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진 평화, 피어오르는 연기
매캐한 탄내가 밤바람을 타고 대장간 마당으로 들이쳤다. 북서쪽 국경 지대의 황량한 어둠을 가르고 붉은 불길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우각촌 외곽 밀밭이었다. 주민들이 평생을 바쳐 억척스럽게 일구어낸 누런 밀밭이, 지금은 약탈자들의 횃불 아래에서 무자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두두두두—!
지면을 울리는 둔탁한 말발굽 소리가 사방에서 좁혀왔다. 단순한 산적의 침입이 아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 기세는, 뼈 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익숙하고 잔혹한 살기(殺氣)를 품고 있었다. 무영각 철혈지부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이 마침내 이곳 우각촌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육무봉은 대장간 마당 한가운데에 우뚝 선 채, 잘려 나간 오른팔 소매를 가죽끈으로 더 세게 묶었다. 덥수룩한 수염 아래로 침묵을 삼킨 그의 안광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일어섰다.
“무... 무봉이 형씨!”
대장간 문이 벌컥 열리며 아내 설아가 열두 살 난 딸 방울이를 품에 안은 채 뛰쳐나왔다. 아이는 갑작스러운 불길과 소음의 공포에 질려 설아의 품에 얼굴을 묻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봉은 묵묵히 설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의 거구에서 뿜어지는 비장한 기운이 설아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봉은 왼손을 뻗어 설아의 어깨를 가볍게 짚은 뒤, 대장간 안쪽 화덕 바닥을 가리켰다.
화덕 아래에는 과거 무봉이 은거를 결심했을 때 설아가 손톱이 깨지도록 흙을 파서 만들어 주었던 비밀 대피소, ‘귀은실’이 존재했다.
무봉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직하게 신음했다.
“어, 어.”
어서 들어가 숨으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설아는 남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편이 과거에 어떤 어둠을 품고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이 재앙이 남편의 과거와 닿아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설아의 맑은 눈망울에 지울 수 없는 이별의 예감과 슬픔이 붉은 불빛을 받아 일렁였다.
“조심하셔야 해요... 반드시,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해요.”
설아는 피맺힌 목소리로 속삭인 뒤, 방울이를 품에 안고 화덕 아래의 비밀 통로로 몸을 던졌다. 둔탁한 돌판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무봉의 유일한 안식처가 어둠 속으로 숨겨졌다.
“형님! 저놈들이 마을 입구부터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요!”
대장간 조수 칠복이가 풀무질용 거대한 나무 자루를 무기 삼아 움켜쥔 채 마당으로 뛰어왔다. 평소의 호쾌한 웃음기는 사라지고, 청년의 얼굴은 극도의 공포와 긴장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봉은 칠복이의 어깨를 밀쳐 대장간 벽면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 또한 전투를 준비했다.
쉬이이익—!
어둠을 뚫고 수십 발의 불화살이 대장간 지붕으로 날아와 꽂혔다. 마른 짚으로 얹은 지붕에 불길이 순식간에 옮겨붙으며 시커먼 연기가 대장간 내부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는 연기 속에서, 사방의 담벼락 너머로 검은 야행의를 입은 살수들의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타각!
무봉은 화덕 옆에 세워두었던 거대한 무쇠판을 왼팔에 고정했다. 평소에는 화덕의 고열을 막는 가림막으로 쓰이던 투박한 무쇠방패였다. 손잡이를 가죽끈으로 단단히 조여 쥔 무봉의 눈앞으로,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은빛 비수들이 난사되었다.
깡! 까강!
무봉은 무쇠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날아오는 비도와 암기들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둔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왼팔의 뼈마디를 타고 강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른팔의 부러진 경맥에서 뒤틀리는 격통이 일었으나, 무봉은 백발도인의 명상법 요결을 떠올리며 나직하게 호흡을 고르고 통증을 억눌렀다.
쿠웅—!
그때, 대장간의 낡은 나무 대문이 형체도 없이 박살 나며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난입했다. 철혈지부의 삼류 살수, 쇠돌이었다. 멧돼지 같은 덩치에 거대한 전도끼를 어깨에 멘 쇠돌이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무봉을 노려보았다.
“여기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외팔이가 있었군!”
쇠돌이가 거대한 도끼를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도끼날이 대장간을 지탱하던 굵은 목조 기둥 하나를 완전히 찍어 갈겼다.
쩌적! 콰과광!
기둥이 부러지며 대장간 천장의 들보가 기울었고, 불타는 짚과 흙먼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장간 내부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열기와 연기가 숨통을 조여왔다.
무봉은 불살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쇠돌이의 목을 베는 대신, 무쇠방패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그의 무릎 관절을 가격해 무력화하려 했다. 하지만 쇠돌이는 가혹한 외공인 철포삼을 익힌 자였다. 둔탁한 타격음만 날 뿐, 쇠돌이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다시 도끼를 치켜들었다. 수적 우세와 기습의 선점 효과를 지닌 철혈지부의 살수들이 무너진 틈새를 타 대장간 내부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이대로는 불살을 지키며 대장간을 사수할 수 없었다.
무봉은 왼손을 뻗어 화덕 옆에 걸려 있던 고운 석탄 가루 자루를 낚아챘다. 그리고 기공을 실어 자루를 찢으며 쇠돌이의 안면을 향해 강하게 뿌렸다.
화아악—!
공중에 비산한 검은 숯가루가 쇠돌이의 시야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숯가루 살포 전술이었다. 눈과 목구멍으로 파고든 매운 먼지에 쇠돌이가 비명을 지르며 헛손질을 하는 사이, 무봉은 방패로 그의 가슴을 강하게 밀쳐 뒤로 물리쳤다.
하지만 위기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형님! 끄아악!”
뒤편에서 대장간 나무 자루를 들고 무봉의 뒤를 받치려던 조수 칠복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뱀처럼 유연하고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얼굴에 핏빛 문신을 새긴 사내, 철혈지부의 부지부장 혈무였다.
혈무의 손에 쥔 적혈쌍단도가 붉은 화염을 반사하며 칠복이의 무방비한 목덜미를 향해 은밀하게 쇄도하고 있었다.
무봉은 구사일생으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신형을 움직이려 했으나, 사방에서 흘러든 다른 살수들의 검날이 그의 무쇠방패를 옥죄며 발을 묶었다. 대장간의 단단한 방어벽이 완전히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부지부장 혈무의 잔혹한 칼날이 칠복이의 숨통을 끊기 직전의 찰나, 대장간 내부 깊숙한 곳까지 피비린내 나는 살기가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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