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하는 타이핑
타닥, 타다닥. 타닥.
명율고등학교 본관 5층 컴퓨터실. 수십 대의 냉각팬이 웅웅거리는 기계음 사이로 건조한 키보드 타건음이 불규칙하게 섞여 들었다. 창밖에는 진눈깨비가 그친 뒤의 회색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실내의 미지근한 난방 열기는 학생들의 졸음을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임채원의 손끝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가 앉은 컴퓨터실 3번 좌석. 그 화면에는 하얀 메모장 프로그램이 크게 켜져 있었다.
‘타이핑해라, 어드민.’
뒤편 전산 제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오민석의 시선이 채원의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오민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모니터에는 채원의 키보드 입력 신호를 실시간으로 가로채는 수신 프로그램이 구동 중일 것이다. 본체 뒤편에 교묘하게 끼워진 검은색 플라스틱 동글, ‘하드웨어 키로거 USB’가 보내오는 신호를 기다리면서.
채원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오민석의 덫은 완벽해 보였다. 키보드 자판을 누르는 물리적 신호를 가로채는 장치이기에, 그 어떤 정교한 비밀번호를 입력하더라도 고스란히 오민석의 서버에 텍스트 파일로 저장될 터였다.
하지만 채원은 아버지가 남겨준 필기 분석 노트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기계는 정해진 규칙대로만 작동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변칙적인 행동 패턴을 완벽히 계산할 수 없다.’
채원은 나지막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늘 점심 메뉴는 매점 떡볶이가 좋겠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는 매운 음식이 당기니까. 은빛 수면처럼 차가운 날씨 속에서 0시 13분, 5초의 정적을 견디는 일은 생각보다 지루하다.]
메모장 화면 위로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낙서 같은 문장들이 빠르게 적혀 내려갔다.
그 시각, 전산 데스크에 앉아 있던 오민석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모니터에 연결된 키로거 수신 창에는 채원이 타이핑한 텍스트가 실시간으로 입력되고 있었다.
“뭐야……? 일기를 쓰는 건가?”
오민석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드민의 마스터 비밀번호가 입력되기만을 기다리던 그의 눈에 초조함이 서렸다.
하지만 오민석은 알지 못했다. 채원의 진짜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하드웨어 키로거는 오직 키보드의 물리적 자판이 눌리는 ‘스캔 코드’만을 기록한다. 즉, 운영체제(OS) 내부의 클립보드 메모리 영역에서 일어나는 데이터 복사나 마우스 드래그 동작은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채원은 마우스를 쥐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이 쓴 문장 중 오탈자를 수정하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그녀가 타겟으로 삼은 단어는 문장 속에 흩어져 있는 알파벳과 숫자 조각들이었다.
채원은 먼저 ‘은빛’의 ‘은’(eun) 영역을 마우스로 드래그했다. 그리고 조용히 키보드의 [Ctrl] 키와 [C] 키를 동시에 눌렀다.
틱.
오민석의 키로거 수신 창에는 오직 `[Ctrl]+[C]`라는 기능 키 신호만 기록될 뿐, 어떤 글자가 복사되었는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채원은 브라우저 하단 작업 표시줄 구석에 아주 작게 숨겨둔 대나무숲 어드민 로그인 창의 패스워드 입력 칸을 마우스로 클릭했다. 그리고 `[Ctrl]+[V]`를 눌렀다. 클립보드에 임시 저장되어 있던 ‘은’(eun)이라는 문자열이 비밀번호 첫 칸에 소리 없이 박혔다.
오민석의 화면에는 다시 `[Ctrl]+[V]`라는 무의미한 명령 신호만 찍혔다.
채원의 손놀림은 정교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메모장으로 돌아와 ‘수면’의 ‘수’(su)를 드래그해 복사한 뒤 패스워드 창에 붙여넣었다. 이어서 문장 끝자락에 적어둔 숫자 ‘0’, ‘1’, ‘3’, ‘5’를 마우스로 하나씩 드래그하여 차례대로 복사하고 붙여넣었다.
‘eun’, ‘su’, ‘0’, ‘3’, ‘1’, ‘5’.
3년 전 숨진 전임 어드민 이은수 선배의 이름과 기일을 조합한 마스터 패스워드 ‘eunsu0315’가 단 한 번의 직접적인 타이핑도 없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채원은 마지막으로 로그인 버튼을 마우스 좌클릭으로 눌렀다. 엔터키조차 누르지 않는 철저함이었다.
스르륵.
모니터 화면 구석에서 대나무숲 마스터 관리자 대시보드가 활성화되었다. 접속 성공. 오민석의 키로거 수신 창에 남은 것은 조잡한 떡볶이 낙서 문장과 무수히 반복된 `[Ctrl]+[C]`, `[Ctrl]+[V]`의 흔적뿐이었다. 오민석은 어드민의 패스워드를 낚아채기는커녕, 채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덫은 무력화했다. 이제 네 차례야, 오민석.’
