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 깊은 곳의 유산
명율고등학교의 공기는 언제나 미세한 먼지와 보이지 않는 서열의 압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본관 건물은 겉보기엔 명문 사학의 기품을 뽐내고 있었지만, 그 실상은 스마트폰 액정 화면 속에서 실시간으로 조율되는 가혹한 디지털 계급 사회에 불과했다.
그 계급의 가장 밑바닥, 혹은 아예 그 계급도에 기록조차 되지 않는 무형의 존재가 바로 임채원이었다.
채원은 눈을 가리는 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리며 헐렁한 학교 체육복 자켓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전교생이 하교한 방과 후의 도서실은 채원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도피처였다. 도서실 창가 구석 자리는 채원이 지난 일 년간 존재감을 완벽히 지우고 전교생의 행동 패턴과 스마트폰 타이핑 습관을 관찰해 온 거점이었다. 하지만 오늘, 채원은 평소의 자리를 벗어나 도서관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지하 보일러실 뒤편의 서고.
그곳은 오래되어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고서적들과 폐기 대기 중인 문서 상자들이 가득한 어둠의 공간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에서 채원은 먼지 쌓인 분실물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반쯤 뜯겨 나간 상자의 틈새로 낡은 전자기기의 모서리가 보였다. 채원은 소리 없이 다가가 상자 속을 뒤적였다. 먼지 더미 속에서 손에 잡힌 것은 겉면에 자잘한 스크래치가 가득한 구형 스마트폰이었다.
“이건…….”
채원은 침을 삼키며 기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기기는 묵직한 진동과 함께 액정에 푸른 빛을 뿜어냈다. 차가운 블루라이트가 채원의 긴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예리한 눈동자를 비추었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나타난 것은 일반적인 잠금 화면이 아니었다. 명율고등학교의 모든 평판과 서열을 지배하는 익명 제보 페이지, ‘대나무숲’의 마스터 관리자 계정이 로그인되어 있는 화면이었다.
채원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대나무숲의 어드민 권한. 그것은 단순한 페이지 관리자가 아니었다. 명율고 안에서 어떤 소문을 유포하고, 어떤 제보를 묻어버릴지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신의 권력이었다. 채원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관리자 전용 대기열 폴더가 열리며 미확인 제보 텍스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채원의 시선이 대기열 맨 위에 걸려 있는 첫 번째 비공개 제보에 멈춰 섰다.
[제보합니다. 2학년 3반 한소희, 대치동 학원가 뒤골목에서 원조교제 하는 거 똑똑히 봤습니다. 증거 사진 첨부합니다. 빨리 올려주세요.]
제보 텍스트 밑에는 조잡하게 합성된 한소희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얼굴은 분명 같은 반 동급생인 한소희가 맞았지만, 몸체는 다른 인물의 사진을 정교하게 이어 붙인 합성본이었다.
순간 채원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과 함께 지독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가 똑같은 방식의 사이버 불링을 당할 때 보복이 두려워 방관했다가 친구를 영원히 잃어야 했던 뼈아픈 트라우마가 뇌리를 스쳤다. 눈앞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다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채원은 마스터 폰의 대기열 권한을 사용해 해당 제보의 업로드 예약을 즉각 보류 상태로 전환했다. 가해자들이 한소희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 쳐놓은 최초의 올가미를 디지털 공간에서 가차 없이 묶어버린 것이다.
사락, 사락.
그때 서고 입구 쪽에서 아주 미세한 발소리와 함께 낡은 도서 정리용 카트가 굴러가는 쇠소리가 들려왔다.
“채원 선배? 거기 있어요?”
발랄하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 1학년 도서부원이자 교내 가십의 확성기인 정다은이었다. 정다은은 수다스럽고 눈치가 빨라 채원의 이중생활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채원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손에 든 구형 스마트폰의 액정은 여전히 푸른 빛을 발하며 대나무숲 관리자 화면을 띄우고 있었다. 전원을 급히 끄려 했으나, 노후된 기기 특유의 렉 때문에 화면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발소리는 점점 서가 사이를 좁혀오고 있었다.
채원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녀는 들고 있던 아날로그 도서 대여 대장의 두꺼운 가죽 표지 밑으로 마스터 폰을 슬쩍 밀어 넣었다.
스르륵, 탁.
폰이 대장 밑으로 완전히 숨겨진 순간, 정다은이 도서 카트를 밀며 서가 모퉁이를 불쑥 돌았다.
“어? 선배, 진짜 여기 있었네요? 방과 후에 맨날 어디 가나 했더니.”
다은이 단발머리를 흔들며 채원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예리한 눈동자가 채원의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는 손끝과,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두꺼운 도서 대여 대장을 향했다.
“선배, 방금 손에 들고 있던 거 뭐예요? 되게 조심스럽게 숨기시는 것 같던데.”
다은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도서 대여 대장을 들어 올리려 했다. 대장 밑에 숨겨진 구형 스마트폰의 모서리가 아주 미세하게 드러나기 직전이었다.
채원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차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다은. 1학년 2반 김민주가 신청한 도서 연체 기간이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도서부 행동 수칙 제4조에 따르면 연체 도서 회수는 담당 부원의 의무인데, 왜 아직 처리가 안 됐지?”
“네? 아…… 그, 그게 말이죠…….”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업무 지적에 다은이 움찔하며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다은의 시선이 채원의 손끝에서 벗어나 자신의 태블릿 화면으로 급히 옮겨갔다. 채원은 그 틈을 타 책상 아래로 손을 뻗어 대여 대장 밑의 스마트폰을 PE 자켓 깊숙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도서부 후배로서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시간보다, 본인의 연체 관리 실무를 먼저 확인하는 게 순서 같은데.”
채원의 조목조목 짚어내는 차가운 팩트 폭격에 다은은 볼을 부풀리며 카트 손잡이를 잡았다.
“우우, 선배는 진짜 너무 차가워요. 알았어요, 지금 바로 회수하러 갈게요!”
다은이 카트를 돌려 서가 밖으로 덜컹거리며 멀어졌다. 그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채원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PE 자켓 주머니 속에서 식은땀이 밴 손을 꺼내자, 차가운 금속 단말기의 감촉이 느껴졌다.
채원은 주머니에서 다시 구형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하 서고의 어둠 속에서 다시 켜진 푸른 화면 위에 붉은색 배터리 경고 아이콘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Battery 3%]
방전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그리고 한소희를 겨냥한 강서윤 일당의 저격글 자동 업로드 예약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시간뿐이었다. 채원은 어둠 속에서 홀로 깜빡이는 액정을 응시하며, 자신만의 외로운 저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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