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왕관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구 방송부 기계실의 공기는 차갑다 못해 시릴 정도였다. 메인 컴퓨터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 광선만이 임채원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령처럼 비추고 있었다. 방금 전, 한밤중의 전산실 서버룸 침투전 과정에서 발생한 과부하로 인해 진공관식 무선 송신기의 메인 트랜지스터 하나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타버렸다. 기계실 구석에는 타버린 실리콘 냄새가 여전히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송신기는 당분간 못 써.”
박민우가 헝클어진 더벅머리를 쓸어 넘기며 툴툴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지트의 핵심 장비 중 하나를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과, 동시에 목숨을 걸고 전산실에서 탈취해 온 이메일 패킷 데이터에 대한 흥분이 교차하고 있었다.
“교내 무선 방송망을 강제로 점거하는 대형 송출은 불가능해졌다는 뜻이야. 트랜지스터 소자를 새로 구해다 납땜하려면 최소 사흘은 걸려.”
“상관없어.”
채원은 시선을 모니터 화면에서 떼지 않은 채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의 안구는 장시간의 디코딩 작업으로 인해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관자놀이 부근에는 둔탁한 두통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뇌는 그 어느 때보다 명석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번엔 학교 전체를 뒤흔들 대형 확성기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바늘 하나면 돼.”
채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복호화가 완료된 ‘학생회 예산 집행 세부 내역서’ 엑셀 파일의 속성 창이었다. 최초 작성자 시스템 식별 코드 영역에 선명하게 박힌 이름, ‘유승우’.
유승우. 학생회의 2인자이자, 전교 1등 윤세아의 완벽한 모범생 가면에 가려진 온갖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던 가장 충직한 오른팔.
“공범들의 신뢰라는 건 생각보다 아주 취약해.”
채원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과거 아버지가 남겨준 필기 분석 노트에서 읽었던 인간 심리의 어두운 본질이 담겨 있었다.
“특히 한쪽이 일방적인 권력을 쥐고 다른 한쪽을 부리는 관계일수록 더 그렇지. 유승우는 윤세아의 그림자로 살면서 늘 불안했을 거야. 윤세아가 전교 1등을 유지하고 명문대 수시 포트폴리오를 짜는 동안, 자신은 온갖 행정 비리와 예산 횡령의 실무자로 손을 더럽히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을 보호할 ‘안전장치’를 만들었겠지. 이 이중 장부의 최초 작성자 명의를 자신의 시스템 ID로 등록해 둔 것처럼.”
민우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채원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좁혔.
“그 유승우의 안전장치를 역으로 덫으로 쓰겠다는 거구나. 어떻게 할 생각인데?”
“6단계: 인지 심리 유도 및 텍스트 덫.”
채원은 주머니에서 대나무숲 마스터 스마트폰을 꺼냈다. 배터리는 간신히 충전되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우스로 엑셀 파일의 속성 창을 정밀하게 캡처했다. 유승우의 시스템 ID인 `ysu_vice_president_myeongyul̀이 작성자로 명확히 표시된 영역,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이중 장부의 극히 일부분인 ‘사설 컨설팅 기획료 - 50,000,000원’이라는 문구가 담긴 행 한 줄만을 아주 좁게 잘라냈다.
장부 전체를 올리면 윤세아와 홍상식 교감은 즉각 법적 방어막을 치고 대형 로펌을 동원해 대나무숲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아주 일부분의 메타데이터 캡처본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채원은 대나무숲 관리자 대기열 권한을 가동했다. 그리고 비공개 대기열 화면의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해당 캡처본 이미지를 ‘업로드 보류’ 상태로 등록했다.
이 대기열은 일반 학생들은 볼 수 없지만, 대나무숲의 서버 필터링 기준을 감시하기 위해 학생회 기획부에서 은밀히 백도어로 모니터링하고 있는 영역이었다. 특히 학생회 기획부의 조유진은 윤세아의 독선적인 지배에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며 대나무숲의 움직임을 매일 사시나무 떨듯 감시하는 내부 고발자 후보였다.
