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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사이의 은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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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 부회장. 지금 내 도서실에서 무슨 무례한 짓이지?”


이미영 사서 교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도서실의 무거운 공기를 단번에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문가에 서 있던 선도부원들이 흠칫 놀라며 주춤거렸고, 임채원의 가방 지퍼로 향하던 유승우의 손끝도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유승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단정한 가르마 아래로 차가운 안경테가 노란 백열등 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는 불쾌감을 지우기 위해 특유의 우아하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미영 교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아, 이미영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최근 교내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대나무숲 페이지의 무선 트래픽 발원지를 추적하던 중이었습니다. 전산실의 공식 보고에 따르면 그 신호가 도서관 지하 서고 근처로 압축되어서 말입니다.”


“전산실 보고?”


이미영 교사는 도서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단정한 카디건 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교사 특유의 엄격한 위압감이 선도부원들을 압박했다.


“그 전산실 보고라는 게 교사들의 동의도 없이 학생들의 개인 소지품을 무단으로 뒤져도 된다는 면죄부라도 준다더냐? 유승우, 네가 학생회 부회장이고 교감 선생님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해서 이 도서실의 자치권까지 넘볼 수 있는 건 아니야. 정식 영장이나 학교장의 공식 공문이 없다면, 내 허락 없이는 그 어떤 학생의 가방도 열 수 없다.”


“선생님, 이건 학교의 명예가 걸린 중대한 사안입니다. 교감 선생님께서도 이번 대나무숲 어드민 색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고 하셨습니다.”


유승우는 물러서지 않고 교감 홍상식의 이름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미영 교사 역시 소심한 성격 탓에 행정실과 교감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기에, 유승우의 팽팽한 태도에 순간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갈등하는 기색을 보였다.


대치가 길어지는 찰나, 임채원은 책상 아래로 쥔 가방 끈을 더 꽉 쥐었다. 가방 안쪽 비밀 수납공간에는 방금 전원을 꺼버린 ‘어드민 전용 구형 스마트폰’이 들어 있었다. 비록 전원은 꺼졌지만, 유승우가 이대로 물러서지 않고 이미영 교사를 압박해 결국 가방을 열게 만든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여기서 그냥 버티는 건 위험해. 유승우는 집요한 놈이야. 이미영 선생님이 퇴근하고 나면 하교 길목에서 나를 따로 불러내 수색할 수도 있어.’


채원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오프라인 탈출로를 계산했다. 폰을 지금 가방에서 빼내어 다른 곳에 숨겨야 했다.


처음에는 도서실 안내 데스크 밑에 있는 수기 도서 대여 대장 밑에 슬쩍 끼워 넣으려 했다. 하지만 채원의 날카로운 시선은 유승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유승우의 시선이 안내 데스크 컴퓨터와 대여 대장 주변을 주기적으로 훑고 있었다.


‘안 돼. 저 녀석은 대여 대장도 검열하려 들 거야. 책상 위나 데스크 주변은 무조건 발각된다. 더 깊은 곳, 저 녀석의 손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가야 해.’


채원의 시선이 도서실 저편, 굳게 잠겨 있는 지하 보일러실 뒤편 서고의 철문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영 교사조차 1년에 몇 번 들어가지 않는 먼지 쌓인 아날로그의 묘지였다.


문제는 유승우와 선도부원들의 눈을 피해 가방에서 폰을 꺼내 저 철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찰나의 시간’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였다.


채원은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돌려 카트 옆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1학년 정다은을 바라보았다. 다은이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채원 선배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본능적으로 눈을 맞추었다.


채원은 긴 앞머리 사이로 다은이에게만 보일 수 있는 아주 은밀한 수신호를 보냈다. 손가락으로 책상 모퉁이를 가볍게 두 번 톡, 톡 두드린 뒤, 시선으로 다은이가 잡고 있는 무거운 도서 정리용 카트를 가리켰다. 과거 도서부 오리엔테이션 때 다은이가 카트를 넘어뜨려 도서실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실수를 언급하며 ‘비상 상황 시 소동을 피우라’고 장난스레 나눴던 대화의 편편이 다은이의 뇌리를 스쳤다.


수다스럽고 눈치 빠른 다은이는 그 찰나의 신호를 정확히 해독했다. 다은이의 큰 눈망울이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지만, 이내 결연한 빛을 띠었다.


