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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이 남긴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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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 지하 서고의 무거운 철문을 밀고 나오자, 복도에는 이미 차가운 저녁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방과 후의 고요함이 내려앉은 명율고등학교의 복도는 붉게 물든 노을빛으로 길게 쪼개져 있었다. 채원은 자켓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바닥 끝에 닿는 구형 스마트폰의 서늘한 감촉, 그리고 액정 너머로 어른거리던 붉은색 배터리 경보등이 채원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3%’


액정이 꺼지기 직전의 깜빡임은 단순한 기계의 방전 경고가 아니었다. 2시간 후면 저 구형 폰에 예약된 한소희에 대한 악성 제보가 대나무숲 페이지에 자동으로 업로드된다. 그렇게 되면 한소희는 중학교 시절 채원이 잃었던 그 친구처럼, 얼굴 없는 군중의 난도질 속에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게 될 터였다. 시간은 채원의 편이 아니었다.


채원은 긴 앞머리 아래로 눈빛을 감춘 채, 구부정한 자세로 2학년 3반 교실을 향해 걸었다. 평소 교실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유령 학생’이라는 타이핑에 걸맞게 소리 없이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채원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먼지 섞인 분필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다행히 교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원가로 흩어졌거나 독서실로 향한 시간이었다. 채원은 서둘러 교실 뒤편 청소도구함 옆 구석자리로 향했다. 교실의 멀티탭과 전원 콘센트들은 대개 교탁 옆이나 교실 뒤편 사물함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채원은 사물함 뒤쪽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벽면 콘센트 구멍이 보였다. 가방 깊숙한 곳에서 늘 들고 다니던 낡은 충전기 선을 꺼내 구형 마스터 폰에 연결하고 콘센트에 꽂았다.


찌르르.


구형 단말기 특유의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화면에 번개 표시가 들어왔다. 배터리 잔량이 3%에서 멈춰 있다가 아주 느리게 4%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채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라도 누군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채원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가방을 올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남아서 자습을 하는 척했지만, 그녀의 예리한 시선은 청소도구함 옆에서 충전 중인 구형 폰의 실루엣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배터리가 8%를 넘어설 무렵, 채원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보급형 개인 스마트폰을 꺼내 대나무숲 대기열 화면을 원격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보합니다. 2학년 3반 한소희, 대치동 학원가 뒤골목에서 원조교제 하는 거 똑똑히 봤습니다. 증거 사진 첨부합니다. 빨리 올려주세요.]


채원은 머릿속으로 이 제보 텍스트의 문장 구조를 아주 느린 속도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과거 사학 재단의 부당 해고에 맞서 싸우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겨준 친필 필기 분석 노트. 그 노트 속에는 아버지가 국어 교사로서 평생 동안 연구했던 인간의 언어적 습관, 즉 ‘문체 지문’에 대한 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사람은 아무리 익명이라는 가면을 써도,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뇌가 지시하는 언어적 지문을 남기기 마련이다.’


채원은 눈을 감고 제보 텍스트의 미세한 균열을 더듬었다.


"나는 걔가 그런 짓 하는 거 절대 용납 않해. 애들 선동해서 착한 척하는 것도 구지 봐줄 필요 없고..."


‘않해’와 ‘구지’.


채원의 감각이 번뜩였다. 이것은 단순한 오타가 아니었다. 한글 맞춤법에서 ‘안 해’를 ‘않해’로 잘못 인지하는 버릇, 그리고 ‘굳이’를 소리 나는 대로 ‘구지’라고 적는 습관은 아주 고질적이고 반복적인 인지적 결함에서 비롯된다. 자판상의 거리를 대조해 보아도 쿼티(QWERTY) 키보드나 천지인 자판에서 ‘ㄴ’과 ‘ㄶ’, ‘ㄷ’과 ‘ㅈ’은 실수로 눌러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았다. 즉, 작성자는 머릿속에서 이 단어들의 맞춤법을 실제로 그렇게 알고 쓰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띄어쓰기 습관도 특이했다. ‘봐줄 필요 없고’를 띄어쓰기 없이 ‘봐줄필요없고’라고 붙여 쓰는 방식.


채원은 감았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교실 앞문 옆에 걸린 녹색 알림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번 주 주간 학급 청소 구역과 수행평가 일정이 적힌 학급 게시판이 있었다.


채원은 소리 없이 알림판 앞으로 다가갔다. 알림판 구석에는 이번 주 주번이자 3반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일진 대장, 강서윤이 분필로 휘갈겨 쓴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각하는 애들 청소 구지 피하려고하지마라. 나 봐주지 않해.]


순간 채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알림판 유리에 반사된 노을빛 속에서, 흰색 분필로 쓰인 투박한 글씨들이 머릿속 제보 텍스트와 완벽하게 겹쳐졌다.


‘구지’.

‘피하려고하지마라’ (동사와 보조 동사의 무단 붙여쓰기).

‘않해’.


이것은 완벽한 문체적 일치였다. 타이핑 매체와 아날로그 분필이라는 형식의 차이만 있을 뿐, 문장의 호흡과 어휘를 선택하는 무의식적인 뇌의 지문은 단 한 사람, 강서윤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서윤은 한소희의 평판을 짓밟아 학교에서 매장하기 위해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대나무숲에 조작된 제보를 투고했던 것이다.


채원은 전율을 느끼며 뒤편 청소도구함으로 신속히 걸어갔다. 충전기에서 구형 마스터 폰을 분리했다. 배터리는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스터 폰의 관리자 화면에 접속했다. 그리고 한소희 저격글의 상태를 ‘예약 업로드’에서 ‘보류(Hold)’ 상태로 변경했다. 화면에 푸른색으로 ‘보류 완료’라는 팝업이 뜨는 순간, 교실 앞문이 드르륵 하고 거칠게 열렸다.


“야, 내 가방 어디 있냐?”


날카롭고 오만한 목소리. 강서윤이었다. 그녀의 뒤로 심복인 신미소와 덩치 큰 배정태가 껌을 씹으며 교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채원은 찰나의 순간에 마스터 폰의 화면을 끄고 체육복 자켓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책상에 바짝 엎드려 ‘투명 인간 은신술’을 가동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극도의 텐션이 교실 안을 지배했다.


강서윤은 교실 뒤편 사물함에서 자신의 명품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정확히 18시 01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예약 제보가 올라가기를 기대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강서윤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화면을 거칠게 새로고침했다.


“……어? 뭐야?”


강서윤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아무런 새 글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왜 안 올라와? 분명 6시에 올라가게 해놨는데.”


그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교실 구석에 엎드려 있는 채원의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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