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쫓는 사냥개들
백록검파(白鹿松風)의 장문인 집무실은 한겨울의 서리발보다 더 차가운 살기로 얼어붙어 있었다.
장문인 백현태(白賢泰)는 화려한 백의 소매를 거칠게 휘날리며 서책이 가득한 탁자를 내리쳤다. 쿠웅, 묵직한 가구 울림과 함께 탁자 모퉁이가 처참하게 바스러져 나갔다. 그의 온화한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탐욕이 일그러진 얼굴 사이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사마세가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단 말이냐! 그것도 단전이 산산조각 난 폐인 놈이 지하 감옥의 간수들을 도륙하고 도망쳐?"
무릎을 꿇고 있던 하급 무사가 바르르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그렇습니다, 장문인. 조태식 간수장을 포함해 현장에 있던 간수 세 명이 모두 일격에 전신 뼈가 으스러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시신들에서 기이할 정도로 차갑고 탁한 검붉은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닥쳐라!"
백현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사마세가의 무학 비급을 찬탈하고 흑강광산의 이권을 독점하기 위해 사마혁을 죽이고 가문을 멸문한 지 불과 수개월이었다. 사마세가의 마지막 핏줄이자 촉망받던 후기지수였던 사마건의 단전을 깨뜨려 지하 감옥 깊은 곳에 가두었거늘, 그 폐인이 간수들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백현태에게 단순한 탈옥이 아닌 거대한 위협이었다. 만약 사마건이 살아남아 가문 멸문의 진짜 배후에 무림맹주 제갈무쌍(諸葛無雙)이 있다는 서신이라도 폭로하는 날에는 백록검파는 물론 자신의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었다.
백현태는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집무실 구석의 어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오너라, 위량."
어둠이 일렁이더니 회색 가죽 경장갑을 낀 날렵한 사내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록검파의 음지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비밀 암살 조직, 추풍대(追風隊)의 대주 위량(魏量)이었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목전에 둔 굶주린 사냥개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추풍대주 위량, 장문인 방을 뵙습니다."
"위량, 네가 직접 추풍대의 정예들을 이끌고 폐광으로 들어가거라. 그 사마가 놈의 목을 베어 내 눈앞에 가져와라. 단, 한 가지 기억해라. 그놈의 몸에서 정파의 기운이 아닌 다른 기이한 힘이 느껴진다면, 흔적도 남기지 말고 불태워 지워버려야 한다. 사마세가의 생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강호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위량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소리 없이 적을 베는 그의 명검 무음검(無音劍)이 가죽 검집 안에서 미세하게 공명했다.
"장문인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바람을 쫓는 사냥개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사냥감은 강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량의 신형이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백현태는 바스러진 탁자 파편을 내려다보며 이빨을 갈았다. 사마건, 그 질긴 놈의 숨통을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끊어놓으리라 다짐하면서.
***
같은 시각, Heukgang 폐광(흑강현 폐광)의 어둡고 습한 지하 갱도 깊은 곳.
"하아... 윽..."
사마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젖은 흙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전신의 경맥이 불타는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오른팔의 근육은 간수들과의 전투에서 마맥의 폭발력을 견디지 못하고 갈가리 찢어져 붉은 피가 무복 소매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더욱 기괴한 것은 그의 왼손이었다. 천마대종사 독고천의 마맥이 이식된 왼손은 이제 손가락 끝부터 검붉은 빛을 넘어 어둡고 딱딱한 쇳빛으로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감각이 죽어 무감각해진 왼손 끝을 만져보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오직 소름 끼치는 한기뿐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칠 때마다 가슴 한가운데 깊숙이 박힌 황금빛 혜명침(慧命針)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며 진동했다. 백무흔이 심어둔 이 침이 없었다면, 왼팔의 광포한 마기가 이미 그의 뇌해를 삼키고 그를 미쳐버린 괴물로 만들었을 터였다.
‘단전이 없으니... 마기를 다스릴 길이 없구나. 백록정종심법을 쓰려 하면 할수록 뒤틀린 경맥이 기혈을 역류시켜 몸을 파괴한다.’
사마건은 입가에 흘러내린 검붉은 피를 소매로 닦아냈다. 단전이 깨진 폐인에게 마맥은 힘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육체를 갉아먹는 잔혹한 저주였다. 매 순간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거부반응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붕괴할 것 같았다.
