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벽 뒤의 거래
헤드폰이 그의 어깨에 툭 걸치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컴퓨터실 내부의 서늘한 기계 소음과 모니터의 푸른 빛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차갑게 분할하고 있었다. 임채원은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 끝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켓 주머니 속의 마스터 폰은 이제 겨우 10%의 배터리를 남겨둔 채 미세한 온기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원격 프록시를 경유해 흔적을 지우려던 찰나, 기술적 외통수가 그녀의 목덜미를 덮친 것이다.
박민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채원의 책상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느렸지만, 바닥을 딛는 실내화 소리는 채원의 심장 박동과 기묘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채원의 책상 앞에 멈춰 선 민우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툭 내밀었다. 액정 화면에는 대나무숲 어드민 세션 ID와 컴퓨터실 3번 좌석의 맥 주소가 소수점 아래 자리까지 완벽하게 매핑된 데이터 시트가 띄워져 있었다.
"우회 경로가 꽤 정교하더라." 민우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나 적대감 대신, 기묘한 지적 유희와 흥미가 가득 차 있었다. "국내 사설 프록시 세 개를 경유해서 대숲 서버 백오피스로 들어가는 루트. 일반 학생 수준은 아냐. 하지만 명율고 메인 라우터의 트래픽 동시성을 매초 단위로 대조하면 결국 이 자리로 수렴하게 되어 있어. 3번 좌석, 임채원."
채원은 눈을 가리는 긴 앞머리 아래로 숨을 죽였다. 관자놀이가 찌릿하게 아파왔다. 아버지가 남겨준 필기 분석 노트의 구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장 위험한 추격자를 만났을 때, 네가 쥔 가장 큰 무기는 상대가 스스로를 천재라 믿는 오만함이다.' 채원은 심장의 요동을 억누르며 천천히 포커페이스를 구축했다. 그녀는 굳어 있던 손가락을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차갑고 건조한 시선이 민우의 모니터 안경 너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걸 나한테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박민우?" 채원의 목소리는 비명이나 당황 없이 나지막했다. "내가 어드민이라는 사실을 학생회장 윤세아나 선도부에 고발해서 포상이라도 받으려고?"
민우는 헛웃음을 삼켰다.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내가 그 멍청한 회장 패거리한테 아부할 것처럼 보여? 난 그저 내 라즈베리 파이 패킷 스니퍼가 찾아낸 이 아름다운 동시성 데이터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그런데 전교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유령' 임채원이라니. 이건 꽤 신선한 충격인데."
"신선한 충격에 그치지 않을 텐데." 채원이 가만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기묘한 압도감이 컴퓨터실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너, 컴퓨터 동아리 '디시퍼'에서 윤동현 선배의 대학 입시용 수행평가 코딩 과제, 네가 대신 해주고 있지?"
민우의 얼굴에서 조소 어린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안경 너머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하는 것을 채원은 놓치지 않았다. 실시간 대면 프로파일링의 감각이 민우의 신체 언어를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민우가 방어적인 태도로 되물었다.
"윤동현 선배가 제출한 C++ 소스코드의 주석 문체학적 분석 결과야." 채원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 선배는 평소 국어 서술형 답안지에서 조사 '이/가' 대신 '은/는'을 상습적으로 오용하고, 문장 끝에 불필요한 마침표를 세 개씩 찍는 습관이 있어. 그런데 그가 제출한 코딩 주석에는 쉼표 뒤에 무조건 한 칸을 띄우는 정교한 띄어쓰기 규칙과, 변수명에 영문 소문자 'm'을 접두사로 붙이는 특유의 헝가리안 표기법이 쓰였더군. 그건 이 학교에서 오직 너, 박민우만의 고유한 코딩 스타일 지문이지. 넌 네 천재성을 증명하고 싶었겠지만, 결국 동아리 권력을 쥔 선배들에게 부당하게 기술을 착취당하고 있는 유령일 뿐이야."
민우의 손가락이 주머니 속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의 가장 깊은 결핍과 억울함을 단 한 번의 문체 프로파일링으로 꿰뚫어 본 채원의 지성에, 민우는 지독한 패배감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실소를 터뜨렸다.
"……미치겠네. 진짜 괴물을 만났구나."
민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적대감은 사라지고, 동등한 수준의 지성을 가진 파트너를 마주한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거래를 하자, 임채원." 민우가 채원의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속삭였다. "난 네 정체를 폭로할 생각이 없어. 윤세아의 위선적인 학생회가 학교를 쥐락펴락하는 꼴도 역겨우니까. 대신 내 기술을 대나무숲에 쓰게 해줘. 내 코드가 이 왜곡된 학교 시스템을 어디까지 해체할 수 있는지 보고 싶어. 당장 이 구형 마스터 폰부터 해결하자고. 배터리도 다 죽어가고, 프록시 대역폭도 엉망이잖아."
