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가 태어난 밤
낙양의 밤은 질척이는 진흙과 썩은 시궁창 냄새로 가득했다. 열아홉 해를 살아오며 고소어가 배운 유일한 생존 법칙은 단 하나, ‘하늘이 무너져도 도망칠 구멍은 있고, 주머니는 털릴 틈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은 달랐다.
“잡아라! 그 소매치기 놈이 동쪽 골목으로 갔다!”
뒷골목 빚쟁이들의 거친 고함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고소어는 낡은 삼베옷 소매를 펄럭이며 걸음아 날 살려라 달렸다. 저잣거리에서 구르고 다치며 다져진 삼류 경공—아니, 경공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개싸움식 달리기였다. 기경팔맥에 내력 한 줌 흐르지 않는 완벽한 범인의 몸뚱이였지만, 막다른 골목의 개구멍을 찾아내는 눈치만큼은 천하제일이라 자부했다.
허나 어두운 골목 모퉁이를 도는 순간, 불어온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시궁창 냄새 대신 짙은 침향과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코끝을 스쳤다. 고소어의 동물적인 직감이 경고 신호를 보냈다. 빚쟁이들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회색 도포의 무인들. 그들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고, 발걸음에는 바람 소리조차 섞이지 않았다. 절정 고수들이었다.
“어, 어라?”
도망칠 틈도 없었다. 고소어가 몸을 틀어 담벼락을 타려던 찰나, 차가운 손가락 하나가 그의 목덜미 혈도를 가볍게 짚었다. 내력이 몸 안으로 침투하기도 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며 의식이 암전되었다. 저잣거리 삼류 소매치기 고소어의 비천한 인생이 통째로 낚여 올라간 순간이었다.
***
차가운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소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거칠게 깎인 석벽과 천장에 매달린 고드름이었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독에 가까운 냉기가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이곳은 무림맹주부(武林盟主府)에서도 가장 깊고 은밀한 금지 구역, 지하 빙실(氷室)이었다.
“정신이 드느냐, 천한 쥐새끼야.”
가래가 끓는 듯하면서도 쇠를 긁는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빙실을 울렸다. 고소어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인 도포를 걸치고, 매의 눈빛을 지닌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무림맹의 실질적인 권력자이자 대장로, 독고용이었다. 그의 등 뒤로는 검은 갑옷을 입은 철검대 무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내, 내가 왜 여기에…… 끄윽!”
고소어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지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독고용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등 뒤의 거대한 얼음 덩어리—만년 한빙으로 만들어진 빙관의 장막이 걷혔다.
그 안을 들여다본 고소어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극도의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아…… 아아……!”
빙관 속에 얼어붙어 있는 사내의 얼굴. 백발의 성성함과 깊은 주름, 그리고 오랜 세월 권력의 정점에서 군림했던 위엄이 서려 있었지만, 이목구비만큼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고소어 자신과 똑같았다. 아니, 똑같은 수준이 아니라 영혼을 복사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는 바로 며칠 전 갑작스러운 독살로 서거한 정파의 영웅이자 무림맹주, 사공백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닮았지.”
독고용이 빙관을 쓰다듬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사공백이 만성 독살로 급사했다. 당장 사흘 뒤면 천하 방파의 장주들이 맹주부로 들이닥쳐 대회의를 열기로 되어 있지. 맹주의 죽음이 알려지는 순간, 정파는 사분오열될 것이고 사파 마교의 칼날이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천하를 속일 완벽한 대역이 필요했다. 바로 너 같은 저잣거리의 쓸모없는 쓰레기 말이다.”
“말도 안 돼! 난 무공도 모르는 소매치기요! 저 차가운 시체 흉내를 내가 어떻게 낸단 말이오!”
고소어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단전에 기운 한 푼 없는 자가 천하제일인의 대역을 맡는다는 건, 스스로 목을 매는 것보다 더 빠른 자살행위였다.
“네 놈의 무공 유무 따위는 중요치 않다. 어차피 사공백은 한빙독을 억누르기 위해 휠체어에 앉아 요양 중인 것으로 꾸밀 테니까. 너는 그저 우리가 짜놓은 판 위에서 입만 벌리면 된다.”
독고용의 눈빛에 잔혹한 살기가 서렸다.
고소어의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여기서 ‘예’라고 해도 결국 정체가 들통나 죽을 것이고, ‘아니오’라고 해도 이 빙실에서 시신이 되어 나갈 터였다.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그는 소매치기 시절 갈고닦은 손목 탈골 기술을 이용해 소리 없이 사슬에서 손을 빼냈다. 경비 무사들이 독고용의 위압적인 기세에 한눈을 판 찰나를 노렸다.
‘지금이다!’
고소어는 바닥을 차고 솟구쳐 빙실 위쪽의 좁은 통풍구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저잣거리에서 왈패들을 피해 도망치던 동물적인 감각이 살아났다. 허나, 그가 창틀에 손을 대기도 전에 바람 소리조차 없는 예리한 신법이 공간을 갈랐다.
철검대 무사 하나가 이미 창틀 위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가 뿜어낸 가벼운 풍압 한 줄기에 고소어는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돌바닥에 부딪힌 몸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커헉! 끄응……”
“쥐새끼가 묘기를 부리는구나.”
독고용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고소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에 낡은 은비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때 묻고 긁힌 흔적이 가득한, 낙양 슬럼가 시장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비녀였다.
고소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숨이 막혀왔다.
“이, 이 비녀가 왜 어르신 손에……”
“낙양 동쪽 슬럼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눈먼 노파 하나가 살고 있더군. 매일 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바느질을 하더군. 이름이 고씨 부인이라 했던가?”
독고용이 은비녀를 가볍게 부러뜨릴 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네놈이 내일 아침 맹주의 침전에서 눈을 뜨지 않는다면, 그 노파의 목은 낙양 저잣거리 개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네놈의 천박한 목숨과 함께 말이다.”
고소어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분노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상대는 천하를 쥐고 흔드는 무림맹의 대장로였다. 힘없는 삼류 소매치기가 저항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살려야 했다. 자유롭던 도둑 인생의 종말을 고하는 비극적인 자각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하겠소. 시키는 대로 다 하겠소.”
고소어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빙실 바닥에 떨어져 얼어붙었다.
독고용은 만족스러운 듯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품속에서 두꺼운 가죽 비책 하나를 던졌다. 턱 하고 고소어의 머리맡에 떨어진 것은 사공백의 일상적인 습관과 미세한 말투, 좋아하는 차의 종류까지 적힌 극비 비망록이었다.
“남은 시간은 단 네 시간이다. 당장 내일 아침이면 사공백의 최측근 시녀인 춘향이 방으로 들어와 너를 수색할 것이다. 평소와 아주 미세한 걸음걸이나 눈빛 하나만 달라도 네 정체는 폭로될 것이고, 그때는 네 어미의 목부터 날아갈 것이다.”
독고용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내일 아침, 천하를 기만하는 진짜 가짜가 태어나는 것이다. 행운을 빌지, 도둑놈아.”
빙실의 육중한 석문이 닫히는 굉음과 함께, 고소어는 홀로 남겨진 채 피로 쓰인 일기장을 움켜쥐었다.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한 목숨을 건 사기극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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