채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화면을 내렸다. 이제 이 전산 스파이를 전산실에서 완벽하게 매장할 차례였다. 채원은 직접 키로거를 뽑아내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는 확실한 아날로그 물증이 있었다.
드르륵.
마침 컴퓨터실 앞문이 열리며, 미술부의 서하은이 수행평가용 태블릿을 반납하기 위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은이는 언제나처럼 손가락 끝에 연필가루를 묻힌 채, 품에는 낡은 크로키북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하은은 존재감을 지우고 앉아 있는 채원의 3번 좌석 옆을 천천히 지나쳤다. 그리고 채원의 책상 모퉁이에 자신이 들고 있던 크로키북의 한 페이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떨어뜨리듯 얹어놓고 지나갔다. 미술실 뒤편 준비실에서 채원과 나눈 은밀한 약속의 결과물이었다.
채원은 조심스럽게 크로키북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날카롭고 정밀한 연필 스케치로 컴퓨터실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었다. 특히, 컴퓨터실 뒤편 대형 유리창에 반사된 3번 좌석 본체 뒤편의 구도가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유리창의 반사광을 이용해 그려진 스케치 속에는, 오민석이 주머니에서 검은색 USB 동글을 꺼내 채원의 컴퓨터 본체 뒤편 포트에 몰래 꽂아 넣는 비열한 표정과 손동작이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박제되어 있었다. 오민석의 옷에 달린 학생회 배지와 손가락의 지문 굴곡까지 묘사된, 완벽한 아날로그적 시각 증거였다.
채원은 자신의 보급형 개인 스마트폰을 꺼내 사각지대 아래에서 스케치북 페이지를 고화질로 촬영했다.
그리고 대나무숲 관리자 세션을 통해 교내 정보센터장 최현석 실장의 비공식 시스템 제보 메일로 해당 사진과 함께 짧은 텍스트를 전송했다.
[제보: 컴퓨터실 관리 보조 오민석 학생이 개인 정보 탈취용 하드웨어 키로거 USB를 3번 좌석 본체 뒤편에 무단 설치하여 학생들의 비밀번호를 사찰하고 있습니다. 첨부된 미술부 목격 스케치와 본체 뒤편의 물리 장비를 즉시 확인해 주십시오.]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른 지 채 3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쿵!
컴퓨터실 뒷문이 거칠게 열리며, 단정한 남방 차림에 전산실 키패드를 쥔 교내 정보센터장 최현석 실장이 성난 황소처럼 안으로 걸어 들어왔. 그의 차가운 눈빛이 전산 데스크의 오민석을 향해 꽂혔.
“오민석. 자리에서 일어나.”
최현석 실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컴퓨터실의 기계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오민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실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최현석 실장은 대답 대신 채원이 앉은 3번 좌석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채원은 겁먹은 유령 학생처럼 몸을 웅크렸다. 최 실장은 본체 뒤편으로 손을 뻗어, 오민석이 심어두었던 검은색 하드웨어 키로거 USB를 단번에 뽑아냈다.
“이거, 네가 장착한 장치 맞지? 전산실 보안 규정 위반 및 타인 정보 무단 수집 혐의다.”
최 실장이 붉은색 LED가 깜빡이는 동글을 오민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오민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어…… 어? 그건 제 게 아닙니다! 누군가 모함한 겁니다!”
“모함? 미술실 관찰 스케치에 네 설치 장면과 시간대, 그리고 이 장비에 남은 네 지문까지 전산실 포렌식으로 대조하면 바로 나온다. 더 구차하게 변명할 생각 마라. 당장 짐 싸서 나가. 전산실 관리 보조 자격 박탈이다. 선도위원회 처분은 별도로 내려질 거다.”
최 실장의 단호한 선언에 오민석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컴퓨터실 안의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오민석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민석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가방을 챙겼다.
그는 쫓겨나듯 뒷문으로 걸어가며 분노에 찬 눈빛으로 컴퓨터실 내부를 쏘아보았다. 특히 3번 좌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채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채원은 존재감을 지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앞머리 그늘 사이로 오민석의 마지막 움직임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오민석이 거칠게 뒷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분노를 참지 못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가 화면을 터치하는 순간, 밝게 켜진 액정 화면이 채원의 망막에 정밀하게 포착되었다.
오민석의 스마트폰 화면 중앙에 뜬 알림 팝업 창.
그곳에는 기하학적인 그리드 문양과 함께 금빛으로 장식된 아주 고급스러운 로고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치동 미래가치 입시 컨설팅 — 기말고사 스케줄러 동기화 완료]
그 로고는 명율고등학교 내부의 비리가 아닌, 대한민국 사학 재단의 가장 깊은 음부이자 윤세아가 전교 1등을 유지해 온 배후의 거점, 강남 대치동의 ‘사설 컨설팅 학원’의 공식 마크였다.
채원의 심장이 묵직한 전율과 함께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오민석이라는 사냥개를 쫓아낸 자리에, 마침내 윤세아의 왕국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거점의 그림자가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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