지 처먹었나? 두목이 말하는데 대가리만 뻣뻣이 들고 있네!”
독눈이가 단도를 만지작거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흑호는 무봉의 침묵을 나약함으로 오해하고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철두도를 가볍게 휘두르며 한 걸음 다가섰.
“팔 하나 없는 병신 새끼가 장님 가시나 지키겠다고 똥폼 잡는 꼴이라니. 좋다, 그 망치로 네놈의 대가리를 깨부수고 직접 빼앗아 주마!”
흑호가 거대한 철두도를 허공에서 크게 회전시켰다. 이류 경지의 내력이 실린 대도의 날끝에서 웅장한 바람 소리가 일었다. 흑호는 그대로 신형을 날려 무봉의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대도를 내리찍었다. 대도가 가르는 빗줄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무봉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발가락이 대장간 마당의 젖은 흙바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의 전신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고, 단전 깊은 곳에서 정순한 내력이 뿜어져 나와 새로 벼린 특수 무쇠망치의 머리로 흘러들었다. 오른팔 경맥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일었으나, 무봉은 그 고통을 고스란히 살기로 승화시켰다.
그는 오른손에 쥔 특수 무쇠망치를 비스듬히 치켜들며, 흑호의 철두도를 정면으로 맞받아치기 위해 힘차게 메질을 가했다.
무봉이 대지를 강하게 내딛는 벽력진각의 기세에 대장간 마당의 흙바닥이 쩍 갈라지며 흑호의 대도가 허무하게 부러져 나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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