채원은 서서히 몸의 무게중심을 낮췄다. 가방 지퍼를 소리 없이 아주 미세하게 열어, 전원이 꺼진 차가운 구형 스마트폰을 교복 자켓 안감 주머니 속으로 미끄러뜨렸다. ‘투명 인간 은신술’의 감각이 작동했다. 채원은 자신의 호흡과 존재감을 극도로 지우며 책장 그늘 속으로 몸을 반쯤 숨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어머나! 악!”


정다은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쇠파이프로 조립된 육중한 도서 정리용 카트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쿠탕탕탕—! 콰직!


카트 위에 층층이 쌓여 있던 두껍고 무거운 양장본 백과사전들과 연도별 제본 신문첩 수십 권이 바닥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콘크리트 바닥을 때리는 거대한 소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도서실 중앙으로 피어올랐고, 쓰러진 카트가 유승우와 선도부원들의 발밑을 덮쳤다.


“앗, 깜짝이야!”


선도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고, 유승우 역시 옷자락에 먼지가 묻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섰다.


“다은아! 괜찮니?”


이미영 교사가 깜짝 놀라 쓰러진 책 더미와 다은이를 향해 급히 뛰어갔다. 도서실 내부의 모든 시선과 신경이 단 3초 동안 완벽하게 도서실 중앙의 소란으로 쏠렸다.


채원에게 필요한 시간은 단 2초였다.


채원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바람을 가르는 미세한 소리조차 내지 않는 유령 같은 걸음걸이였다. 그녀는 책장과 책장 사이의 어두운 음영을 징검다리 삼아 도서실 저편의 지하 서고 철문을 향해 기민하게 몸을 날렸다.


철문은 다행히 완전히 잠기지 않은 채 미세한 틈을 남겨두고 있었다. 채원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려 철문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철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는 여전히 밖에서 울려 퍼지는 책들의 낙하 소음과 다은이의 엄살 섞인 울음소리에 완벽하게 묻혔다.


지하 보일러실 뒤편 서고 안은 차갑고 퀴퀴한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노란 먼지 더미가 공중에 떠다니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빛을 켜지 않은 채 오직 아날로그적인 공간 지각력만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가장 깊숙한 안쪽 벽면,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아 거미줄이 쳐진 낡은 세계백과사전 서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1998년도에 인쇄된 가죽 표지의 거대한 백과사전들이 꽂혀 있었다.


채원은 그중 가장 두껍고 낡은 ‘W’ 판 백과사전을 뽑아 들었다. 책장을 펼치자 오랜 세월에 닳아 안쪽 바인딩이 헐거워진 틈새가 보였다. 채원은 주머니 속에서 어드민 전용 구형 스마트폰을 꺼내 그 가죽 표지 안쪽 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두고 먼지를 살짝 덮었다.


‘물리적 증거 오프라인 은닉 규칙.’


대나무숲의 마스터 계정이 연동된 이 위험한 기기를 더 이상 가방에 넣고 다닐 수는 없었다. 디지털 공간이 아닌, 이 먼지 쌓인 고서적들의 아날로그 장막 뒤야말로 학생회 전산실의 추적과 선도부의 물리적 수색을 완벽히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피처였다.


은닉을 마친 채원은 다시 소리 없이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서실 중앙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다은아, 발가락은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니?”


이미영 교사가 다은이를 부축하고 있었고, 유승우는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들을 보며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채원은 자연스럽게 빗자루를 손에 쥐고 서가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서 빗질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무표정하고 무해한 얼굴이었다.


소란이 서서히 진정되자, 유승우는 흙먼지가 묻은 바지를 털어내며 채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미영 교사의 눈치와 예상치 못한 소동 때문에 그의 이성적인 평정심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임채원. 이제 가방 열어.”


유승우가 채원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가방을 거칠게 낚아챘다. 이미영 교사가 제지하려 했으나, 유승우는 이미 눈이 뒤집혀 있었다.


“선생님, 더 이상의 방해는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규정대로 확인만 하겠습니다.”


유승우는 채원의 가방 지퍼를 사정없이 열어젖혔다. 그리고 가방 안의 내용물들을 책상 위로 거칠게 쏟아부었다.