그때, 갱도 앞쪽의 굽어진 모퉁이 너머에서 희미한 인기척과 함께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 사마건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부러진 철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러나 찢어진 오른팔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왼팔의 마맥은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며 그의 온몸을 일시적인 마비 상태로 몰아넣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절망적인 순간,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무리가 나타났다.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 남루한 삼베옷을 입고 어깨에 곡괭이를 멘 사내들—백록검파의 가혹한 수탈 아래 광산에서 노역을 하는 광부들이었다.
사마건은 숨을 죽였다. 만약 이들이 백록검파의 밀고자가 된다면 그의 목숨은 여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그 광부 무리의 선두에 선 거구의 사내를 본 순간, 사마건의 안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지닌 사내. 과거 사마세가의 충직한 하인이자 가신이었던 칠용(七龍)이었다.
칠용은 갱도 구석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사마건을 발견하고는 횃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사마건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소, 소가주님...! 살아 계셨군요! 정녕 소가주님이 맞으십니까!"
사마건은 거친 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칠용... 아재..."
"이 무슨 참혹한 몰골이란 말입니까. 가문이 무너질 때 힘없는 소인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소가주님께서 이 차가운 감옥에서 이토록 고초를 겪고 계셨다니!"
칠용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통해했다. 사마세가의 온정 어린 보살핌을 받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에게, 사마건의 깨진 단전과 괴사해 가는 왼손은 뼈아픈 슬픔이었다. 주변의 다른 광부들도 사마세가의 은혜를 입었던 자들이었기에,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사마건을 호위하듯 둘러쌌.
"칠용 아재... 슬퍼할 시간이 없다. 백록검파의 추격조가... 이미 폐광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나를 숨겨다오."
사마건의 냉혹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칠용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소가주님. 이 폐광은 저희 광부들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백록검파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희만큼 이 지하의 길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따라오십시오."
칠용은 다른 광부들에게 주변의 핏자국과 흔적을 지우라 지시한 뒤, 사마건을 부축하여 광산 보관창고 아래에 숨겨진 비밀 지하실로 인도했다.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찬 어두운 지하실 바닥에 사마건을 눕힌 칠용은 품속에서 낡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물을 먹여주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사마건의 타들어 가던 폐부가 간신히 진정되었다.
칠용은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누렇게 바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사마건에게 건넸다. 그것은 흑강광산 지도(흑강광산 지도)였다.
"소가주님, 이것을 받으십시오. 과거 사마세가가 이 광산을 관리할 때 작성된 극비 지도입니다. 백록검파 놈들은 모르는 폐광 내부의 무너진 붕괴 구역과 위험 지대, 그리고 외부 수로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아주 세밀하게 적혀 있습니다."
사마건은 떨리는 오른손으로 지도를 받아 품에 넣었다. 칠용의 목소리는 다급해졌다.
"지금 백록검파의 비밀 살수대인 추풍대가 폐광 입구를 봉쇄하고 안으로 진입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특히 대주 위량이라는 자는 바람의 흔적마저 쫓는 무서운 살수라 들었습니다. 소가주님께서 정상적인 몸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들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자멸입니다. 이 지도를 따라 지하 깊숙한 곳의 옛 석문으로 가십시오. 그 너머에 외부 수로로 통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사마건은 지도를 품에 넣으며 칠용의 거친 손을 꽉 잡았다.
"고맙다, 칠용 아재.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문의 마지막 핏줄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소가주님, 부디 살아남아 그 위선자 백현태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지하실 위쪽, 광산 보관창고의 낡은 목조 문이 거칠게 흔들리는 소리가 지하 공간을 타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사마건과 칠용의 신형이 동시에 굳어졌다.
"이보게! 광부 놈들! 안에 누구 있느냐?"
차갑고 음산한 목소리가 문틈을 타고 흘러들었다. 추풍대의 정예 추격조이자 냄새와 흔적을 추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살수, 살삼(殺三)의 목소리였다. 그가 이끄는 추격조가 벌써 보관창고 입구까지 도달한 것이다.
지하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사마건은 숨을 죽인 채 오른손으로 부러진 철검을 고쳐 잡으려 했다. 적들의 살기를 감지한 그의 왼팔 마맥이 격렬하게 공명하며 검붉은 마기를 뿜어내려 했다.
‘검기를 모아야 한다... 저들의 숨통을 끊으려면...’
그러나 사마건이 흩어진 진기를 억지로 끌어모으려 한 순간, 심장에 박힌 혜명침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마맥의 극음(極陰) 한기가 심장 혈도를 사정없이 찔러 들어왔다.
