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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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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윤이 무너진 교실은 기묘하리만치 차가웠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스마트폰 액정은 잘게 깨진 채 푸른빛을 깜빡이고 있었고, 그 너머로 강서윤의 악에 받친 비명이 교실 벽면을 사정없이 때렸다. 전교생이 지켜보는 대나무숲 페이지에 자신의 노트북 시리얼 번호와 추악한 모의 단톡방 캡처본이 박제된 순간, 그녀가 쌓아 올린 견고한 일진의 왕국은 모래성처럼 주저앉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날카로운 멸시와 혐오의 칼날이 되어 강서윤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아악! 어떤 새끼야! 이거 올린 새끼 누구냐고!”


강서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지만, 교실 안의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다수는 이제 가해자를 외면하는 방관자가 되어 그녀의 파멸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할 뿐이었다. 교실 맨 뒷줄 구석, 책상에 엎드린 채 긴 앞머리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임채원의 눈빛은 시베리아의 빙판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관이라는 침묵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채원은 중학교 시절의 상처를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아낸 안도감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채원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이것은 끝이 아닌, 더 거대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강서윤이 결국 담임 교사에게 이끌려 교무실로 끌려가다시피 사라진 후, 교실에는 폭풍이 지나간 자리 같은 기묘한 평화가 찾아왔다. 한소희는 드디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보라색 낙서와 조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채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강서윤이 마지막으로 끌려가며 복도에서 악을 쓰며 내뱉었던 단 한 마디였다.


“나만 죽을 것 같아? 윤세아! 전교 1등 모범생 윤세아 그년이 교감한테 시험지 유출받은 건 왜 대나무숲에 안 올라오는데! 어드민 너도 윤세아 개새끼지!”


그 비명은 복도 끝으로 사라졌지만, 채원의 뇌리에는 거대한 이정표처럼 박혔다.


‘윤세아와 홍상식 교감의 기말고사 시험지 유출 거래.’


단순한 일진들의 학교 폭력 모의를 넘어, 학교의 심장부인 학생회와 재단 고위층이 결탁한 거대 카르텔의 썩은 냄새가 풍겨왔다. 강서윤이 몰락하며 던진 그 자멸적인 단서는 채원이 나아가야 할 다음 표적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전교 1등이자 완벽한 모범생의 가면을 쓴 학생회장 윤세아. 그녀의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더 정교하고 무결한 물증이 필요했다.


***


방과 후 17시 30분, 명율고등학교 도서실.


하루 종일 내리던 진눈깨비가 멈추고 창밖으로 어스름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도서실 내부는 책장이 내뿜는 묵직한 종이 냄새와 노란 백열등 불빛으로 고요하게 채워져 있었다. 채원은 도서실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존재감을 지우는 ‘투명 인간 은신술’을 발휘하며 도서 신청 수기 대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1학년 도서부원이자 교내 가십의 확성기인 정다은이 카트에 책을 쌓으며 입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채원 선배, 진짜 대박이지 않아요? 오늘 강서윤 전학 수속 밟는다는 소문이 복도에 쫙 돌았어요. 대나무숲 어드민은 진짜 정체가 뭘까요?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강서윤 노트북 시리얼까지 알아내냐고요. 전교생이 지금 어드민 찾으려고 눈이 벌게져 있어요.”


다은이가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지만, 채원은 덤덤하게 대장 위에 연필로 선을 그을 뿐이었다.


“글쎄. 신경 쓸 필욘 없잖아. 우린 우리 일이나 하면 돼.”


“에이, 선배는 너무 건조해요. 아, 맞다! 그리고 학생회 애들이 오늘 전산실에서 엄청 심각하게 회의하는 거 봤어요. 윤세아 회장이 직접 최성민 선배랑 유승우 선배 불러다가 어젯밤 대나무숲 트래픽 로그를 분석했다던데요? 어드민이 접속한 물리적 위치가 도서관 지하 서고 근처로 나왔대요. 그래서 도서부원들 사찰하겠다는 소문도 있어요. 무섭지 않아요?”


다은이의 가벼운 한마디가 채원의 심장을 서늘하게 찔렀다.


‘도서관 지하 서고 근처.’


윤세아의 추격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어젯밤 한소희를 구하기 위해 대나무숲 서버에 대량의 데이터를 동기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세한 무선 패킷 흔적이 전산실 라우터 로그에 잔상으로 남은 것이 분명했다. 채원의 가방 안쪽 깊숙한 비밀 수납공간에는 여전히 대나무숲 마스터 계정이 자동 로그인되어 있는 ‘어드민 전용 구형 스마트폰’이 잠들어 있었다. 만약 지금 소지품 검사를 당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채원은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며 상황을 프로파일링했다. 윤세아는 이성적이고 통제 지향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확실한 로그 데이터를 쥐었다면, 단순히 소문으로 끝내지 않고 즉각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실행은 그녀의 가장 충직한 사냥개이자 선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부회장 유승우를 통해 이루어질 터였다.


