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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거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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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가 그친 명율고의 아침은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는 학생들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교정 곳곳에는 여전히 강서윤의 강제 전학 처분을 둘러싼 웅성거림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임채원에게는 그 가십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도서관 지하 서고, 그 어둡고 퀴퀴한 먼지 속에서 복원해 낸 기말고사 수학 시험지 파지 조각들. 그리고 그 하단에 선명하게 찍혀 있던 교감 홍상식의 파란색 볼펜 서명 습관.


‘윤세아와 홍상식 교감의 기말고사 시험지 유출 거래.’


그것은 단순한 일진들의 괴롭힘을 넘어, 학교의 심장부와 재단 고위층이 결탁한 거대 카르텔의 썩은 냄새였다. 전교 1등이라는 윤세아의 왕관이 사실은 사전에 유출된 시험지를 통해 조작된 결과물이라는 확신이 채원의 머릿속에 이정표처럼 박혀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학교의 실질적 권력자인 교감과 완벽한 모범생의 가면을 쓴 학생회장이었다.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심증이 아닌, 법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디지털 물증이 추가로 필요했다.


“자, 다들 컴퓨터 켜고 오늘 실습할 C++ 기초 예제 파일 다운로드 받아라.”


정보 교사의 건조한 목소리가 컴퓨터실의 적막을 깨웠다.


본관 5층 컴퓨터실. 수십 대의 컴퓨터 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지근한 열기와 따뜻한 플라스틱 냄새, 그리고 웅웅거리는 냉각팬 소음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채원은 평소처럼 존재감을 지우는 ‘투명 인간 은신술’을 발휘하듯, 긴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구부정한 자세로 컴퓨터실 3번 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교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창가 구석 자리이자,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채원은 마우스에 손을 올린 채, 힐끗 컴퓨터실 뒤편을 살폈다.


학생회 전산부 자켓을 입은 오민석이 전산 제어 데스크 뒤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서버 장비를 점검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빛은 주기적으로 채원이 앉은 3번 좌석의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다. 오민석은 전교 1등 윤세아의 충실한 기술적 사냥개였다.


‘윤세아가 움직였어.’


채원은 직관적으로 상황을 간파했다. 지난밤 대나무숲이 가상 세션 난반사 역공을 통해 학생회의 추적 서버를 마비시켰을 때, 최성민의 전산실 모니터링 로그에는 미세한 트래픽 발원지 흔적이 남았을 터였다. 유승우가 도서실 가방 수색에 실패하자, 윤세아는 대나무숲 어드민이 학교 컴퓨터실을 통해 주기적으로 접속하고 있다는 심증을 굳히고 오민석을 전초기지에 배치한 것이다.


채원은 대나무숲 관리자 대기열에 쌓여 있는 긴급 제보들을 확인하기 위해 마스터 폰을 꺼내는 대신, 컴퓨터실 PC를 통해 웹 서버 로그를 아주 잠깐 확인하려 했다. 그녀가 키보드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였다.


지잉—.


교복 바지 안쪽 깊숙한 곳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채원의 개인 보급형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민우가 아지트인 구 방송부 기계실에서 보내온 긴급 무선 신호였다.


채원은 조심스럽게 스마트워치의 액정을 확인했다. 민우가 구축한 로컬 보안 애플리케이션의 붉은색 경고 창이 점멸하고 있었다.


[Warning: USB HID device detected on Host PC-03. Duplicate key stroke interrupt active.]


‘키보드 입력 신호 이중 전송.’


채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자판 바로 위 0.5센티미터 상공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하드웨어 키로거(Keylogger)였다.


컴퓨터 본체와 키보드 연결선 사이에 물리적으로 장착되어, 사용자가 타이핑하는 모든 자판의 입력 값을 실시간으로 가로채 내부 메모리에 기록하거나 무선 주파수로 전송하는 해킹 장치. 소트웨어 방식의 보안 프로그램이나 백신으로는 절대 감지할 수 없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치명적인 기술적 덫이었다.


채원은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오민석은 채원이 이 컴퓨터실 3번 좌석에서 대나무숲 마스터 계정의 패스워드를 타이핑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평소처럼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순간, 대나무숲의 마스터 제어권은 그 즉시 학생회장 윤세아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어드민의 정체 역시 완벽하게 노출될 터였다.


채원은 mechanical pencil을 책상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아.”


작은 신음과 함께 그녀는 자연스럽게 상체를 숙여 책상 밑 어둠 속으로 몸을 굽혔다. 그리고 먼지 쌓인 컴퓨터 본체 뒤편의 포트 영역을 살짝 살폈다.


본체 뒤편, 어두운 회색 배기팬 바로 아래 USB 포트가 밀집된 곳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검은색 플라스틱 동글이 키보드 USB 잭과 본체 사이에 교묘하게 끼워져 있었다. 오민석이 다크웹에서 구매해 장착해 둔 ‘하드웨어 키로거 USB’의 물리적 실체였다. 동글 끝부분에서 아주 미세하게 깜빡이는 붉은색 LED 불빛이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유령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여기서 저걸 당장 뽑아버리면 어떻게 되지?’


채원은 머릿속으로 인과관계를 계산했다.


만약 지금 키로거를 뽑아내거나 교사에게 고발한다면, 오민석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즉각 어드민의 정체를 이 좌석의 주인이자 자신을 기만한 임채원으로 특정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어드민임을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는 최악의 악수였다. 덫의 존재를 알고도 모른 척하며, 적들의 예리한 칼날을 역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고도의 기만전이 필요했다.


채원은mechanical pencil을 쥐고 다시 상체를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감정이 거세된 포커페이스였다.


모니터의 어두운 액정 반사광 너머로, 뒤편 전산실 데스크에 앉아 있는 오민석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채원이 책상 밑에서 올라오자,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모니터에 연결된 수신 프로그램 화면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채원의 손끝이 키보드 자판을 누르는 순간만을 갈망하는 굶주린 여우의 모습이었다.


‘네가 원하는 게 내 패스워드라면.’


채원의 입꼬리가 긴 앞머리 그늘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사람은 자신이 놓은 덫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찰나에 가장 무력해지는 법이었다. 아버지가 남겨준 필기 분석 노트에 적혀 있던 구절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채원은 마우스를 움직여 바탕화면 구석에 있는 메모장(Notepad) 프로그램을 더블클릭했다. 하얀 빈 화면이 모니터 중앙에 크게 켜졌다.


그리고 그녀는 키보드 홈 로우(Home row) 위에 두 손을 가볍게 올렸다. 서늘한 자판의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다. 오민석의 시선이 채원의 손가락으로 쏠리는 것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느껴졌다.


채원은 침착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하는 경쾌한 소음이 컴퓨터실의 기계음 사이로 섞여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치는 글자들은 대나무숲의 패스워드가 아니었다. 아무런 의미도, 인과관계도 없는 무작위의 글자들이 메모장 화면 위로 하얗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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