윽!
사마건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전신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가사(假死) 상태의 마비에 빠졌다.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호흡마저 가빠졌다. 단전이 없는 육체로 마기를 억지로 제어하려 한 대가였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적의 검날을 받아들여야 할 최악의 위기였다.
칠용은 사마건의 상태가상태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사마건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소가주님, 가만히 계십시오. 소인이 해결하겠습니다."
칠용은 지하실 입구의 비밀 덮개를 닫아 흙먼지로 덮은 뒤, 서둘러 지상 창고로 올라갔다. 창고 문을 열자, 회색 복면을 쓰고 음산한 살기를 풍기는 살삼과 세 명의 추풍대 살수들이 도를 쥔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림맹의 나으리들? 이 낡은 창고에는 광석 찌꺼기밖에 없습니다만..."
칠용은 짐짓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살삼은 코를 킁킁거리며 창고 내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었다.
"이 근처에서 피비린내가 난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이곳으로 흐르던 기류가 기이하게 뒤틀렸어. 사마가 놈이 이 근처에 숨어든 것이 분명하다. 비켜라, 샅샅이 수색하겠다."
살삼이 도를 치켜들며 창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지하실 내부의 사마건은 마비된 몸으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이빨을 갈았다. 만약 저들이 지하실 덮개를 발견한다면 꼼짝없이 사로잡힐 터였다.
그때, 칠용의 눈빛에 과단성이 서렸다. 그는 창고 구석에 설치된 거대한 광산 환기용 풀무와 철제 파이프 라인을 바라보았다. 그 파이프는 지하 깊은 곳의 유독한 광산 가스(황산 및 탄산가스)를 외부로 배출하는 통로였다.
칠용은 슬쩍 뒤로 물러서며 파이프의 밸브를 발로 강하게 걷어찼다.
콰아아아!
밸브가 파괴되면서 파이프 틈새로 지독하고 매캐한 황색 가스가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창고 내부가 유독 가스로 가득 차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커헉! 이, 이게 무슨...!"
"유독 가스 누출입니다! 나으리들, 이 가스는 불꽃이 닿으면 대폭발을 일으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광산 전체가 무너집니다!"
칠용이 가슴을 쥐어짜며 비명을 지르고 먼저 창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살삼과 살수들은 사마건을 잡기도 전에 가스 폭발로 지하에 매장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일류 살수라 할지라도 대자연의 폭발과 질식사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쯧! 퇴각한다! 일단 밖으로 나가 가스가 빠지기를 기다린다!"
살삼은 침을 뱉으며 부하들을 이끌고 창고 밖으로 급히 후퇴했다.
창고 문이 닫히고 적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칠용은 서둘러 지하실로 다시 내려왔다. 지하실 내부는 다행히 밀폐되어 있어 가스가 유입되지 않았으나, 사마건의 이마에는 극심한 통증으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맥의 한기가 심장을 잠식하며 그의 수명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칠용은 사마건을 일으켜 세웠다.
"소가주님, 가스가 일시적으로 저들의 발을 묶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위량이 이끄는 본대가 오기 전에 어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지도를 따라가십시오!"
사마건은 굳어 있던 몸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칠용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쥔 뒤, 흑강광산 지도를 펼쳐 들고 폐광의 가장 깊고 어두운 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사마건의 뇌리에는 오직 복수의 일념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문을 파멸시킨 백현태, 그리고 그 배후의 제갈무쌍. 그들의 목을 베기 전까지는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칠용이 준 지도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좁고 험준한 지하 갱도의 끝에 도달한 사마건의 눈앞에 거대하고 음산한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닫혀 있었던 것처럼 이끼와 먼지로 뒤덮인 석문이었다.
그 순간, 사마건의 왼팔 마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의 혜명침이 핏빛 광무를 내뿜으며 공명했고, 석문 너머 깊은 공동에서 그를 부르는 듯한 기이하고 강력한 마기(魔氣)의 파동이 흘러나왔.
‘이 안쪽에...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이냐...’
석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마기의 바람이 사마건의 전신을 감싸 안는 찰나, 뒤편 갱도 멀리서 수십 개의 횃불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빠르게 좁혀져 오기 시작했다. 추풍대의 살수들이 기만책을 눈치채고 다시 추격을 개시한 것이다.
타오르는 횃불의 붉은 빛이 사마건의 등 뒤를 비추는 순간, 그는 석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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