사락, 사락.


고요한 도서실 내부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도서실 입구 쪽에서 규칙적이고 위압적인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일반 학생들의 가벼운 실내화 소리가 아니었다. 군대식으로 딱딱하게 다듬어진 선도부의 발소리였다.


쾅—!


도서실의 무거운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정적을 깨뜨렸다. 어깨에 선도부 완장을 찬 학생회 부회장 유승우가 세 명의 우람한 선도부원들을 이끌고 도서실 내부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차가운 미소 뒤로 먹잇감을 노리는 매서운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도서부원들, 잠시 하던 일 멈추고 자리에 그대로 대기해.”


유승우의 나지막하면서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도서실 서가 사이로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정다은은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소설책을 카트에 떨어뜨렸고, 채원은 긴 앞머리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오른손을 가방 안쪽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이 구형 스마트폰의 차가운 금속 테두리에 닿았다. 채원은 소리 없이 볼륨 버튼과 전원 버튼을 동시에 길게 눌러 기기를 강제 종료시켰다. 디지털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 기제였다.


유승우는 도서실 출입문을 닫으라고 뒤의 부원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유일한 오프라인 퇴로가 차단되었다. 도서실 안에는 채원과 정다은, 그리고 자습을 하던 서너 명의 일반 학생들만이 고립되어 있었다.


“유승우 선배…… 무슨 일이에요? 저희 지금 도서 정리 중인데…….”


다은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유승우는 대답 대신 다은이의 책상 위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


“교내 보안 규정 및 선도위 지침에 따라, 최근 대나무숲을 통한 교내 정보 유출 사건의 용의자를 추적 중이다. 현재 도서실 내부에서 비인가 무선 장비의 비정상 트래픽이 감지되었다는 전산실의 공식 보고가 있었다. 도서부원 전원, 가방 열고 소지품 검사에 협조해.”


유승우가 다은이의 가방을 가차 없이 낚아채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쏟아냈다. 필통, 노트, 화장품 파우치 등이 책상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다은이는 억울함과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선도부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소심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유승우는 쏟아진 물품들을 거칠게 뒤적였지만, 그가 찾는 구형 단말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천천히 서가 구석, 가장 조용히 앉아 있는 임채원을 향해 고정되었다.


유승우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채원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채원의 책상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거기 앞머리 긴 애. 이름이 임채원이었나?”


유승우가 채원의 낡은 가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가방 열어봐.”


일촉질발의 위기였다. 가방 안쪽 비밀 수납공간에는 방금 전원을 끈 구형 스마트폰이 들어 있었다. 비록 전원은 꺼졌지만, 기기 자체를 빼앗겨 포렌식 분석에 들어가거나 마스터 계정의 존재를 들키는 순간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채원은 심박수가 요동치는 것을 억누르며, 아버지가 남겨준 논리적 방어벽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복기했다.


채원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긴 앞머리 사이로 유승우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유승우는 평소 유령처럼 지내던 아웃사이더 여학생의 눈빛이 상상 이상으로 맑고 단단함에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명율고등학교 학생 생활 규정 제24조 3항에 따르면, 학생의 소지품을 검사할 때는 반드시 담당 교직원의 참관과 정당한 사유의 서면 통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동 규정 제5항에 의거, 학생회 임원은 사법권이나 공식 징계 권한이 없으므로 교사의 동행 없는 단독 수색은 명백한 권한 남용이자 인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채원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었다. 도서실의 정적 속에서 조목조목 울려 퍼지는 그녀의 논리적인 반박에 유승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옆에 서 있던 선도부원들도 예상치 못한 규정 인용에 서로를 힐끗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규정?”


유승우가 코웃음을 치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눈에 노골적인 위협의 빛이 서렸다.


“임채원, 네가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불법 페이지 어드민을 잡는 일이다. 교감 선생님의 묵인 하에 진행되는 공식 수색이야. 네가 떳떳하다면 가방을 못 열 이유가 없잖아?”


그는 거친 손길로 채원의 가방 지퍼를 직접 잡으려 손을 뻗었다. 채원의 손끝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또각, 또각, 또각—.


그때, 닫혀 있던 도서실 철문 너머로 날카롭고 단호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유승우의 손이 지퍼 직전에서 미세하게 멈췄다.


쾅!


문이 열리며 단정한 카디건 차림에 안경을 쓴 사서 교사 이미영이 차가운 얼굴로 도서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예리한 시선이 유승우와 선도부원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학생회 부회장. 지금 내 도서실에서 무슨 무례한 짓이지?”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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