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대도시, 진안부
서리가 내린 황무지의 새벽빛은 푸르스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토굴 내부의 매캐한 땀 냄새와 피비린내를 뒤로한 채, 육무봉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가마를 멘 돌쇠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늙은 당나귀 삼순이의 발굽 소리만이 황량한 대지 위로 흩어졌다. 가마 안에서는 간밤의 혹독한 독기 발작을 넘긴 방울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팍에 걸린 작은 은방울이 딸랑, 딸랑하며 미세한 울림을 남겼다. 그 청아한 소리만이 이 핏빛 살로(殺路)에서 무봉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끈이었다.
무봉은 삼순이의 고삐를 쥔 채 묵묵히 걸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미세하게 무거웠다. 간밤에 방울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덜미 비장혈에 은침을 깊숙이 찔러 넣었던 금침제통(禁針制痛)의 반동 때문이었다. 전신의 고통을 강제로 마비시킨 대가는 가혹했다. 오른팔의 끊어진 경맥은 타들어 가듯 욱신거렸고, 손끝을 비롯한 전신의 감각이 마치 두꺼운 가죽을 덧댄 것처럼 둔하고 무뎌져 있었다. 십 보 밖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까지 잡아내던 그의 초감각적 청각과 살기감응 역시 희미한 안개 속에 가친 듯 불투명했다.
무봉은 왼손으로 품속을 더듬었다. 가죽 저고리 안쪽,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아내 설아가 남긴 피 묻은 대추나무 빗과 조수 칠복이의 미완성 당나귀 편자가 단단히 맞닿아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쇠붙이와 나무의 촉감이 무뎌진 그의 손끝을 통해 뇌리로 스며들었다. 그 차가움이 폭주하려는 그의 살성을 억누르고, 방울이 앞에서의 이성을 강제로 붙잡아주고 있었다.
"나리, 저기 보입니다요."
앞에서 가마를 메고 묵묵히 땀을 흘리던 돌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경외심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간밤에 무봉이 보여준 기괴하고 정밀한 침술과, 전신에서 뿜어내던 그 서늘한 기세를 목격한 이후로 돌쇠는 무봉을 단순한 외팔이 대장장이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무봉은 정체를 숨긴 강호의 무서운 거인이었다.
무봉이 고개를 들었다. 자욱한 황무지의 흙먼지 너머로 거대한 장벽처럼 솟아오른 대도시, 진안부(振安府)의 웅장한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원 북서부의 모든 물류와 인파가 모여드는 상업의 중심지. 수십 장 높이의 거대한 성벽은 붉은 벽돌과 단단한 화강암으로 축조되어 있었고, 성문 앞에는 이미 수백 명의 상인과 피난민, 우마차가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활기차야 할 성문 주변의 분위기는 극도로 무겁고 음산했다.
성문 좌우로 철갑을 두른 관군들이 장창을 쥔 채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고, 성문 중앙에는 가죽 갑옷을 대충 걸친 사내가 오만한 자세로 서서 입성하는 이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진안부 관아의 포교, 배태랑(裵泰郞)이었다.
그는 철혈지부장 조열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고 우각촌의 참변을 단순한 '산적의 습격'으로 위장해 은폐해 준 부패한 공권력의 하수인이었다. 배태랑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상인들의 보따리를 뒤지며 엽전을 갈취하고 있었다. 사공의 밀고를 받았는지, 그의 손에는 우각촌 생존자들의 인상착의가 적힌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멈춰라!"
무봉 일행이 성문 초입에 다다르자, 장창을 든 군졸 두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가마 뒤에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무봉의 거대한 체구와, 오른팔의 잘려 나간 소매가 군졸들의 시선을 끌었다.
배태랑이 이빨 사이에 낀 고기 찌꺼기를 뱉어내며 느릿하게 걸어왔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돌쇠가 메고 있는 대나무 가마와 삼순이의 등 뒤에 실린 커다란 가죽 자루를 집요하게 훑었다. 그 자루 안에는 무봉이 흑철과 만년한철을 녹여 단조한 거대하고 투박한 특수 무쇠망치와 부러진 파쇄도가 천에 감긴 채 숨겨져 있었다.
"가마 안에 탄 자는 누구냐? 그리고 뒤에 실린 그 무거운 가방은 뭐지?"
배태랑이 칼자루를 툭툭 치며 위압적으로 물었다.
돌쇠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탓에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고,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저, 저기... 국경 수비대의 허가를 받은 대장장이 나리와 그의 눈먼 수양딸입니다요. 황무지에서 열병을 앓아 진안부의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러 가던 길입니다."
