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그림자
백화곡의 흐드러진 매화 꽃잎을 뒤로하고 비밀 침전(비밀 침전)으로 돌아온 고소어는 휠체어에서 내려앉자마자 목을 부여잡았다. 입안에서 비린내 나는 뜨거운 피가 울컥 솟구쳤다.
"끄윽……!"
고소어는 신음하며 소매로 입가에 묻은 붉은 흔적을 거칠게 닦아냈다. 목구멍 안쪽에 이식하듯 밀착된 청동 후두 장치(靑銅 喉頭 裝置)가 성대의 살을 짓누르는 고통은 매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잣거리 소매치기 시절에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도 아프지 않았거늘, 천하를 호령하는 무림맹주 사공백의 웅장한 쇳소리를 연기하는 대가는 이토록 가혹했다.
그는 휠체어 무릎 담요 밑에 숨겨둔 약병을 꺼내어 제갈경이 조제해 준 감로유(甘露油)를 목구멍에 흘려 넣었다. 차가운 기름이 타들어 가던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침전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오직 창살 틈새로 스며드는 차가운 달빛만이 바닥의 백련대리석을 푸르게 비출 뿐이었다. 고소어는 휠체어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낮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 사공향의 의심은 비망록의 기억을 쥐어짜 극적으로 넘겼지만, 그녀의 눈물 고인 얼굴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진짜 가족의 온기를 갈망하는 순진한 여검객을 속였다는 죄책감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슬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곳은 맹주부 내부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삼엄한 감옥이자,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목이 달아나는 살얼음판이었다.
사각-
그때, 침전의 오른쪽 장막 뒤에서 지극히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낙엽이 스치는 듯한 소리였으나, 저잣거리에서 평생 포졸들의 발걸음 소리를 귀신같이 감지해 온 고소어의 예민한 청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고소어는 숨을 멈추고 휠체어 바퀴를 미세하게 굴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오손 스승에게 배웠던 대로 호흡을 극도로 낮추고 시선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정했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하나가 살금살금 기어 나와 사공백의 개인 소장함—가문의 비밀 비급과 비보가 담겨 있다고 알려진 ‘한철 보합’ 앞으로 다가갔다. 달빛이 비친 그림자의 옷자락은 화려한 비단으로 짜여 있었고, 손가락마다 값비싼 옥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침입자는 독고용의 살수가 아니었다. 사공백의 친동생이자 가문의 탐욕스러운 야심가, 사공혁(사공혁)이었다.
‘저 늙은 여우가 왜 이 밤중에 여기를…….’
고소어는 직감했다. 사공혁은 형의 갑작스러운 서거와 자신의 기묘한 생존을 은밀히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형이 남긴 가문의 진짜 보물과 비급을 가로채는 동시에, 휠체어에 앉아 숨어 지내는 ‘가짜 형’의 약점을 잡기 위해 침입한 것이 분명했다.
사공혁이 품속에서 가느다란 철사를 꺼내 한철 보합의 자물쇠 구멍에 밀어 넣으려 했다.
고소어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자물쇠 따기라면 저잣거리의 소매치기인 자신이 천하제일이었다. 사공혁의 서툰 손짓은 그의 눈에 한낱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 한철 보합이 열리는 순간, 진짜 사공백이 숨겨둔 비밀 일기장과 비망록이 사공혁의 손에 들어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기만극은 끝이었다.
고소어는 윤의선회보(輪衣旋回步)를 시전하여 휠체어를 소리 없이 굴려 사공혁의 등 뒤 삼 척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목구멍의 청동 고리를 강하게 조이며, 사공백의 거칠고 압도적인 쇳소리를 뿜어냈다.
“숙부님. 이 깊은 밤에 형님의 침소에서 무엇을 그리 열심히 찾고 계십니까?”
“헉……!”
사공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들고 있던 철사가 대리석 바닥에 쨍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공백—고소어의 위엄 넘치는 실루엣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형…… 형님! 깨어 계셨습니까?”
사공혁은 다급히 바닥의 철사를 소매 속으로 감추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탐욕과 의심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낮에 지법선사와의 대면에서 형님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여, 동생으로서 걱정되는 마음에 은밀히 약재를 전해 드리려 왔을 뿐입니다. 결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약재를 전하려 한 자가 왜 형님의 개인 비장 보합에 철사를 들이밀고 있었던 말이냐?”
