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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의 붉은 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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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 눈먼 어머니가 계신 슬럼가로 독고용의 마수가 향하고 있다는 개똥이의 속삭임은 고소어의 영혼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심장이 얼음물에 처박힌 것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고, 휠체어의 가죽 팔걸이를 쥔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마비되어 갔다. 당장이라도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낙양의 흙먼지 날리는 골목길로 달려가고 싶었다. 평생 자신을 위해 눈물만 흘려온 어머니였다. 만약 그녀에게 작은 상처라도 생긴다면, 무림맹주 대역이고 천하의 기만극이고 간에 다 불살라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침전의 무거운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밖에는 대장로 독고용이 심어둔 철검대 무사들이 칼날을 번뜩이고 있었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오직 이 화려한 감옥에서 완벽한 가짜로 살아남아 독고용의 목줄을 먼저 쥐는 것만이 어머니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신 차려라, 고소어. 여기서 흔들리면 끝장이다.”


고소어는 입술을 깨물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공포를 억눌렀다. 그의 등 뒤에서 개똥이가 다급하게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어야, 시간이 없어. 벌써 연회장인 정의전에서 장주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남궁세가의 녀석들이 오늘 작정하고 너를 시험하려 들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남궁세가…….”


고소어는 머릿속으로 사공백의 비밀 비망록에 적힌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기록을 빠르게 되짚었다. 정파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며, 늘 맹주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오만한 명문가. 특히 가주의 후계자인 남궁휘(남궁휘)는 일류 중위의 고수로, 젊은 나이에 창궁신공(蒼穹神功)을 익혀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귀공자였다. 독고용이 그를 충동질해 맹주의 무공 소실 여부를 시험하려 판을 짠 것이 분명했다.


고소어는 심호흡을 하며 목덜미 안쪽에 이식하듯 밀착된 청동 후두 장치(靑銅 喉頭 裝置)를 조율했다. 쇳소리 섞인 거친 저음이 그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개똥아, 너는 슬럼가 주변의 거지 동료들을 총동원해라. 어머니의 거처 주위에 겹겹이 장벽을 쳐서 독고용의 수하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시간을 벌어야 해. 은자라면 얼마든지 주마.”


“알았어. 내 목숨을 걸고 이모님을 지킬 테니, 너는 저 위선자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줘!”


개똥이가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자, 고소어는 휠체어의 바퀴를 굴렸다. 윤의선회보(輪衣旋回步)를 시전하여 상체를 완벽히 고정한 채 미끄러지듯 침전을 나섰다. 가슴팍 겉옷 안쪽에는 맹돌이 제작해 준 호심철갑(護心鐵甲)의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고, 무릎 위에는 온갖 사기 도구가 숨겨진 두꺼운 비단 담요가 덮여 있었다.


맹주부의 대청인 정의전(正義殿)에 들어서자, 화려한 홍등의 불빛과 자욱한 침향 연기가 고소어의 눈을 찔렀다. 연회장 내부에는 이미 오대문파의 장주들과 젊은 후기지수들이 가득 들어차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도사린 살기와 의심의 눈초리는 낙양의 한겨울 칼바람보다 매서웠다.


단상 위의 황금빛 의자에 휠체어를 대고 앉은 고소어의 시선이 연회장 상석에 닿았다. 그곳에는 대장로 독고용이 겉으로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으나, 그의 매서운 눈빛은 고소어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독고용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순간, 남궁세가의 상석에서 한 사내가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색 비단 한복에 화려한 금사 자수를 놓은 귀공자, 남궁휘였다. 그의 허리에는 남궁세가의 가보인 보검 창궁검(蒼穹劍)이 빛나고 있었고, 얼굴에는 오만방자한 기색이 가득했다.


“맹주님!”


남궁휘가 우렁찬 목소리로 정의전의 소음을 단숨에 잠재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류 고수 특유의 내력이 실려 있어, 연회장 구석의 촛불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궁세가의 후계자 남궁휘, 맹주님께서 한빙독의 고비를 넘기시고 건재하신 모습을 뵈니 무림의 대행이옵니다. 오늘 이 기쁜 자리에서, 맹주님의 깊고 심오한 내공을 기리며 남궁 가문의 비전 술을 한 잔 올리고자 합니다.”


남궁휘가 시종의 쟁반에서 무겁고 두꺼운 황동 술잔(黃銅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가 술잔을 쥐는 순간, 고소어의 예리한 안구 추적 감각이 작동했다. 남궁휘의 오른쪽 어깨 근육이 기민하게 수축하며, 그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푸른 내력이 손끝을 타고 황동 잔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치이익-


술잔에 담긴 맑은 술이 남궁휘의 창궁신공(蒼穹神功) 내력에 의해 붉게 달아오르며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황동 잔의 표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저것은 단순한 술잔이 아니었다. 닿는 순간 상대의 단전 기혈을 파괴적으로 자극하고, 내력이 없는 범인이라면 손가락 뼈까지 태워버릴 치명적인 무력 시험이었다.


연회장에 모인 정파 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고소어의 손끝으로 쏠렸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독고용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고소어의 정체를 완전히 밝혀내어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파멸시키려는 독고용의 치밀한 계산이 깔린 도발이었다.


‘제길, 저 붉은 잔을 그냥 잡았다간 내 손가락은 숯덩이가 될 거고, 내력이 없다는 게 대중 앞에 폭로되겠지.’