채원은 민우의 제안 뒤에 숨은 순수한 기술적 증명 욕구와 아웃사이더로서의 소외감을 읽어냈다. 이 천재 코더를 아군으로 삼는다면, 학생회의 전산 추적을 막아줄 완벽한 기술적 방패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채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있어. 우리의 아지트는 이곳이 아냐. 컴퓨터실은 너무 노출되어 있어."
민우는 씩 웃으며 자신의 백팩을 열었다. "이미 봐둔 곳이 있지."
* * *
밤 19시 15분. 폭우가 내리기 직전의 밤하늘이 명율고 교정을 검게 짓눌렀다. 채원과 민우는 본관 외딴곳, 학생들이 기피하는 폐기 구역인 '구 방송부 기계실'의 철문 앞에 섰다.
사각, 사각.
복도 끝에서 절뚝거리는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야간 순찰을 돌던 학교 경비원 강성필 씨였다. 손전등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거칠게 비추었다. 강 씨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시간에 학생들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당장 퇴교해."
채원은 물러서지 않고 강 씨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녀는 긴 앞머리 사이로 강 씨의 낡은 경비원 제복과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았다. 강 씨가 과거 재단의 협박 때문에 일진들의 학교 폭력 현장을 묵인해야 했던 슬픈 사연을 채원은 이미 대나무숲 과거 아카이브를 통해 알고 있었다.
"강 아저씨." 채원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깊었다. "저희가 여기서 무엇을 하든, 아저씨가 지키려 했던 아이들의 평화보다 위험하진 않아요. 3년 전 옥상에서 벌어졌던 일…… 아저씨도 기억하시잖아요. 저희는 그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방과 후 늦은 시간까지 이 방을 쓸 수 있게 모른 척해 주세요. 경비 일지에는 저희 이름을 빼주시고요."
강 씨의 눈동자가 손전등 불빛 뒤에서 크게 흔들렸다. 과거의 죄책감과 슬픔이 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무겁게 흘러내렸다. 강 씨는 깊은 한숨을 쉬며 손전등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 뭉치를 꺼내 구 방송실 철문의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비밀 작업을 묵인받는 대가로 오프라인 아군의 첫 단추를 채운 순간이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낡은 아날로그 송신기 장비들과 구형 콘솔 데스크가 뿜어내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녹슨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민우는 익숙하게 기계실 안쪽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가방에서 자신의 라즈베리 파이 간이 서버와 구형 공유기를 꺼냈다.
"이게 내가 개조한 'VPN 다중 우회 라우터'야." 민우가 공유기에 전원 선을 연결하며 설명했다. 푸른색 LED 표시등이 어두운 기계실 안에서 규칙적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내가 개발한 다중 터널링 펌웨어를 입혔어. 이제 네 마스터 폰의 접속 신호는 이 라우터를 거치는 순간 전 세계 12개국의 가상 IP로 실시간 분산되어 터널링돼. 전산실에서 동시성 분석으로 추적하려고 해도 경로가 사방으로 찢어지니까 역추적이 원천 차단되지."
민우가 정밀 케이블을 채원의 구형 마스터 폰에 연결하자, 스마트폰 화면에 푸른색 보안 서명 궤적이 활성화되며 '5단계: 다중 IP 우회 및 역추적 방어' 프로토콜이 가동되었다. 마침내 대나무숲을 지켜낼 완벽한 기술적 요새가 완성된 것이다. 채원은 푸른 액정 반사광 속에서 민우와 담백한 신뢰의 눈빛을 나누었다.
* * *
같은 시각, 명율고 본관 4층 학생회 전용 회의실.
은은한 아로마 향이 감도는 정숙한 공간 속에서, 전교 1등이자 학생회장인 윤세아가 창밖의 검은 폭우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단정한 단발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모범생의 실루엣 뒤로, 차가운 소시오패스적 이면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나무숲의 폭로로 강서윤의 단톡방이 유출된 사건은 그녀가 구축해 놓은 교내 서열 왕국에 아주 미세하지만 위협적인 균열을 내고 있었다.
스르륵.
학생회 기획부장 최성민이 문을 열고 들어와 두꺼운 파일 바인더를 윤세아의 유리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회장, 지시한 대로 교내 전산망 로그와 대나무숲 업로드 시간대를 대조한 어드민 의심 후보 리스트야." 최성민이 보고했다.
윤세아는 천천히 돌아서며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엑셀 스프레드시트로 정교하게 정리된 이름들을 훑어내렸다. 리스트의 최상단에는 교실 이탈 시간과 트래픽 발생 주기가 겹치는 몇 명의 아웃사이더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선명한 글자들 사이에 '임채원'이라는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윤세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잔인하고도 우아한 미소였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붉은색 색연필을 꺼냈다. 그리고 임채원의 이름 위에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서늘하게 붉은색 선을 그어 내렸다.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한 학생회의 공식적인 사냥이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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