“조유진은 이걸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을 거야.”
채원의 손가락이 마스터 폰의 엔터키를 가볍게 탭했다. 캡처본이 대나무숲 비공개 대기열에 안착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횡령의 증거, 그것도 부회장 유승우의 명의가 찍힌 문서가 어드민의 손에 들어가 언제든 폭로될 준비를 마쳤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즉각 윤세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할 수밖에 없어.”
“그럼 윤세아는 유승우가 자신을 배신하고 백업본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겠네?”
민우의 물음에 채원은 차가운 미소로 화답했다.
“정확해. 그리고 유승우는 유승우대로, 윤세아가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르려 한다고 오해하게 될 거야. 의심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데는 단 한 조각의 텍스트면 충분해.”
***
다음 날 아침, 명율고등학교 본관 복도는 기묘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2학년 3반 교실 뒤편 창가 자리. 채원은 평소처럼 존재감을 극도로 지운 ‘투명 인간 은신술’ 상태로 자리에 앉아 국어 교과서를 펼쳐 들고 있었다. 긴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시선은 교실 중앙을 향했다.
그곳에는 정보원 김현우가 자리에 앉아 무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제 매점 뒤 벤치에서 배정태에게 밀쳐져 다친 오른쪽 무릎에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가해자 배정태는 교실 앞문 근처에서 팔짱을 낀 채 현우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단톡방 유출 사건 이후 내부에 첩자가 존재함을 직감한 배정태의 눈빛에는 굶주린 맹수 같은 의심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자켓 안감 깊숙한 곳에는 채원이 선물한 보조배터리 위장형 ‘초소형 고음질 보이스 레코더’ 볼펜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현우의 손끝이 자켓 안감을 미세하게 스칠 때마다, 채원은 소리 없는 연대의 숨결을 느꼈다.
1교시 자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 교실 앞문이 거칠게 열리며 학생회 기획부원 조유진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유진은 교실 중앙에 앉아 있던 유승우에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회장님…… 회장님이 지금 즉시 본관 4층 전용 회의실로 올라오시랍니다. 아주…… 아주 급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유승우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전산 제어용 태블릿을 챙기며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아침부터 시끄럽게.”
“그게…… 대나무숲 비공개 대기열에…….”
조유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유승우는 그녀의 비정상적인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단정한 가르마 아래로 차가운 안광이 번뜩였다.
유승우가 교실을 나서자마자, 채원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교실 앞문 근처에 서 있던 김현우와 눈을 맞추었다. 채원은 긴 앞머리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현우야. 움직여.’
현우는 무릎의 통증을 참아내며 웅크린 자세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배정태가 그의 뒤를 쫓으려 몸을 일으켰으나, 채원이 일부러 교과서 뭉치를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뜨리며 복도로 나서는 배정태의 발걸음을 0.5초간 지체시켰다. 그 찰나의 공백 동안 현우는 본관 서편 비상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
본관 4층, 학생들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학생회 전용 회의실 앞 복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흐린 하늘 때문에 복도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스름한 음영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현우는 채원이 미리 계산해 준 ‘교내 CCTV 사각지대 타임테이블’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소리 없이 복도 구석의 방송 기자재 보관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
보관실 내부의 좁은 환기구 틈새는 학생회 전용 회의실의 얇은 석고보드 벽면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날로그식 방음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낡은 건물 특성상, 환기구에 귀를 대면 회의실 내부의 목소리가 증폭되어 들려왔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교복 자켓 안감에서 볼펜형 초소형 고음질 보이스 레코더를 꺼냈다. 그는 볼펜 상단의 캡을 미세하게 눌렀다. 붉은색 초소형 LED 불빛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한 번 깜빡인 후, 선명한 녹음 세션이 활성화되었다. 현우는 볼펜의 마이크 팁을 환기구 철망 사이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고 숨을 죽였다.
벽 너머에서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윤세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찢듯 울려 퍼졌다.