고소어는 휠체어에서 차갑게 눈빛을 빛냈다. 사공혁은 침을 삼키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는 형이 무공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은밀히 소매 속에 숨겨둔 암기 발사 장치로 손을 가져갔다. 그가 기습적으로 내력을 뿜어내어 자신을 공격한다면, 무공이 전혀 없는 고소어는 그 자리에서 뼈도 추리지 못할 터였다.
‘이 늙은 도둑놈이 내력을 쓰려 하는구나. 먼저 시선을 돌려야 한다.’
고소어는 묘수비결(妙手秘訣)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눈보다 빠른 것은 인간의 탐욕이다.* 상대방이 가장 집착하는 물건으로 시선을 분산시켜야 했다.
고소어는 짐짓 분노한 척하며 휠체어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 반동으로 휠체어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사공 가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 향로’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쾅-! 쨍그랑!
“무례하도다!”
사공혁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구르는 청동 향로의 화려한 문양으로 향했다. 단 0.5초의 찰나였다.
고소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휠체어에서 상체를 기적처럼 부드럽게 앞으로 기울이며, 소매치기 시절 수만 번을 단련했던 성동격서 묘수법(聲東擊西 妙手法)을 전개했다. 그의 오른손이 잔상을 남기며 사공혁의 넓은 비단 소매 안쪽으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사공혁의 소매 안쪽 주머니에 닿은 손끝에 차갑고 묵직한 황동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공 가문의 비전 창고를 열 수 있는 극비의 ‘황동 패(牌)’였다. 고소어는 손가락 근육을 미세하게 조절하여, 사공혁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마찰만을 남긴 채 황동 패를 쥐고 소리 없이 소매를 거두어들였다.
이 모든 동작이 단 한 호흡 만에 이루어졌다. 사공혁은 자신의 소매 안에서 가문의 보물이 사라진 줄도 모른 채, 바닥의 향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소어는 훔쳐낸 황동 패를 소매 속에서 가볍게 튕겨, 사공혁이 서 있던 발밑 바로 옆의 어두운 구석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이것이 무엇이냐?”
고소어의 차가운 목소리가 침전을 울렸다. 사공혁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황동 패를 본 사공혁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어찌 내 가문의 패가 여기에……!”
“숙부님. 형님이 앓아누운 틈을 타, 가문의 비전 창고 열쇠인 황동 패를 몰래 훔쳐내어 도망치려 했던 것이냐? 가문의 규율에 따르면, 맹주의 보물을 사적으로 탐한 자는 기경팔맥을 끊고 가문에서 영구히 추방당한다 배웠거늘.”
고소어는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추어 웅장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사공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자신이 훔치려다 들킨 현행범으로 몰린 상황이었다. 진짜 사공백의 성정이라면 지금 당장 검기를 날려 자신의 목을 베었을 터였다.
“형, 형님! 오해입니다! 이것은 결코 훔치려 한 것이 아니라……!”
“닥치거라! 한 번만 더 내 침전 주변을 서성인다면, 다음에는 가문의 장로들 앞에서 네놈의 추악한 탐욕을 공식적으로 단죄할 것이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고소어의 매서운 불호령에 사공혁은 바닥의 황동 패를 주워 들 생각도 못 한 채, 겁에 질려 허둥지둥 창문을 뛰어넘어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그의 비참하고 겁먹은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고소어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휠체어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죽는 줄 알았네.”
고소어는 바닥에 떨어진 황동 패를 슬쩍 집어 들어 휠체어 무릎 담요 밑의 비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사공혁을 완벽하게 프레임에 가두어 쫓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스슥-
그때, 침전의 반대편 비밀 통로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누더기 옷을 입은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소어의 유일한 의형제이자 외부 정보원인 개똥이(개똥이)였다.
“소어야! 무사했구나!”
개똥이는 고소어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가득했고, 눈빛에는 전례 없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고소어는 반가운 마음에 휠체어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개똥아! 낙양 외부의 상황은 어찌 되었느냐? 독고용의 움직임은 파악했어?”
개똥이는 침전 내부의 어둠을 경계하며 고소어의 귀에 바짝 다가앉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가 고소어의 심장을 단숨에 얼려버렸다.
“소어야, 큰일 났다. 대장로 독고용의 부하들이…… 낙양 저잣거리 슬럼가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어. 네 진짜 신분과 함께, 저택 구석방에 숨어 계신 네 눈먼 어머니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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