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가의 그림자
2교시 정보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컴퓨터실의 무거운 공기를 깨뜨리며 울려 퍼졌을 때, 임채원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사방에서 학생들이 의자를 끄는 소리와 웅성거림이 교차하는 가운데, 채원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전 최현석 실장에게 이끌려 컴퓨터실에서 영구 퇴출당한 오민석. 그가 문밖으로 밀려나기 직전, 떨리는 손으로 쥔 스마트폰 화면에서 깜빡이던 금빛 로고가 채원의 망막에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대치동 미래가치 입시 컨설팅.’
명율고등학교라는 폐쇄적인 여고 왕국을 지배하는 학생회장 윤세아. 그녀가 전교 1등의 왕관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비결이 교실 안의 순수한 노력 따위가 아님을 증명하는 움직이지 않는 단서였다. 강남 대치동의 가장 은밀한 사설 브로커와 학교 행정의 권력자가 결탁한 추악한 삼각 커넥션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채원은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존재감을 지운 채 컴퓨터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는 학생들은 아무도 도서부의 아웃사이더인 채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본관 외딴곳, 폐쇄된 구역의 무거운 철문 앞으로 향했다.
철문 틈새로 손을 뻗어 경비원 강성필이 숨겨둔 놋쇠 마스터키를 만지작거리며, 채원은 구 방송부 기계실의 문을 열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소형 라즈베리 파이 서버의 냉각팬이 윙윙거리는 아지트 안에는, 이미 컴퓨터 동아리의 천재 코더 박민우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오민석 녀석, 완전히 날아갔더군.”
민우가 헤드폰을 목에 걸치며 씩 웃었다. 채원의 정교한 키로깅 우회 타이핑과 서하은의 유리창 반사 크로키 스케치라는 아날로그 역공에 오민석은 단 한 줄의 비밀번호도 건지지 못한 채 전산실에서 영구 퇴출당했다.
“오민석은 단순한 사냥개였어.”
채원이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이 쫓겨나기 직전 폰 화면을 봤어. 대치동 미래가치 입시 컨설팅의 로고가 떠 있더군. 윤세아가 기말고사 시험지를 유출받는 구체적인 학원가 거점이 바로 거기야.”
민우의 안경 너머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미래가치 입시 컨설팅……? 대치동에서 극소수 상위권 학생들의 생기부와 성적을 기획해 주는 고액 사설 브로커잖아. 거긴 외부 네트워크 방화벽이 기업 수준으로 두꺼워서 원격 해킹으로는 침투가 불가능해.”
“원격이 불가능하다면 오프라인에서 꼬리를 잡아야지.”
채원은 팔짱을 끼며 모니터 화면에 명율고 평면도를 띄웠다.
“오민석이 퇴출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윤세아는 극도로 불안해질 거야. 자신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전산실 전초기지가 날아갔으니까. 이 타이밍에 그녀는 분명 부회장 유승우를 불러내 다음 대책을 논의할 거야. 교사들의 눈과 CCTV가 닿지 않는 완벽한 오프라인 사각지대에서.”
채원의 손가락이 평면도 상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본관 뒤편, 매점 옆에 위치한 노후한 나무 벤치 구역이었다.
“명율고 매점 앞 벤치.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직후에는 학생들이 몰려 시끄럽지만, 수업이 시작된 직후나 자습 시간 직전에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이 흐르는 사각지대지. 윤세아와 유승우는 보통 중요한 모의를 할 때 그곳을 이용해.”
“하지만 우리가 직접 가서 들을 수는 없잖아. 유승우가 선도부원들을 깔아두고 주변 접근을 통제할 텐데.”
민우의 지적에 채원은 주머니에서 무선 메신저를 켰다.
“우리가 갈 필요는 없어. 우리에겐 배정태의 감시망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가장 충실한 오프라인 수족이 있으니까.”
채원은 정보원 김현우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채원]: 현우야. 지금 매점 뒤 벤치 자판기 틈새에 내가 준 볼펜을 매설해. 윤세아와 유승우가 움직일 시간이야.
몇 분 뒤, 아지트 문이 조용히 열리며 김현우가 들어섰다. 뺨의 부기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어깨를 웅크린 소심한 자세였다. 하지만 채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빛에는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채원은 현우의 교복 자켓 안감에 바느질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초소형 고음질 보이스 레코더’ 볼펜을 건넸다.
“배정태 무리가 매점 주변에 있을 수도 있어. 조심해.”
“응…… 선배가 나를 구해줬잖아. 이 정도 심부름은 아무것도 아니야.”
현우는 볼펜을 꽉 쥔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 없이 아지트를 나섰다.
점심시간 직전, 매점 주변은 빵을 사려는 학생들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현우는 매점 아주머니 장미숙에게 빵을 사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매점 뒤편 벤치 구역으로 향했다. 자판기 옆 좁은 사각지대. 현우가 볼펜형 녹음기를 자판기 하단의 철제 틈새에 밀어 넣으려던 찰나였다.
“어이, 빵셔틀. 여기서 뭐 하냐?”
거칠고 껄렁한 목소리가 현우의 등 뒤를 때렸다. 일진 행동대장 배정태였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노을빛을 가로막아 현우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현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공포를 느꼈지만, 채원이 미리 알려준 알리바이를 떠올렸다.