“이게 뭐야, 유승우? 설명해 봐.”
윤세아는 회의실 중앙 테이블 위에 자신의 최신형 태블릿 화면을 거칠게 내던졌다. 화면에는 대나무숲 비공개 대기열에서 조유진이 캡처해 온 이중 장부의 메타데이터 속성 창이 띄워져 있었다.
유승우는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중앙에 푸른색 음영으로 강조된 자신의 시스템 ID, `ysu_vice_president_myeongyul̀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걸…… 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어? 아니, 이게 왜 대나무숲 대기열에 떠 있는 거지?”
“내가 묻고 있잖아!”
윤세아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녀의 완벽하던 모범생 가면은 온데간데없고, 눈동자에는 통제권을 잃은 인간 특유의 히스테릭한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홍상식 교감 선생님과 나, 그리고 사설 컨설팅 학원 원장님 셋만 알고 있어야 할 예산 집행 내역서야. 그런데 왜 이 파일의 최초 작성자가 너로 되어 있지? 왜 네 개인 시스템 ID가 이 더러운 장부에 낙인처럼 박혀 있느냐고!”
유승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머릿속에서 채원이 설계한 인지적 편향의 덫이 무서운 속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대나무숲 어드민이 내 전산망을 해킹해서 이걸 빼냈을 리는 없어. 그렇다면…….’
유승우의 시선이 윤세아의 차가운 눈동자에 머물렀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거대한 피해망상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최근 대나무숲의 추적망이 도서관 서고 근처까지 좁혀왔을 때, 윤세아는 자신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선도부원들을 동원해 가방 수색을 지시했었다. 어민의 존재에 극도로 불안해하던 윤세아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모든 예산 횡령의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르려는 공작을 이미 시작한 것이 아닐까?
이 이중 장부 캡처본이 대나무숲 대기열에 올라온 것 자체가, 윤세아가 자신을 협박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 어드민을 사칭해 파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하…… 결국 이거였나?”
유승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목소리에서 겉으로 유지하던 비굴한 복종의 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날것의 적대감이 뿜어져 나왔다.
“윤세아, 네가 날 먼저 팔아넘기려고 판을 짜둔 거였어. 대나무숲 어드민의 해킹을 핑계 대면서, 문제 생기면 이 이중 장부 작성자인 나 유승우가 독단적으로 예산을 전용했다고 교무실에 찌르려고 했던 거지?”
“무슨 헛소리야! 네가 멍청하게 흔적을 남겨놓고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헛소리? 내가 네 밑바닥 닦아주는 사냥개 노릇을 몇 년 동안 했는데, 이제 와서 꼬리를 자르시겠다?”
유승우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윤세아의 멱살을 잡을 듯 상체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 가득 찬 분노와 배신감이 회의실의 차가운 공기를 압도했다. 환기구 너머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현우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텐션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녹음기 수신 다이얼의 데시벨 그래프가 붉은색 정점을 향해 요동치고 있었다.
“입 조심해, 윤세아. 나 혼자 안 죽어.”
유승우가 이를 갈며, 낮고도 묵직한 폭탄 같은 선언을 벽 너머로 내던졌다.
“네가 그동안 전교 1등 유지하려고 대치동 미래가치 컨설팅 학원에서 기말고사 수학 시험지 유출받은 건까지 전부 터뜨려 버리기 전에, 그 오만한 주둥이 닥치고 대책이나 세워!”
회의실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승우가 내뱉은 ‘시험지 유출’이라는 단어는, 그들이 쌓아 올린 가짜 왕관을 단번에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핵폭탄급 자백이었다.
윤세아는 숨을 흡 들이쉬며 뒤로 물러섰고, 유승우는 거칠게 문을 열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굉음과 함께, 방송 기자재 보관실 안의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볼펜형 녹음기의 전원을 껐다. 그의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해자 연합의 왕관이 완전히 갈라지는 소리가, 그의 손안에 쥐어진 초소형 녹음기 내부에 완벽한 음향 물증으로 박제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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