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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보라색 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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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명율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은 숨이 막힐 듯한 질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차가운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교실 안을 비추었지만, 그 빛마저도 교실 중앙에 맴도는 기괴한 침묵을 녹이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스마트폰 액정을 힐끔거리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고, 그 시선의 끝에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한소희.


그녀는 자신의 책상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소희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책상 위를 적셨다. 소희의 책상 상판은 입에 담지 못할 원색적인 성적 낙서와 비방이 담긴 포스트잇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학교 매점 뒤편이나 여학생 화장실 벽에나 적힐 법한 추악한 문장들이, 오직 소희 한 사람을 난도질하기 위해 굵고 번들거리는 보라색 마커펜으로 휘갈겨져 있었다.


교실의 그 누구도 선뜻 나서서 낙서를 지워주거나 소희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지 않았다. 반장인 이미소조차 교무실에 제출할 학급 일지를 챙기며 무심하게 그 옆을 지나칠 뿐이었다. 방관자 효과.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면서도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나서겠지’라며 책임을 회무하는 비겁한 침묵이 교실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교실 맨 뒷줄 구석 자리.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채 엎드려 있던 임채원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채원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지독한 구역질과 함께 뜨거운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가 똑같은 방식의 조작된 소문과 오프라인 낙서 테러를 당할 때 보복이 두려워 방관했다가 결국 친구를 영원히 잃어야 했던 죄책감이 뇌리를 스쳤다.


‘다시는 눈앞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게 두지 않아.’


채원은 주머니 속 마스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배터리 표시등은 어젯밤 윤세아의 기술적 덫을 방어하느라 전력을 소모해 겨우 ‘9%’를 가리키며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함부로 폰을 켜서 데이터를 낭비할 수 없는 기술적 한계 상황이었다.


‘폰을 쓰지 않아도 상관없어. 범인은 이 교실 안에 흔적을 남겼으니까.’


채원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투명 인간 은신술’을 발휘하듯 존재감을 지운 채 소희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들은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아웃사이더 임채원이 움직이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채원은 소희의 책상 위에 칠해진 보라색 낙서를 육안으로 정밀 관찰했다. 잉크는 이미 말라붙어 있었지만, 빛에 비추어 보자 미세한 은빛 펄과 함께 특유의 시큼한 솔벤트 냄새가 풍겼다. 일반적인 국산 컴퓨터용 수성펜이나 유성 매직이 아니었다.


‘미쓰비시 포스카(POSCA) 바이올렛 8mm 라운드 팁.’


국내 오프라인 문구점에서는 쉽게 구하기 힘든 수입 한정판 아크릴 마커펜이었다. 채원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즉각 반응했다. 명율고 안에서 이 펜을 구할 수 있는 곳은 단 하나, 학교 정문 옆 매점뿐이었다. 최근 매점 아주머니 장미숙이 수입 학용품 세트를 한정 수량으로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정다은의 가십망을 통해 기억하고 있었다.


채원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 카운터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도서부 후배 이태식이 앉아 있었다. 채원은 태식에게 다가가 존재감을 지운 채 나지막하게 물었다.


“태식아, 혹시 어제나 오늘 매점에서 포스카 보라색 마커펜 팔린 적 있어?”


태식은 갑자기 나타난 채원의 예리한 눈빛에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선배. 그거 딱 한 자루 들어왔던 건데…… 어제 점심시간 직후에 팔렸어요. 기가 막히게 기억나요. 그거 되게 비싼 펜이라 아무도 안 사 가던 거였거든요.”


“결제 방식은?”


“체크카드요.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결제해 줬어요.”


채원은 태식에게 윙크를 보냈다. 태식은 눈치를 채고 매점 아주머니가 창고로 들어간 사이, 포스(POS) 단말기 화면을 조작해 어제 오후의 카드 결제 승인 내역을 모바일로 촬영해 채원에게 은밀히 전송했다.


[결제 시간: 어제 13시 10분. 승인 카드 번호: 하나카드 ****-****-3928-****]


물리적 증거가 확보되었다. 채원은 아지트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도서실로 향했다. 도서관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근로 장학생 강태오에게 접근해 어제 점심시간 도서실 이용 기록 대장을 확인했다.


