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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동맹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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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명율고등학교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축축했다. 전날 저녁 대나무숲에 폭로된 강서윤 일당의 단톡방 캡처본은 그야말로 교내를 뒤흔든 핵폭탄이었다. 늘 피해자들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군림하던 포식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추악한 모의가 담긴 날것의 대화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전교생이 똑똑히 목격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은 온통 스마트폰 액정에 쏠려 있었다. 수군거림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화살은 이제 피해자인 한소희가 아니라, 가면이 벗겨진 가해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임채원은 평소처럼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채, 교실 벽면에 붙어 소리 없이 걸었다. ‘투명 인간 은신술’은 이런 혼란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아무도 전교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아웃사이더인 채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채원의 예리한 시선은 복도 구석, 매점 자판기 옆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기류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너지? 어제 체육관 뒤에 쥐새끼처럼 숨어서 대숲에 찌라시 보낸 새끼가 너잖아!”


배정태의 거친 목소리가 매점 구석을 울렸다. 그의 큼직한 손이 한 남학생의 멱살을 거칠게 쥐어틀고 있었다. 일진들의 무자비한 빵셔틀이자 괴롭힘의 표적이었던 2학년 김현우였다. 현우는 잔뜩 움츠러든 어깨와 땀에 젖은 앞머리를 흩날리며, 가방끈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짝—!


매서운 마찰음과 함께 현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배정태가 현우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것이다. 현우의 안경이 바닥으로 팽개쳐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아, 아닙니다……. 진짜 저는 어제 방과 후에 바로 집에 갔어요. 진짜예요, 정태야…….”


현우가 바닥을 기며 안경을 찾으려 손을 더듬거렸다. 배정태는 그 모습을 비웃으며 현우의 손등을 군화 같은 실내화 발끝으로 짓밟았다. 강서윤 일당은 자신들의 단톡방 캡처본이 유출된 원인이 내부의 누군가, 혹은 자신들이 부리던 하급 정보원의 배신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놈들은 공포에 질려 미쳐 날뛰며 아무나 잡고 화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채원은 자켓 주머니 속에서 마스터 폰을 만지작거렸다. 액정을 켜자 배터리 표시등이 ‘11%’를 가리키며 깜빡였다. 어젯밤 한소희를 구하기 위해 시간차 예약 폭로를 실행하느라 전력을 거의 다 소모한 상태였다. 함부로 폰을 켤 수도, 데이터를 낭비할 수도 없는 기술적 한계 상황이었다.


‘지금 저 무력을 오프라인에서 직접 말리는 건 자살행위야. 하지만 배정태, 네 녀석의 행동 패턴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기록되어 있어.’


채원은 냉철하게 상황을 프로파일링했다. 배정태는 흥분하면 이성을 잃고 교칙을 위반하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담배를 피우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학교 뒷문 울타리 근처 사각지대로 무단 외출을 감행하곤 했다. 채원은 주머니 속 마스터 폰의 화면 밝기를 최소로 낮춘 뒤, 전산실 보조 윤동현에게 받아두었던 교무실 제보망 우회 포트를 가동했다.


[선도부 긴급 제보: 현재 2학년 배정태 학생이 매점 구석에서 동급생을 폭행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학교 뒷문 무단 외출 및 흡연을 시도하려 이동 중입니다. 현장 적발 가능.]


채원은 단 1%의 배터리를 소모해 교무실 선도부 교사들의 공용 메신저로 예약 메시지를 쏘아 보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현우를 짓밟고 뒷문으로 향하던 배정태의 등 뒤로, 몽둥이를 든 학생 주임 교사의 웅장한 호통 소리가 복도를 찢었다. 배정태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교사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선도부실로 끌려갔다.


순식간에 주변의 학생들이 흩어지고, 매점 구석에는 뺨이 붉게 부어오른 김현우만이 홀로 남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채원은 조용히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현우의 안경을 주워 올렸다. 그리고 현우의 눈높이에 맞춰 안경을 건넸다.


“살고 싶어?”


