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諸葛)의 덫, 붉은 약재 시장
사천성(四川省) 무법지대의 대기는 늘 축축하고 비릿한 흙내를 품고 있었다. 자하봉에서의 비정한 형제 대결을 뒤로하고 남궁진의 끈질긴 추격조를 따돌린 사마건은, 사천성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대한 적색 약재 시장의 초입에 들어섰다. 시장 전체를 메운 것은 뭉근하게 달여지는 온갖 약초의 씁쓸하고 독한 내음이었다. 사마건은 대나무 삿갓을 깊게 눌러써 얼굴의 왼쪽을 철저히 가렸다. 천마대종사의 마맥이 침식해 들어오면서 귀밑을 지나 목덜미까지 굳어버린 회색빛 괴사 피부는 대낮의 양지 아래서 기괴한 존재감을 풍겼기 때문이다.
“윽…….”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른쪽 발목에서 뼈를 태우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백무기가 남긴 기이한 열독 상처는 여전히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디딜 때마다 관절 내부에서 서걱거리는 마찰음을 내며 사마건의 머리를 흔들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그가 향한 곳은 시장 외곽의 퇴락한 약방, 적요당(寂寥堂)이었다.
사마건은 품속에서 신의 백무흔이 남긴 피 묻은 가죽 수첩, 의선수필(의선수필)을 꺼내 들었다. 심장까지 침범한 마맥의 폭주를 막고 시한부 반년의 운명을 비틀기 위해서는 당가의 금지 만독굴에 숨겨진 ‘한음고란’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확인해야 할 목숨보다 소중한 흔적이 있었다. 바로 누이동생 사마혜의 생사였다.
약방 구석의 어두운 책장에는 먼지 쌓인 처방전과 오래된 비서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사마건은 마맥심안(魔脈心眼)을 미세하게 개방하여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서랍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낡은 서책 한 권을 꺼냈다. 누렇게 바랜 종이를 넘기던 사마건의 손끝이 일순간 멈췄다.
서책의 가장 뒷장, 거친 먹선들 사이로 지극히 정갈하고 맑은 글씨체가 새겨져 있었다.
‘송풍(松風)은 부드러우나 꺾이지 않으니…….’
사마혜(사마혜). 멸문지화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동생의 필적이었다. 동생이 이 약방에 머물며 남긴 무언의 생존 신호였다. 사마건은 가슴이 터질 듯한 격동 속에서 서책을 찢어 품속 깊이 밀어 넣었다. 절망의 나락 속에서 동생이 살아있다는 구원의 실마리를 마침내 움켜쥔 순간이었다.
스으으으—.
그 찰나, 주변의 공기가 기이하게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시장의 왁자지껄한 소음, 상인들의 흥정 소리, 약초를 다지는 약절구 소리가 거짓말처럼 단숨에 지워졌다. 사당 문틈으로 새어 들던 햇빛마저 왜곡되며 기이한 자줏빛 안개가 약방 내부를 가득 메웠다.
사마건의 눈동자가 매섭게 좁혀졌다.
“진법(陣法)인가.”
투두둑, 콰르릉!
약방의 벽면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나더니, 거대한 목조 벽들이 대지에서 솟구쳐 올라 사방의 출구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평범한 시장의 골목길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미로처럼 꼬였고, 사마건의 시야는 극도로 왜곡되었다. 제갈세가의 전설적인 방어 진법인 팔진도법(八陣圖法)이었다.
“사마 소협. 당신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자욱한 자줏빛 안개 너머에서 백색 학창의를 입은 창백한 인상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략으로 이름난 제갈세가의 후기지수, 제갈휘(제갈휘)였다. 그의 손에는 정교한 철제 팔진반(八陣盤)이 쥐어져 있었고,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완벽한 덫에 가둔 사냥꾼의 냉철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림맹주 제갈무쌍 님의 명에 따라,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네놈을 이 적색 시장의 진법 속에 매장하겠다.”
위이이잉!