낙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이자 강서윤의 충실한 사냥개인 신미소. 그녀는 어제 점심시간 내내 학생회장 윤세아와 함께 도서실에서 심화 자습을 했다며 완벽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기 대장을 훑어내려 가던 채원의 손가락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신미소: 13시 05분 외출 (사유: 화장실), 13시 25분 복귀.]


20분간의 공백. 도서실에서 매점까지 왕복하는 시간은 걸어서 정확히 3분이었다. 매점에서 펜을 구매하고, 2학년 3반 교실로 올라가 소희의 책상에 낙서를 휘갈긴 뒤 도서실로 복귀하기에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시간선이었다.


‘9단계: 오프라인 알리바이 파괴 분석 완료.’


디지털 공간 뒤에 숨어 여론을 조작하던 가해자가, 오프라인이라는 인지적 사각지대 속에서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의 꼬리가 잡혔다.


3교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교실 뒤편 창가 자리. 신미소는 평소처럼 화려한 피어싱을 반짝이며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입술에 틴트를 바르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일진 무리들이 모여 소희의 책상을 힐끔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신미소의 얼굴에는 자신은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으니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함과 안도감이 가득했다.


스윽.


그때, 신미소의 바로 옆자리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평소라면 존재감 없이 먼지처럼 앉아 있어야 할 유령 학생, 임채원이었다.


채원은 긴 앞머리 아래로 차갑고 예리한 안광을 뿜어내며 신미소의 책상 바로 옆에 우뚝 섰다. 평소의 구부정한 자세는 간데없고, 꼿꼿하게 선 채원의 실루엣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적이고 날카로운 텐션이 순식간에 신미소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뭐야, 임채원? 유령처럼 갑자기 왜 이래? 깜짝 놀랐잖아.”


신미소가 불쾌하다는 듯 거울을 소리 나게 닫으며 채원을 쏘아보았다. 주변의 일진 아이들도 황당하다는 듯 채원을 쳐다보았지만, 채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신미소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리고 나지막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무심하게 툭 던졌다.


“보라색 마커펜 잉크 냄새가 참 좋네.”


탁.


순간, 신미소의 온몸이 굳어졌다. 거울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직되더니, 손끝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실시간 대면 프로파일링 기술이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채원의 시야 속에서 신미소의 목덜미를 흐르는 경동맥의 박동이 급격히 빨라지는 것이 육안으로 포착되었다. 거짓말을 인지한 뇌가 교감신경을 자극해 심박수를 폭발시킨 것이다. 신미소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가방 속으로 쑥 밀어 넣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무, 무슨 개소리야? 나 보라색 펜 같은 거 안 키워. 냄새는 무슨…… 너 미쳤어?”


신미소는 소리를 지르며 뻔뻔하게 알리바이를 주장하려 애썼다.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고, 단어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채원은 입꼬리를 비틀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깊고 단단한 눈동자가 신미소의 흔들리는 동공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안 키운다고? 어제 점심시간에 도서실에서 13시 5분에 나갔잖아, 미소야.”


채원의 목소리는 교실의 웅성거림을 뚫고 신미소의 귓전에 송곳처럼 박혔다.


“화장실 간다던 애가 왜 매점 방향 비상계단으로 내려갔을까? 그리고 네 가방 속에 숨긴 오른손 검지 손톱 밑에 묻은 거, 지워지지 않은 보라색 아크릴 안료 맞지?”


“이, 임채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나 어제 도서실에 계속 있었다니까? 증인도 있어!”


신미소의 얼굴이 서서히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주변의 일진 무리들도 채원의 구체적인 시간 언급에 당황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채원은 신미소의 책상 상판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규칙적인 아날로그 노이즈가 신미소의 심장을 짓눌렀다.


“매점 포스기에 찍힌 결제 시간 13시 10분, 네 체크카드 승인 내역이 낙서 시간과 정확히 겹치네.”


채원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교실 뒤편의 차가운 정적 속에서, 채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승인 번호 마지막 네 자리 3928. 네 하나카드 뒷번호 맞지, 신미소?”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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