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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전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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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침전을 나가고 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야, 고소어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허어어억……!”


등 뒤로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비단 속적삼이 축축하게 몸에 감겼다. 조금 전, 춘향의 그 매서운 눈빛이 자신의 손가락 끝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순간에는 정말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소매치기 시절 갈고닦은 손재주가 아니었다면, 사공백의 진짜 버릇인 ‘잔 세 번 흔들기’를 그 찰나의 순간에 재현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청동 후두 장치가 쇠살을 짓누르는 고통이 다시금 찌릿하게 밀려왔다. 감로유의 달콤한 향이 가라앉자, 잘려 나간 살점처럼 성대가 화끈거렸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맴돌았으나 고소어는 혀끝으로 그것을 억지로 삼켰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쥐새끼야.”


침전의 어두운 구석, 장막 뒤에서 독고용의 음산한 전령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검은 독사처럼 기척을 숨기고 있던 대장로의 밀정이었다. 그의 손에는 맹주부의 공식 행사에 쓰이는 웅장한 비단 담요가 들려 있었다.


“장로들이 이미 정의전(正義殿)에 집결했다. 지법선사를 비롯한 원로들이 맹주님의 한빙독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칼날을 갈고 있지. 휠체어에 타라. 이제부터 네놈이 천하를 속일 첫 번째 연극이 시작된다.”


고소어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멀쩡히 살아서 뛸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 그는 하반신이 마비된 병약한 맹주여야 했다. 그래야만 고수들이 ‘한번 겨뤄보자’며 칼을 들이밀 때 합법적으로 도망칠 핑계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철검대원들이 준비한 흑칠 목판 휠체어에 몸을 얹었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엉덩이를 타고 척추로 올라왔다. 밀정이 건네준 두꺼운 황금사 자수의 비단 무릎 담요를 다리 위에 덮었다. 담요의 묵직한 무게감이 가짜 다리를 짓눌렀다. 이 담요 밑은 앞으로 온갖 사기 도구와 은침, 연막탄을 숨길 고소어만의 유일한 무기고가 될 것이었다.


“출발해라.”


고소어가 사공백의 쇳소리 섞인 저음으로 나직이 명령했다. 목구멍의 청동 고리가 울리며 침전의 공기를 무겁게 흔들었다.


문이 열리고, 휠체어가 미끄러지듯 침전을 벗어났다. 고소어는 바퀴를 굴리는 미세한 각도를 조절하며 상체가 전혀 흔들리지 않게 균형을 잡았다. 늙은 소매치기 오손에게 배웠던 보법의 원리를 휠체어 바퀴에 적용한 윤의선회보(輪衣旋回步)였다. 겉보기에는 내공의 기운으로 휠체어를 부드럽게 밀어내는 대고수의 모습 그 자체였다.


관도를 지나 정의전으로 향하는 길, 삼엄하게 늘어선 철검대 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병기를 바닥에 부딪쳤다.


웅- 웅-


웅장한 쇠소리가 고소어의 귓전을 때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잣거리에서 포졸들의 눈치를 보며 은전 몇 푼을 훔치던 좀도둑이, 지금은 수천 명의 목숨을 쥔 대맹주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발각되는 순간, 저들이 쥔 예리한 철검들이 자신의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길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살아야 한다. 내 눈먼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들통나선 안 돼.’


마침내 정의전의 거대한 청동 문이 서서히 열렸다.


쿠구구구구-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의전 내부의 압도적인 냉기가 고소어의 뺨을 스쳤다. 백련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수십 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자욱한 침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청의 양편으로는 정파 무림의 쟁쟁한 문파 장주들과 장로 수십 명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무형의 기세와 살기가 정의전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휠체어가 대청 한가운데의 높은 단상 위로 부드럽게 굴러갔다. 고소어는 휠체어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십 쌍의 날카로운 눈빛들이 일제히 그의 몸으로 쏟아졌다. 기 탐지를 시도하는 고수들의 은밀한 안력이 고소어의 얼굴과 어깨를 헤집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고소어는 얼굴의 모든 근육을 차갑게 굳히며 심연부동 안면제어를 가동했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넓은 비단 소매 속에 떨리는 두 손을 감추었다.


단상 아래의 가장 앞자리에는 대장로 독고용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황금빛 가사를 걸치고 거대한 황금석장을 짚은 늙은 승려가 서 있었다. 숭산파의 최고 원로이자 의심 많기로 소문난 지법선사(지법선사)였다.


지법선사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대리석 바닥을 울릴 때마다 무거운 파동이 고소어의 가슴을 압박했다.


“아미타불. 맹주님께서 폐관 수련 중 한빙독의 습격을 받아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되셨다는 소문을 듣고 소승의 마음이 몹시 무거웠사옵니다.”