현우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긴 앞머리 사이로 번뜩이는 채원의 차가운 눈동자가 현우의 시선을 정면으로 묶었다. 현우는 순간 눈앞의 아웃사이더 여학생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압도감과 경외감을 느꼈다. 방금 전 배정태가 어처구니없이 교사에게 잡혀간 타이밍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너를 괴롭히던 놈들의 약점을 쥐어줄게. 대나무숲은 언제나 지켜보고 있어.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


채원은 현우의 교복 주머니에 초소형 보조배터리 모양의 무선 녹음기를 슬쩍 밀어 넣었다. 외삼촌의 수리점에서 개조해 둔 정밀 도청 장비였다.


“놈들의 빵셔틀을 자처해.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모의와 목소리를 이 안에 담아와. 그게 네가 대나무숲과 맺을 그림자 동맹의 조건이야.”


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머니 속 장비를 꽉 쥐었다. 공포보다 더 큰 구원의 동기가 그의 눈빛에 들어찼다. 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채원은 가해자들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엿들을 수 있는 가장 충실한 오프라인 수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 * *


방과 후, 명율고 본관 5층 컴퓨터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컴퓨터실의 회색 책상들을 길게 늘어뜨렸다. 채원은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명율고 컴퓨터실 3번 좌석’에 앉았다. 이곳은 교내 감시카메라의 회전 반경에서 완전히 벗어난 유일한 사각지대였다.


채원은 마스터 폰을 컴퓨터 본체 뒤편의 USB 허브에 연결했다. 배터리 충전과 동시에, 어젯밤 대나무숲 대기열에 남겨진 로그인 세션 로그를 정리해야 했다. 혹시라도 전산실 서버에 어드민의 접속 흔적이 남는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다닥, 다다닥.


채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외부 프록시 웹사이트를 여러 개 경유하여 대나무숲 서버 백오피스에 접속했다. 하지만 무료 프록시의 대역폭 한계 때문에 화면의 로딩 게이지가 지독하게 느린 속도로 차올랐다. 마우스 커서가 모래시계 모양으로 변해 깜빡일 때마다 채원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조금만 더 빠르면 좋을 텐데……. 이 프록시 서버로는 전산실의 실시간 모니터링을 완벽하게 따돌리기 어려워.’


그때였다. 컴퓨터실 반대편 구석 자리에서 기묘한 기계음과 함께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원은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컴퓨터 동아리 ‘디시퍼’의 일원이자 전교에서 가장 기이한 아웃사이더로 통하는 박민우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민우는 두꺼운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모니터 안경 너머로 타오르는 푸른 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정체불명의 녹색 기판과 전선들이 복잡하게 얽힌 소형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박민우가 자체 제작한 ‘라즈베리 파이 패킷 스니퍼’ 장비였다.


민우의 화면 위로 정교한 네트워크 트래픽 그래프가 실시간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명율고 전체 와이파이 망을 통해 유통되는 모든 암호화되지 않은 패킷 흐름을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있었다.


박민우의 손가락이 엔터키를 툭 쳤다. 화면에 붉은색 연결선들이 정렬되며 하나의 데이터 분석 차트가 완성되었다. ‘IP 대역폭 동시성 대조법’.


대나무숲 어드민 페이지에 접속한 외부 가상 IP의 세션 타임스탬프와, 같은 시간대 명율고 컴퓨터실 내부에서 발생한 비정상적인 프록시 우회 트래픽의 대역폭 사용 주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을 찾아내는 알고리즘이었다.


두 타임라인의 교집합이 좁혀지며, 마침내 단 하나의 고유 맥 주소(MAC Address)가 화면 중앙에 붉은색 표적으로 떠올랐다.


[TARGET: PC_ROOM_SEAT_03]


민우의 시선이 붉은 표적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컴퓨터실 안에는 오직 서버 랙의 팬이 돌아가는 서늘한 소음만이 가득했다. 채원은 본체 뒤편에서 마스터 폰을 분리하려 손을 뻗었으나, 순간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동작을 멈췄다.


모니터 사이의 좁은 틈새 너머로, 박민우의 예리하고 차가운 눈동자가 정확히 채원을 향하고 있었다.


민우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채원을 응시했다. 그리고 귀에 걸치고 있던 커다란 헤드폰을 천천히 벗어 목덜미로 슬라이드해 내렸다. 헤드폰이 그의 어깨에 툭 걸치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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