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기(天機)의 거래, 붉은 밀서
치이익, 치치적.
새벽녘의 차가운 빗줄기가 무너져 내린 대장간의 붉은 잔해 위로 떨어지며 매캐한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갓 폭발해 주저앉은 가마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고, 공기 중에는 타버린 석탄 가루와 비적들의 피비린내가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허파를 찔렀다.
사마건은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의 가죽 옷은 불꽃에 타들어 가 살점과 함께 짓무르고 있었고, 오른쪽 발목 깊숙이 박힌 백무기의 철혈검기 열독(熱毒)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를 녹여버릴 듯한 극통을 자아냈다. 오른손에 쥔 임시 철검은 제련 가마에서 급히 벼려진 탓에, 검신 내부에서 흐르는 정파의 진기와 마맥의 마기가 서로를 밀어내며 미세하게 비명을 지르듯 떨리고 있었다. 불완전한 공명. 그것은 사마건의 비틀린 신체 상태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참상 속에서, 한 사내가 그림자처럼 걸어 나왔다.
“허어, 내 평생 이토록 아름답고 처절한 불꽃놀이는 처음 보는구려, 사마 소협.”
풀어진 청색 도포자락을 빗물에 적시면서도, 제갈세가에서 파문당한 방랑 학사 제갈린은 여전히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천기운행도가 그려진 낡은 깃털 부채가 빗속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사마건은 대답 대신 몸을 틀어 제갈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왼쪽 뺨, 귀밑까지 회색빛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괴사 피부가 일렁이는 화염의 잔해 속에서 기괴한 무늬처럼 두드러졌다. 마맥의 잠식이 부른 저주스러운 흉터였다.
서릉.
사마건의 왼손이 움직였다. 완전히 딱딱하고 차가운 쇳빛으로 물든 그의 기형적인 왼손이 품속에서 북해 한철로 주조된 한철단검을 소리 없이 뽑아 들었다. 단검의 서슬 퍼런 날 끝으로 극음(極陰)의 마기가 서리처럼 성에를 피워 올렸다.
“길을 막아서는 자는 누구든 베어 넘긴다. 비록 그것이 제갈세가의 망령일지라도.”
사마건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제갈린은 단검의 서늘한 기세 앞에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부채로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툭툭 치며 능글맞게 웃었다.
“쯧쯧, 내 상처 입은 야수를 자극하러 온 것이 아니외다. 그 벼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임시 철검을 보시오. 검신 깊은 곳에서 정사와 사사가 대립하며 무기 자체가 붕괴해 가고 있지 않소? 단전이 깨진 상태에서 그런 불완전한 무기와 뒤틀린 마맥만으로 이 흑강현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갈린의 맑은 안광이 사마건의 오른손에 쥐어진 태극 문양의 철검을 꿰뚫어 보았다. 사마건은 이빨을 악물었다. 제갈린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단전이 깨진 폐인인 그가 마맥의 폭발력으로 간신히 일류의 완력을 내고 있으나, 정상적인 기공을 쓸 때마다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선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용건만 말해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사마 소협, 당신은 지금 무림맹주 제갈무쌍의 직인이 찍힌 천하수배령에 걸려 있소. 관청의 포졸들과 백록검파의 사냥개들이 흑강 나루터의 수로마저 완벽하게 봉쇄했지. 외다리가 된 가신 곽칠은 고문의 여파로 마차에 누워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빈사 상태요. 당신 혼자라면 모를까, 그 부자(父子)를 데리고 사천성으로 향하는 국경의 검문소를 돌파하는 것은 자살 행위외다.”
제갈린이 부채를 접어 사마건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림맹의 포위망을 완벽하게 우회할 수 있는 은밀한 수로 경로와, 관군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가짜 국경 통행증이 있소. 즉, 당신이 사천으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밀수 정보’를 내가 쥐고 있다는 뜻이지.”
사천(四川).
그 지명이 나오자 사마건의 심장 혈도에 깊숙이 박힌 황금빛 혜명침이 불길하게 진동했다. 뇌해를 어지럽히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품속에 간직한 누이 사마혜의 서신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가문이 멸문당할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사천 지방 당가 주변에 숨어 살아가는 유일한 혈육.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
사마건의 살기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
“제갈세가의 파문 학사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런 귀한 정보를 내줄 리가 없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갈린은 능청스럽게 부채를 다시 펼쳐 들고는 주변의 무너진 대장간 잔해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최동수 현령이 죽은 지금, 흑강현 관청은 백록검파와 무림맹 집법대가 임시로 접수했소. 그 관청 내부 깊은 곳에는 지방 관원들과 백록검파가 주고받은 추악한 뇌물 장부와, 사마세가 멸문 음모의 예비 문서가 보관된 ‘흑강 관청 밀실’이 존재하지요.”
제갈린의 안광에 이채가 서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요. 그 밀실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는 백록검파의 비리 문서와, 사마세가 멸문의 진짜 배후가 적힌 ‘붉은 밀서’를 훔쳐 오시오. 철저한 장사꾼답게, 정보를 얻고 싶다면 목숨을 건 도박을 해야 할 것이외다.”
사마건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제갈린이 요구한 밀서는 단순히 백록검파의 비리를 넘어, 향후 자신의 가문을 멸문한 무림맹주 제갈무쌍의 추악한 위선을 만천하에 고발할 결정적인 비수가 될 물증이었다. 비록 관청 밀실에 침투하는 순간 역모죄로 몰려 천하공적의 낙인이 굳어지겠지만, 그에게는 애초에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래를 수락하겠다.”
사마건의 짧은 대답에 제갈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품속에서 순찰 경로와 비밀 통로가 상세히 그려진 가죽 지도 한 장을 꺼내 사마건에게 던졌다.
“현명한 선택이외다. 오늘 밤 관청의 경비 교대 시간은 묘시(卯時) 직전이니, 그 틈을 타 침투하시오.”
사마건은 날아오는 지도를 왼손의 딱딱한 쇳빛 손가락으로 낚아채 품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이끌고 어둠이 짙게 깔린 사당 뒤편의 숲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가슴 품속의 혜명선사의 사리가 은은하게 공명하며 폭주하려는 마맥의 살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불타는 대장간의 잔해를 등진 채, 제갈린은 사마건이 사라진 어둠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내 그의 얼굴에서 능청스러운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제갈린은 들고 있던 깃털 부채를 거칠게 접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사마 소협. 무림맹 본단에서 파견된 가장 강직하고 무자비한 집법사, 정건(鄭健)이 방금 전 관군 정예들을 이끌고 흑강 관청에 주둔하기 시작했으니 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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