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은(歸隱)을 묻고 도살(屠殺)을 꺼내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차가운 빗줄기는 우각촌을 집어삼켰던 참혹한 화염의 잔해를 식혀갔지만, 대지에 눌어붙은 피비린내만큼은 끝내 씻어내지 못했다. 사방은 검게 그을린 잿더미와 무너진 들보들뿐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한 거인이 서 있었다.
육무봉. 과거 천하를 벌벌 떨게 했던 살수 ‘도살자’였던 사내.
그는 오른팔의 잘려 나간 소매를 비장하게 묶은 채, 아내 설아의 차갑게 식어버린 육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대장간 일을 도우며 그를 친형처럼 따랐던 순박한 청년 칠복이와, 마지막 순간까지 방울이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던 늙은 의원 혜관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비바람에 씻겨 내리는 무봉의 얼굴 위로 피눈물이 섞인 빗물이 흘러내렸다.
무봉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5년 동안 평범한 대장장이로 살아가기 위해,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함구해 왔던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쇠가 긁히는 듯 둔탁하고 거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설아... 칠복아... 혜관 아재...”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것은 뜨거운 피와 가슴을 찢는 듯한 참회였다. 무봉은 부러진 경맥의 통증을 무시한 채, 왼팔의 괴력만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우각촌 뒷산 공동묘지, 억척스럽게 흙바닥을 일구며 살아가던 순박한 이웃들이 묻히던 쓸쓸한 언덕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세 개의 깊은 구덩이를 팠다.
손끝이 깨지고 손톱 밑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진흙과 섞였다. 하지만 무봉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묵묵히 삽질을 하고 흙을 다졌다. 그는 설아의 시신을 가장 먼저 구덩이에 눕혔다. 차갑게 굳어버린 아내의 뺨을 거친 손으로 쓸어내린 무봉은, 그녀가 숨을 거두기 전 쥐여주었던 피 묻은 대추나무 빗을 꺼내 자신의 왼쪽 가슴 품속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 아내의 온기가 머물던 자리에 빗이 닿자 가슴이 저려왔다.
“내 다시는... 침묵하지 않으마. 내 다시는 칼을 피하지 않겠다.”
칠복이와 혜관의 시신까지 차례로 묻고 흙을 덮은 무봉은 무덤 앞에 서서 핏빛 맹세를 다짐했다. 5년 전 백발도인을 만나 내면의 살성을 누르고 귀은(歸隱)을 택했을 때, 그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으로 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강호의 업보는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살(不殺)의 약조는 결국 가장 소중한 이들을 잔혹하게 도살당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었을 뿐이었다. 무봉은 무덤가에 꽂아둔 투박한 대나무 표식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도살자의 봉인을 제 손으로 완전히 찢어발겼다.
빗속에서 무덤을 내려온 무봉은 대장간 뒷터의 작은 바위 틈새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늙은 당나귀 삼순이가 한쪽 귀를 늘어뜨린 채, 겁에 질려 흐느끼는 방울이를 등 뒤에 태우고 묵묵히 서 있었다.
방울이는 골식독 가스에 노출되어 눈이 멀어버린 상태였다. 초점을 잃은 가녀린 눈동자에서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녀의 목에 걸린 작은 은방울만이 비바람에 흔들리며 청아하고 쓸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봉은 다가가 방울이의 작고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방울이가 아저씨의 손길을 알아채고는 울먹이며 그의 품으로 쓰러지듯 기댔다.
“아저씨... 아저씨 맞아요? 세상이 너무 캄캄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리고... 아저씨 손에서... 너무 차가운 냄새가 나요.”
차가운 냄새. 그것은 5년 동안 대장간의 화덕 열기 속에 숨겨두었던, 한 번 피로 물들었던 살수의 살기(殺氣)였다. 아이는 눈이 멀었음에도 영민한 감각으로 무봉의 내면에서 깨어난 거대한 어둠을 느끼고 있었다. 무봉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굳은살 가득한 왼손으로 아이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줄 뿐이었다. 아내 설아는 죽어가며 방울이만은 어둠에 물들지 않게 지켜달라 유언했다. 복수를 시작하는 순간 자신은 다시 괴물이 되겠지만, 이 아이만은 반드시 햇살 아래 머물게 하리라.
무봉은 방울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삼순이의 가죽 고삐를 든든히 쥐여주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거라. 아저씨가 두고 온 물건이 있다.”
무봉이 향한 곳은 우각촌 뒷산의 버려진 철광 폐광이었다. 수십 년 전 철광석이 고갈되어 버려진 갱도로, 흙더미와 낙석이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어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꺼리는 금지의 구역이었다. 하지만 무봉에게는 5년 전 도살자 시절의 흔적을 영원히 묻어두었던 은밀한 무기 수납처였다.