"대장장이?"
배태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삼순이의 등 뒤로 다가가 가죽 자루를 손으로 거칠게 움켜쥐었다. 자루 내부에서 묵직하고 단단한 무쇠의 질감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농기구라 하기에는 그 무게와 부피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했다. 배태랑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무게가 상당하군. 대장간 연장치고는 너무 묵직해. 자루를 열어봐라."
긴장이 극에 달했다. 돌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돌쇠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으려 하자, 배태랑의 눈빛에 서늘한 의심의 빛이 서렸다. 그의 오른손이 허리춤의 도검 자루로 향했다.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무봉이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왔. 그는 자신의 덥수룩한 수염과 얼굴의 깊은 칼흉터를 완전히 드러낸 채,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비굴할 정도로 벙어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아, 아우... 어우..."
무봉은 오른팔의 잘린 소매를 흔들며, 왼손으로 자신의 목구멍을 가리키고는 불쌍한 표정으로 배태랑에게 애걸하는 몸짓을 취했다. 전신 감각이 무뎌진 상태였기에 그의 행동은 미세하게 느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오랫동안 학대받고 가난에 찌든 불구자의 둔한 모습처럼 보여 배태랑의 경계심을 흐트러뜨렸다.
동시에 무봉은 왼손을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철기방 방주 철무진이 과거의 목숨 빚을 갚기 위해 은밀히 마련해 준 위조 신분증, '진안부 관부 통행증'을 꺼내어 배태랑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정교하게 위조된 통행증에는 관아의 공식 붉은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배태랑이 찌푸린 얼굴로 통행증을 낚아채 살폈다. 직인의 문양과 종이의 재질은 의심할 여지 없는 관부의 진품이었다.
"통행증은 확실하군. 하지만..."
배태랑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무봉의 거구와 삼순이의 가죽 자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탐욕스러운 눈빛은 더 많은 대가를 원하고 있었다.
무봉은 살수 시절의 냉철한 분석력으로 배태랑의 내면을 꿰뚫어 보았다. 이 부패한 포교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이나 명분이 아니었다. 오직 손바닥을 채워줄 묵직한 재화뿐이었다.
무봉은 왼손 가죽 주머니에서 미리 떼어둔 엽전과 은자 몇 푼이 담긴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배태랑이 통행증을 돌려주는 찰나, 그의 넓은 소매 안쪽으로 주머니를 은밀하고 신속하게 찔러 넣었다.
스슥.
배태랑의 소매 속으로 묵직한 주머니가 흘러 들어갔다. 은자들이 부딪히며 내는 둔탁하고 짤랑이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배태랑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소매 안에서 주머니의 무게를 슬쩍 가늠해 보고는, 입꼬리를 비열하게 올렸다.
"음, 그래. 열병을 앓는 아이를 데리고 멀리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대장장이 놈이 벙어리에 외팔이라니, 참으로 가련하도다."
배태랑은 통행증을 무봉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돌려주며, 부하 군졸들에게 손짓했다.
"통과시켜라! 별것 없는 가난한 불구자 놈들이다."
"예! 성문을 열어라!"
군졸들이 장창을 거두고 길을 열었다. 돌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가마 고삐를 쥐고 성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봉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
하지만 수문을 통과하는 무봉의 등 뒤로, 배태랑의 차가운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배태랑은 무봉의 넓은 어깨와, 삼순이의 등 뒤에 실린 가죽 자루의 비정상적인 무게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뇌고 있었다. 그 탐욕스럽고 의심 어린 눈초리는 향후 관부의 옥죄어오는 추격의 불길한 복선이었다.
***
성문을 통과해 진안부 내부로 들어서자, 황무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하고 화려한 도심의 풍경이 펼쳐졌다.
높은 기와집들과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상인들, 붉은 등불이 내걸린 기루들이 즐비한 번화가. 그러나 무봉 일행은 그 화려한 중심가를 피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진안부의 가장 외곽, 관부의 통제력과 빛이 미치지 않는 음침하고 더러운 슬럼 구역인 '진안부 빈민가'였다.
썩은 하수 냄새와 버려진 오물들이 길바닥에 가득했고,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천민들과 거지들이 흙바닥에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곳.
무봉은 빈민가 깊숙한 벼랑 끝에 위치한 반쯤 무너진 기와집, '진안부 폐가' 앞에 멈춰 섰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담벼락은 허물어져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한 허름한 곳이었지만, 적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었다.