도서실 바닥으로 둔탁한 소리들이 떨어졌다. 교과서 몇 권, 단정한 필통, 그리고 채원의 손때가 묻은 낡은 도서부 활동 일지뿐이었다. 유승우는 눈을 부릅뜨고 가방 안쪽의 숨겨진 주머니까지 샅샅이 손을 집어넣어 뒤졌지만, 그가 찾던 검은색 구형 스마트폰이나 비인가 무선 단말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유승우의 안경 너머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전산실 최성민의 IP 동시성 분석은 무결했다. 대나무숲 폭로가 터진 찰나, 이 도서실 안에서 무선 트래픽 신호를 발생시킨 기기가 분명히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채원의 소지품 중에는 평범한 보급형 스마트폰 한 대뿐이었고, 그마저도 전산실 트래커가 가리킨 MAC 주소와는 전혀 다른 기기였다.


채원은 흩어진 도서부 일지를 조용히 주워 담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부회장 선배. 이제 만족하셨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원망도, 당황도 없었다. 오직 규정 위반을 당한 평범한 학생의 건조하고 차가운 이성만이 담겨 있었다. 그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유승우에게는 지독한 패배감과 모욕감으로 다가왔다.


“유승우! 당장 도서실에서 나가라!”


이미영 교사의 분노 섞인 고함이 도서실을 때렸다.


“교사의 참관과 공식 절차도 무시하고 남의 학생 가방을 무단으로 뒤져놓고 아무것도 안 나오다니! 이 사실은 오늘 퇴근 전 교감 선생님과 학생 지도부에 공식 항의 문서로 접수하겠다. 당장 내 도서실에서 네 부원들 데리고 나가!”


유승우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채원을 매섭게 쏘아보며 가방을 거칠게 던져두고 선도부원들을 이끌어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도서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기묘한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다은아, 너도 조심성이 그렇게 없어서 어떡하니? 일주일 동안 방과 후에 남아서 도서실 바닥 전부 청소해라. 알겠어?”


이미영 교사는 소동을 일으킨 다은이를 호되게 질책했다. 다은이는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합니다……”라고 울상을 지었지만, 이미영 교사가 교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도서실 문을 나서는 순간, 채원을 향해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일주일간의 청소 징계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대나무숲 어드민의 비밀을 지켜냈다는 후배만의 은밀하고 자랑스러운 충성심의 표시였다. 채원은 그런 다은이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


같은 날 밤 22시 00분, 명율고등학교 교정.


진눈깨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해 교정은 칠흑 같은 어둠과 차가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하교하고 교사들도 퇴근한 시간, 채원은 후드 자켓을 깊게 눌러쓰고 도서관 건물 뒤편으로 소리 없이 걸어 들어갔다.


지하 서고에 숨겨둔 스마트폰의 상태를 확인하고, 배터리 충전과 야간 보안 로그를 체크해야 했다. 하지만 도서관 정문은 이미 쇠사슬로 굳게 잠겨 있었고, 사서 교사의 도움 없이는 지하 서고 철문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물리적 장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지하 서고 문이 잠겨 있으면 매번 기기를 조작할 때마다 침투해야 해. 밤늦게 은밀하게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해.’


채원은 보일러실과 연결된 도서관 지하 환기구 틈새를 살피며 조용히 걸어 내려갔다. 보일러실 외벽 구석, 어두운 음영 속에 낡은 화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겨울바람에 말라죽은 화초가 꽂혀 있는 초라한 화분이었다.


채원은 문득 경비원 강성필이 밤마다 순찰을 돌며 이 주변을 유심히 살피던 아날로그적 동선 패턴을 떠올렸다. 강 씨는 항상 이 화분 주변을 지날 때마다 랜턴 불빛을 길게 비추곤 했다.


채원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차가운 흙이 담긴 화분 밑바닥을 가만히 더듬었다.


사각.


손끝에 차갑고 묵직한 금속의 촉감이 닿았다.


화분 밑바닥의 틈새에, 명율고등학교 본관과 도서관 지하 보일러실의 모든 철문을 열 수 있는 노란 놋쇠 재질의 ‘마스터 열쇠’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채원은 놋쇠 열쇠를 손에 쥐었다. 빗물에 젖은 금속의 차가운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율처럼 흘러들었다. 그것은 경비원 강 씨가 과거 재단의 협박 속에서 방관해야 했던 죄책감을 털어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채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남겨둔 아날로그적 동맹의 묵직한 증표였다.


어둠 속에서 마스터키를 움켜쥔 채원의 눈빛이 긴 앞머리 사이로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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