폐광 입구에 도달한 무봉은 거구의 완력을 가동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흙더미와 거대한 바위들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는 왼팔의 근육을 터질 듯이 부풀리며 바위들을 하나씩 들어 던졌다. 쿵! 쿵! 흙더미가 치워질 때마다 갱도 내부에서 고여 있던 썩은 가스와 가혹한 지열이 뿜어져 나왔다. 대장간 가죽앞치마를 두른 무봉은 개의치 않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갱도 내부로 들어설수록 공기는 희박해졌고 온도는 비정상적으로 상승했다. 흑철 광산 최하층은 지열이 분출되는 고열 지대이자 맹독성 유황 가스가 차오르는 사지(死地)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봉은 전신의 기혈을 닫고 호흡을 가늘게 유지하는 귀은식(歸隱息)을 전개했다. 공기가 부족한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살수 시절의 생존술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부의 열기만이 아니었다. 어두운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중, 무봉의 오른쪽 가슴과 오른팔에 가혹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경맥 파손도(3단계 중 1단계)의 패널티였다. 과거 무영각을 탈출할 때 끊어졌던 오른팔의 경맥이, 무영심법의 강제 운행으로 인해 붉게 부풀어 오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윽...!”
찰나의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격통에 오른팔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마비되었다. 발끝의 감각마저 흐려지며 가파른 암벽 아래로 미끄러질 뻔한 위기가 찾아왔다. 무봉은 왼손으로 암벽의 튀어나온 바위를 강하게 움켜쥐어 신형을 고정했다. 손가락 끝이 바위에 박히며 돌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았다. 이대로 내공이 폭주하면 폐광 깊은 곳에서 각혈하며 쓰러질 터였다. 무봉은 백발도인에게 배웠던 명상법을 강제로 뒤집어 운행하기 시작했다. 본래 살기를 가라앉히고 맥박을 고르게 하던 도가의 정심법이었으나, 지금은 끊어진 경맥을 내력의 억압으로 강제로 묶어 고통을 차단하는 자학적인 운행법이었다.
“후우... 흡...”
단전에서 뿜어진 차가운 기운이 뒤틀린 오른팔의 기혈을 강제로 짓누르자,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통증과 함께 일시적으로 팔의 제어력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 공력을 쓸 때마다 경맥의 파손은 더욱 깊어질 터였다. 무봉은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갱도의 가장 깊은 곳, 흑철 광산 최하층의 용암 공동 앞으로 걸어갔다.
붉게 끓어오르는 지열의 미세한 빛이 어두운 공동을 밝히고 있었다. 그곳의 단단한 암반 깊숙한 틈새에, 먼지와 그을음으로 덮인 거대한 흑철 상자가 박혀 있었다. 무봉이 5년 전 자신의 과거와 영혼을 함께 묻어두었던 궤였다.
무봉은 오른손을 뻗어 상자의 쇠사슬을 쥐었다. 그러나 잡아당기려는 순간, 오른팔 경맥에 다시 한번 찌르는 듯한 격통이 일며 악력이 풀려버렸다. 철상자가 단단한 암벽 사이로 미끄러지며 어둠 속으로 추락하려 했다.
찰나의 순간, 무봉은 왼손을 뻗어 사슬의 끝을 낚아챘다. 콰앙! 육중한 흑철 상자가 암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무봉은 왼팔의 근육을 터질 듯이 인장하며 상자를 갱도 바닥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의 폐부에서 고열의 유독가스가 침투해 목구멍으로 검은 핏방울이 울컥 솟구쳤으나, 그는 피를 바닥에 뱉어내며 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자의 자물쇠는 오랜 세월과 열기 속에서 녹슬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무봉은 옆에 놓여 있던 거대한 광산용 무쇠 정을 쥐고, 왼손의 완력만으로 자물쇠를 내리쳤다.
콰아앙!
녹슨 쇠 자물쇠가 형체도 없이 부서져 나가며 흑철 상자의 뚜껑이 거칠게 열렸다. 상자 안에는 먼지에 쌓여 있던 도살자 시절의 유산들이 잠들어 있었다. 정련된 우각촌 흑철광 원석들과, 타격 시 적의 기혈을 얼려버리는 신비로운 만년한철 조각이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석들 가장 아래쪽, 가죽 천에 겹겹이 싸여 있는 긴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봉은 떨리는 왼손으로 가죽 천을 천천히 벗겨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과거 천하제일 살수 시절 그가 사용하던 전설적인 명검 ‘도살검’의 잔해였다. 탈출 과정에서 검날의 절반이 무참하게 부러져 나간 상태였지만, 부러진 단면의 불규칙한 날끝은 여전히 소름 끼치는 절삭력을 품고 있었다.
무봉이 부러진 검의 손잡이를 쥐고 들어 올리는 순간, 오랜 침묵을 깨뜨리듯 갱도 내부에 웅장한 진동이 일었다.
스으으으—!
어두운 폐광 동굴 바닥에서 녹슨 철상자를 박차고 뿜어져 나오는, 과거 '도살자'가 사용하던 파쇄도의 핏빛 예기가 붉은 지열의 불꽃을 집어삼키며 사방의 암벽을 날카롭게 그어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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