고소어의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극심한 공포가 다리를 마비시키는 듯했으나, 그는 심연부동 안면제어(深淵不動)를 작동시켜 얼굴의 안면 근육 하나 흔들리지 않고 싸늘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는 무릎 담요 밑에 숨겨둔 오른손으로 제갈경이 전해준 전설의 비약, 천금환(千金丸) 한 알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짐짓 기침을 하는 척하며 손을 입가로 가져가, 천금환을 혀밑에 숨겨두었다가 단숨에 삼켰다.


콰아아아-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마자, 고소어의 단전 부근에서 가공할 만한 가짜 열감이 폭발했다. 실제 내공은 아니었으나, 심장의 피를 강제로 끓어오르게 만들어 전신의 모세혈관을 터뜨릴 듯한 뜨거운 기운이 손끝까지 뻗어나갔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솟구쳤지만, 고소어는 이빨을 악물고 고통의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천금환의 약효로 인해 붉게 충혈되며 뜨거운 온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성의를 내 어찌 거절하겠느냐.”


사공백의 위엄 넘치는 저음이 정의전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고소어는 휠체어에서 상체를 아주 미세하게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왼손은 화려한 비단 부채인 기문강선선(奇門鋼線扇)을 살랑거리며 남궁휘의 시선을 강제로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목선분산결(目線分散訣)의 전형적인 시선 유도였다. 남궁휘의 눈동자가 부채의 화려한 움직임에 팔려 0.5초간 아래쪽을 보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


고소어의 오른손이 그림자처럼 붉게 달아오른 황동 술잔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의 소매 속에는 소매치기 시절 오손 스승에게 물려받은 백련은침(百鍊銀針)이 숨겨져 있었다.


스슥-


눈보다 빠른 소매치기 손장난인 환영수법(幻影手法)이 전개되었다. 고소어는 잔을 넘겨받는 아주 짧은 접촉의 순간, 소매 속에 감춰둔 백련은침 끝으로 황동 잔 바닥의 미세한 구조적 균열 부위를 정확히 찔렀다. 맹돌이 알려준 황동 주조의 취약점이었다. 침끝이 잔 바닥을 관통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이 뚫렸다.


쉭-


남궁휘가 잔에 가득 불어넣었던 창궁신공의 뜨거운 내력과 끓어오르는 술이, 압력의 차이에 의해 잔 바닥의 구멍을 타고 고소어의 넓은 옷소매 안쪽으로 순식간에 흘러 들어갔다. 고소어의 소매 안쪽에는 특수 가죽으로 라인 처리가 된 방수 주머니가 장치되어 있었다. 뜨거운 내력의 열기와 술은 가죽 주머니 속으로 흔적 없이 흡수되었고, 압력은 은침을 통해 공기 중으로 분산되었다.


“어……?”


남궁휘는 자신의 가공할 내력이 맹주의 손끝에 닿는 순간, 마치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기이한 감각에 온몸의 털이두 번 곤두섰다.


게다가 천금환의 약효로 인해 고소어의 손가락 끝은 실제로 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고소어의 붉게 충혈된 손가락이 남궁휘의 손등에 가볍게 스치는 순간, 남궁휘는 전율했다. 맹주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열기가 자신의 창궁신공을 아득히 초월하여 전신 경맥을 위협하는 듯한 기괴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좋은 술이로구나.”


고소어는 이미 텅 비어버린 황동 잔을 입가에 대고 마시는 척한 뒤, 잔을 가볍게 털어 바닥을 향해 뒤집어 보였다. 단 한 방울의 술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모든 액체와 내공은 고소어의 소매 속 가죽 주머니로 흘러 들어간 뒤였다.


연회장에 모인 무림인들의 입에서 거대한 침묵과 함께 경악의 신음이 터져 나왔.


“잔을 만지지도 않고…… 남궁 가문의 창궁신공 내력을 단숨에 흡수해 소멸시키다니!”


“저것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심검(心劍)의 경지이자, 내력을 완벽히 제어하여 무(無)로 돌리는 무위자연의 극의가 아닌가!”


무사들의 웅성거림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남궁휘는 자신의 오만한 내력 시험이 단 한 호흡 만에 완벽하게 무력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맹주의 압도적인 가짜 기세에 눌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자신이 맹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단전에 감히 도전했다는 사실에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툭-


남궁휘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창궁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맹, 맹주님의 깊고 넓으신 무학에…… 소협이 감히 무례를 범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고소어는 휠체어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남궁휘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목구멍의 청동 고리가 웅장하게 공명했다.


“남궁세가의 젊은 천재가 기개가 넘치는 것은 좋으나, 무(武)의 근본은 남을 시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거늘. 물러가 성찰하거라.”


“예, 예!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남궁휘가 허겁지겁 자리로 돌아가자, 연회장 구석에 앉아 있던 대장로 독고용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맹주의 완벽한 내력 제어(사실은 정교한 누수 트릭)에 독고용 역시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독고용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리며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


그러나 그 순간, 고소어의 소매 안쪽에서는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천금환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단전 부근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오장육부를 난도질했고, 목구멍으로 검붉은 피가 역류해 올라왔다. 손가락 끝은 실제로 미세한 화상을 입어 쓰라렸고, 내장 기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싶었지만, 고소어는 이빨을 사려 물고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살아야 한다. 여기서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모든 게 끝이다.’


고소어는 소매 속에서 끓어오르는 피를 목구멍 뒤로 강제로 삼키며, 천하 고수들을 향해 당당하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시야는 이미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맹주부의 어두운 구석에서 독고용이 은밀히 살수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그의 흐려지는 눈동자에 포착되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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