"돌쇠, 가마를 안으로 들여라."
무봉의 나직한 명령에 돌쇠가 조심스럽게 가마를 폐가 안마당으로 내렸다. 무봉은 가마 문을 열고 방울이를 안아 올렸다. 아이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전신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손톱 끝에 푸르스름하게 맺힌 검은 독선들이 그녀의 시한부 삶을 소리 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무봉은 방울이를 먼지가 자욱한 방 안의 낡은 짚더미 위에 조심스럽게 뉘었다. 그리고 삼순이를 마당 한구석의 썩은 대추나무 둥치에 매어두었다. 삼순이는 지친 듯 귀를 늘어뜨린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철컥.
무봉은 폐가의 낡은 목조 대문을 닫고, 미리 준비해 둔 녹슨 쇠사슬을 감아 안쪽에서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 순간, 그의 귓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금침제통의 반동으로 감각이 극도로 무뎌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뼈에 새겨진 살기감응(殺氣感應)이 미약한 경고를 보냈다. 폐가 주변의 허물어진 담벼락 너머, 그리고 어두운 골목길 모퉁이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척후들의 미세한 호흡 소리와 악의적인 기척들이 감지되었다.
'이미 쥐새끼들이 꼬였군.'
무봉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조열의 사주를 받은 흑호방의 왈짜들이거나, 성문에서 자신들을 눈여겨본 배태랑의 밀정들이 분명했다. 당장 나가서 그들의 목뼈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무봉은 억지로 살기를 가라앉혔다. 지금은 자신의 내공이 봉인되다시피 한 상태였고, 방울이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적들이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대규모로 움직이기 전에, 철혈지부의 상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바스락.
그때, 폐가의 무너진 기와지붕 틈새로 쥐색 옷을 입은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작은 체구에 얄상한 눈매, 쥐새끼처럼 기민한 몸놀림을 지닌 사내. 진안부 뒷골목의 모든 추악한 기밀을 돈을 받고 파는 정보 브로커, 개똥이였다. 그는 마당에 서 있는 무봉의 거대한 풍채와,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투박한 무쇠망치를 보고 침을 슬쩍 삼켰다.
"어이구, 대장장이 형씨. 소문보다 풍채가 훨씬 더 괴물 같으시네."
개똥이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무봉에게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무봉의 얼굴에 새겨진 칼흉터와 굳게 다문 입술을 훑었다.
"돈 냄새를 맡고 성문 앞까지 마중 나가려 했는데, 벌써 배태랑 그 탐욕스러운 돼지놈한테 은자를 두둑이 찔러 넣어주고 오셨다면서? 덕분에 내 몫이 줄어들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니까."
개똥이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은근히 은자를 요구했다.
무봉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묵직한 은자 한 푼을 꺼내어 개똥이의 발밑으로 툭 던졌다. 은자가 흙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개똥이는 잽싸게 몸을 굽혀 은자를 주워 들고는, 이빨로 깨물어 순도를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손이 크셔. 자, 그럼 돈값을 해야지."
개똥이의 눈빛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주변의 허물어진 담벼락 너머를 힐끗 살핀 뒤,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었다.
"형씨가 찾는 그 '철혈지부'의 조열 대감 말인데... 보통내기가 아냐. 이미 우각촌에서 형씨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으시더군. 진안부의 지하 조직인 흑호방(黑虎防)의 왈짜들에게 막대한 은자를 현상금으로 걸고 형씨의 목을 가져오라 지시했어."
개똥이는 품속에서 때 묻은 지도 조각을 슬쩍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성문 앞의 배태랑 포교도 조열의 돈을 받고 움직이는 사냥개야. 형씨가 이곳 빈민가 폐가에 들어온 것도 이미 그놈들의 감시망에 걸려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름... 아니, 열흘도 안 되어서 흑호방의 정예 도수들이 이곳을 피로 쓸어버릴 걸세."
개똥이의 비열한 경고가 폐가의 차가운 바람을 타고 흘러 다녔다.
무봉은 짚더미 위에 누워 가늘게 숨을 쉬는 방울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수명은 고작 보름 남짓. 자신을 노리는 적들의 숨소리는 이미 마당 바로 앞까지 좁혀와 있었다.
무봉은 왼손으로 무쇠망치의 자루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무뎌진 경맥 속에서 분노의 불꽃이 다시금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살로(殺路)가 마침내 이 어둠의 대도시, 진안부에서 완전히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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