지법선사의 목소리에는 자비로운 불가의 기운이 실려 있는 듯했으나, 눈빛만큼은 독사의 독니처럼 예리하게 고소어의 무릎을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 방파의 대회의가 코앞인데, 맹주부의 수장이 휠체어에 의지하고 계시니 정파의 기세가 꺾일까 염려되옵니다. 일각에서는 맹주님의 자하공(紫霞功) 내력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 맹주님의 건재함을 가볍게 증명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첫 번째 공식적인 무력 압박이었다. 지법선사의 말이 끝나자, 정의전에 모인 장로들 사이에서 은밀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 독고용은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역시 고소어가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하는지 시험하려는 속셈이었다.


실수 한 번에 목이 달아나는 외나무다리 위.


지법선사가 슬그머니 황금석장을 가볍게 내리쳤다.


쿵-!


눈에 보이지 않는 순양(純陽)의 내력이 대리석 바닥을 타고 단상 위 고소어의 휠체어를 향해 들이닥쳤다. 휠체어 바퀴가 미세하게 떨리며 고소어의 두 다리가 공포로 인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정의전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의 무공 부재가 들통날 터였다.


‘제길, 바퀴가 흔들린다!’


고소어는 이빨을 악물며 휠체어 무릎 담요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어 휠체어의 진동을 온몸으로 억누르고, 다리 근육을 강제로 경직시켰다. 극심한 정신적 소모로 인해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표정만큼은 얼음처럼 차갑게 유지했다.


그리고 오손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고수일수록 눈앞의 화려한 초식보다 보이지 않는 빈틈에 먼저 속아 넘어가는 법이다. 완벽히 비어있는 상태를 보여주어라.’


고소어는 지법선사를 향해 눈을 천천히 감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완벽한 침묵이었다. 고소어는 호흡의 템포를 완전히 제로로 낮추며, 단 한 줌의 기척도 내뿜지 않았다. 내력이 없어 텅 비어있는 그의 단전이, 고수들의 눈에는 오히려 ‘기척조차 대자연 속으로 갈무리한 화경(化境)의 무위 경지’로 착각하게 만드는 기묘한 오해의 순간이었다.


삼 초의 침묵이 흐른 뒤, 고소어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오한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정의전 전체를 압도했다.


“지법.”


청동 후두 장치가 성대를 찢어발기며 웅장하고 거친 사공백의 쇳소리가 정의전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천인위압술(千人威壓術)의 극의가 실린 목소리였다.


“숭산파의 불법은 겨우 남의 단전 상태나 훔쳐보는 좀도둑의 기술로 변했단 말이냐?”


성난 호랑이의 포효 같은 호통에 지법선사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장내의 장로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본 맹주의 무학이 이미 형식을 초탈하여 무(無)의 경지에 달했거늘, 네놈의 얕은 안력으로 감히 나의 심연을 측정하려 들다니. 무례함이 도를 넘었구나!”


고소어는 윤의선회보를 활용해 휠체어 바퀴를 부드럽고 위엄 있게 한 바퀴 돌렸다. 상체의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이, 단상 아래의 지법선사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기세는 영락없는 천하제일인의 아우라였다.


“정파의 안위가 염려된다면, 대회의 당일 내 검끝이 사파 마교의 목을 벨 때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라. 그전까지 내 몸에 손을 대거나 내력을 시험하려 드는 자는, 무림맹을 분열시키려는 사파의 첩자로 간주하여 즉시 철검대의 단죄를 받게 할 것이다!”


지법선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맹주의 당당한 호통과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위압감 앞에, 늙은 승려는 스스로의 안력이 부족하여 대고수의 깊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착각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미타불. 소승의 무례를 용서하옵소서, 맹주님. 맹주님의 깊은 무학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매한 질문을 던졌사옵니다.”


지법선사가 황금석장을 거두며 뒤로 물러서자, 독고용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고소어는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간신히 참아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직 말빨과 기세만으로 천하의 절정 고수를 완벽하게 속여넘긴 것이었다.


장내의 긴장감이 극에 달하며 고소어가 승기를 굳히려는 바로 그 순간.


쾅-!


정의전의 거대한 청동 문이 거칠게 열리며 장엄한 정적을 깨뜨렸다. 문틈 사이로 흩날리는 백색의 화산파 도복과 서리처럼 차가운 매화검의 기운이 대청 안으로 폭풍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 한가운데, 대쪽같이 곧은 성품과 서리 같은 살기를 품은 화산파의 여검객이자 사공백의 친딸, 사공향(사공향)이 정의전의 붉은 비단 카펫을 밟으며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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