제갈휘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을 가로막은 거대한 철제 팔진반이 회전하며 굉음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먹구름처럼 어두워진 허공에서 시퍼런 독기가 서린 강철 침 수천 개가 사마건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마건은 급히 허리춤에서 검붉은 임시 철검(臨時 鐵劍)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검을 고쳐 잡는 순간, 검신 내부에서 정파의 청련 진기와 마맥의 마기가 비정상적으로 충돌하며 소름 끼치는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지난 격전으로 파손 임계점에 달한 무기는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청풍영락(靑風零落)!”
사마건은 이빨을 악물며 임시 철검을 팽이처럼 회전시켜 사방을 덮는 둥근 검막을 형성했다.
깡! 깡! 캉! 카아아앙!
쏟아지는 강철 침들이 검막에 부딪쳐 불꽃을 튕기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매 격돌마다 가해지는 묵직한 내력의 충격이 부서진 단전의 공백을 강타했다. 단전이 깨진 상태에서 정파의 검초를 억지로 전개하려 한 대가는 가혹했다.
“우웁…… 쿨럭!”
사마건의 입구멍으로 뜨거운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검을 쥔 오른손 목덜미의 경맥이 거꾸로 치솟으며 전신이 불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검막이 일순간 흐트러진 틈을 타, 차가운 쇠침 한 자루가 사마건의 왼쪽 허벅지를 깊숙이 관통했다.
“윽!”
독침의 독소가 허벅지 근육을 타고 빠르게 퍼지며 다리 감각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임시 철검의 검신 표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더욱 깊어지며 검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무기가 완전히 파괴되기 직전이었다.
사마건은 도가의 기본 검초로 진법의 목조 벽을 베어 부수려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벽은 환술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벽면을 통과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반동의 힘이 그의 손목 경맥을 역류하여 척추를 강타했다. 사마건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각은 완전히 기만당했다. 이 진법 속에서 눈은 독약이다.’
사마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직 어둠만이 실체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마맥심안(魔脈心眼).’
그가 왼팔의 뒤틀린 마맥을 개방하자, 뇌해 속에서 주변의 풍경이 기이한 붉은색 기혈 흐름으로 재구성되었다. 마맥심안의 붉은 시야 속에서, 진법의 기운이 모이고 흩어지는 핵심 동력원인 진안(陣眼)의 위치가 포착되었다. 하지만 제갈휘 역시 보통의 적이 아니었다. 지하에 매설된 거대한 기기관문들이 상시 톱니바퀴를 굴리며 진안의 위치를 매 순간 바꾸고 있었다.
물리적인 타격으로는 저 움직이는 기기 장치를 파괴할 수 없었다. 사마건은 과단성 있게 왼손 품속에서 차가운 음기를 품은 한철단검(한철단검)을 뽑아 들었다.
“얼어붙어라.”
사마건은 한철단검을 바닥의 흙더미 속으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와 동시에 왼팔의 마맥에서 흘러나오는 극음(極陰)의 마기를 단검 끝으로 폭발적으로 방출했다.
콰드드득! 콰아아앙!
단검이 꽂힌 지면을 시작으로, 푸른 서리빛 얼음 장막이 대지 아래로 무섭게 뻗어 나갔다. 지하에서 굉음을 내며 회전하던 기기관문의 강철 톱니바퀴들이 극음의 한기에 노출되자마자 하얗게 얼어붙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내 얼음 쐐기가 기어 틈새를 가로막으며 육중한 기기 장치들이 일시에 회전을 멈췄다.
쿠르릉! 쩍! 쩍!
기기관문이 동결되자 하늘의 팔진반이 불길하게 흔들리며 독침의 낙하가 뚝 끊겼다.
그러나 진법의 회전이 멈춘 순간, 제갈휘의 차가운 목소리가 왜곡된 공간 전체를 울렸다.
“동력을 멈추었으나, 내 손안의 패는 아직 가득하다. 죽어라, 마두.”
스스스스!
진법의 서리 낀 왜곡된 환영 속에서, 제갈휘가 숨겨둔 흑사당과 백록검파의 정예 자객 십여 명이 무기를 쥔 채 사마건의 사방 사각지대를 노리며 일제히 그림자처럼 쇄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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