“어…… 정태야. 매점 아주머니가 자판기 뒤에 떨어진 동전 좀 주워달라고 하셔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저리 꺼져.”
배정태가 현우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현우는 바닥에 넘어지며 무릎이 쓸려 교복 바지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지만, 현우는 넘어지는 찰나의 순간에도 손끝의 감각을 집중해 볼펜형 녹음기를 자판기 틈새 깊숙한 곳으로 완벽하게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죄송합니다……”
현우가 무릎을 움켜쥐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매점 구석으로 사라진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단정한 생머리에 학생회장 배정을 반짝이는 윤세아와 부회장 유승우가 벤치 주변으로 걸어 들어왔. 유승우는 선도부원들에게 주변 10미터 이내의 학생 접근을 차단하라는 무언의 수신호를 보낸 뒤, 윤세아의 옆에 섰다.
자판기 틈새에 숨겨진 초소형 녹음기의 마이크가 두 사람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채집하기 시작했다.
“오민석이 잘렸어.”
유승우의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먼저 정적을 깨뜨렸다.
“알고 있어. 멍청한 녀석, 키로거 따위를 쓰다가 최현석 실장에게 꼬리를 잡히다니.”
윤세아의 목소리에는 동료의 몰락에 대한 동정심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직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에 대한 신경질적인 짜증만이 묻어났다.
“대나무숲 어드민 녀석, 보통이 아니야. 오민석의 장비를 역으로 고발한 스케치 흔적을 보니 미술부 녀석들까지 포섭한 게 분명해. 이러다가 기말고사 준비 건까지 털리는 거 아냐?”
유승우의 우려 섞인 질문에 윤세아는 코웃음을 쳤다.
“걱정 마. 미래가치 입시 컨설팅룸에서 받아온 수학 서술형 가안은 이미 내 손에 있어. 홍상식 교감 선생님이 직접 인쇄소 출고 전에 검수한 원안이니까. 시험지 유출 흔적은 대치동 사설 서버에만 암호화되어 보관되어 있어. 교내 인트라넷을 아무리 뒤져봐야 흔적조차 안 나올 거야.”
“그래도 조심해. 어드민 녀석이 미래가치라는 이름이라도 흘리는 순간,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
“그전에 어드민의 숨통을 끊어놓으면 돼.”
윤세아의 차가운 음성이 녹음기 속에 선명하게 박혔다.
방과 후, 김현우는 일진들의 눈을 피해 자판기 밑에서 녹음기를 무사히 수거하여 구 방송부 기계실 아지트로 돌아왔다. 현우의 쓸린 무릎을 본 채원은 말없이 보건실 약상자에서 소독약을 꺼내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고마워, 현우야. 네가 큰일을 해냈어.”
채원의 따뜻한 격려에 현우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민우가 녹음기의 잭을 고성능 분석 PC에 연결했다. 매점 소음과 바람 소리가 뒤섞인 날것의 음성 파일이 재생되었다. 민우는 즉각 오디오 주파수 노이즈 필터링 스크립트를 가동했다. 시끄러운 잡음들이 실시간으로 지워지며, 윤세아와 유승우가 언급한 ‘미래가치 입시 컨설팅룸’과 ‘홍상식 교감’이라는 단어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주파수 파형으로 추출되었다.
“확실하네. 윤세아와 홍상식 교감의 시험지 유출 거래의 실체가 이 도청 음성으로 입증되었어.”
민우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채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도청 음성은 대중을 흔드는 여론전의 무기는 될 수 있어도, 사법적 평판이나 법적 징계의 공식 증거로 채택되기엔 한계가 있어. 윤세아 부친의 법조계 인맥이 불법 도청이라며 증거 능력을 기각시킬 테니까. 우리는 미래가치 사설 서버와 홍상식 교감 간의 ‘디지털 전송 원본 패킷’을 직접 확보해야 해.”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대치동 미래가치 컨설팅 학원의 내부 네트워크 IP 대역을 역추적하는 특수 스캔 프로그램을 구동한 것이다.
화면 위로 수백 줄의 네트워크 데이터 스트림이 어지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민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쉴 새 없이 미끄러졌고, 아지트 내부에는 오직 컴퓨터 팬이 돌아가는 차가운 소음만이 가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민우의 손가락이 딱 멈추었다. 그의 안경 액정에 붉은색 경고 신호가 반사되며 모니터 화면 전체가 기괴한 주파수 노이즈로 출렁였다.
“……채원아, 이것 봐.”
민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래가치 컨설팅 학원의 외부 통신망 IP를 역추적해서 암호화 패킷 경로를 분석하고 있었는데…… 기이한 실시간 데이터 전송 흔적이 잡혔어. 학원 메인 서버가 매일 밤 특정 시간마다 명율고 내부의 어떤 비공개 네트워크 계정과 대량의 암호화 파일을 주고받고 있어.”
채원이 상체를 숙이며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푸른색 액정 빛이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내려앉았다.
화면 중앙, 암호화된 터널링 통신 세션의 발원지와 수신지 고유 주소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신지 계정의 프로필 메타데이터 영역에 등록된 비공개 개인 메일 주소.
[Owner: [email protected]]
명율고등학교 행정의 실권자이자 성적 지상주의의 독재자, 홍상식 교감의 개인 비밀 메일 계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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