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살행(殺行)
어둠은 차가웠고, 침묵은 죽음보다 무거웠다.
사마건은 차갑게 식어가는 의선 백무흔의 주검 위에 이마를 맞댄 채 엎드려 있었다. 전신의 모공에서 흘러나온 피가 흙먼지와 뒤섞여 그의 얼굴을 흉측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 심장에 박힌 황금빛 혜명침이 맥동할 때마다 왼팔의 검붉은 마맥(魔脈)이 불타는 쇳물을 주입한 것처럼 기이하게 부풀어 올랐다.
‘어르신... 나 때문에... 오직 나를 살리기 위해...’
뜨거운 눈물이 피비린내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문을 멸문시키고 자신의 단전을 부순 백록검파를 향한 증오보다, 자신을 구하고 스스로 심맥을 끊은 은인을 향한 부채감이 그의 영혼을 더 잔혹하게 짓밟았다. 왼팔의 기형적인 맥동이 빨라질수록 가슴속 깊은 곳에서 검붉은 살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터벅, 터벅.
축축한 갱도 바닥을 진흙째 짓밟는 거친 발자국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어둠 속에서 세 개의 횃불 불빛이 일렁이며 다가왔다. 횃불의 붉은 빛이 공동의 벽면을 비추자, 검은 가죽 옷을 입고 철제 채찍과 도를 찬 사내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죽은 간수장 조태식의 부하들이자, 백록검파의 하급 간수들이었다.
"어이, 조 형님이 이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 되었는데 왜 소식이 없는 거야?"
"쯧, 설마 그 단전 깨진 사마가 똥개 놈을 고문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거겠지. 조 형님도 참 끈질기단 말이야."
그들은 낄낄거리며 공동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나 이내 그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횃불 불빛이 백무흔의 싸늘한 주검과, 그 옆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사마건을 비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뭐야? 조 형님은 어디 가고 의선 늙은이가 왜 여기 자빠져 있어?"
간수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침을 뱉으며 백무흔의 시신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무례하게도 발끝으로 백무흔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어이, 늙은이! 죽은 건가? 이 사마가 놈을 탈옥시키려다 조 형님한테 당한 모양이군. 조 형님은 어디 간 거야?"
그 순간,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마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은인의 시신에 가해지는 모욕을 목격한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사마건은 이빨을 악물며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뼈가 어긋나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의 안광만큼은 귀신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감히... 그분의 시신에 발을 대지 마라."
사마건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간수들은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으나, 이내 사마건의 몰골을 확인하고는 비열한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깜짝 놀라게 하네. 단전이 깨져 개처럼 기어 다니던 놈이 제법 폼을 잡는구나. 조 형님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네놈이 무슨 수라도 부린 모양인데... 그래봤자 폐인 놈이 뭘 하겠느냐?"
사내들이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 들었다. 시퍼런 도신이 횃불 불빛을 받아 섬뜩한 안광을 발했다.
사마건은 본능적으로 체내의 진기를 끌어 올리려 했다. 평생을 뼈에 새겨왔던 백록검파의 정통 도가 심법, 백록정종심법(白鹿正宗心法)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읊조렸다. 그러나 기를 모으고 순환시켜야 할 아랫배의 단전은 그저 차갑고 텅 빈 바람만 불어오는 허무한 구멍에 불과했다.
진기가 갈 길을 잃고 흩어지는 순간, 전신의 경맥이 뒤틀리며 극심한 반동이 찾아왔.
"우웁... 푸하학!"
사마건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한 움큼의 검붉은 선혈을 토해냈다. 단전이 파괴된 폐인에게 도가의 내공 운용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혈도가 역류하는 고통에 전신이 사정없이 떨렸다.
"하하하! 저것 봐라! 내공도 없는 놈이 기공을 쓰려다가 제풀에 고꾸라지는구나! 아주 가관이군!"
간수들이 사마건의 비참한 모습을 조롱하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사내 세 명이 사마건의 사지를 짓밟고 단숨에 도를 내려치려던 그 찰나였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 이 위선자들의 목을 베어야 한다!’
사마건의 가슴속 깊은 곳, 심장에 박힌 황금빛 혜명침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며 광포한 진동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왼팔 안쪽에 이식된 천마대종사 독고천의 마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전이 아닌, 왼팔의 경맥 자체에 응축되어 있던 검붉은 마기(魔氣)가 폭포수처럼 분출되어 그의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정파의 정순한 내공과는 완전히 다른, 날것 그대로의 잔혹하고 폭발적인 근원의 완력이었다.
크아아악!
사마건은 내면의 비명을 지르며 마맥의 기운을 양다리에 집중시켰다. 정통 경공의 흐름은 아니었으나, 폭발적인 마기의 반탄력을 이용한 변칙적인 신법이 전개되었다. 그의 신형이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기괴하게 꺾이며 간수들의 하향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
스쳐 지나가는 찰나, 사마건의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철검(부러진 철검)의 잔해를 움켜쥐었다. 가문이 멸문당할 때 백태양의 발에 짓밟혀 반 토막이 나버린, 사마세가의 자부심이자 비참한 몰락의 상징이었다.
"이, 이놈이 어디로 간 거야?"
도를 허공에 날린 간수가 당황하여 외치는 순간, 사마건의 신형은 이미 그의 사각지대인 측면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사마건은 단전이 없어 기검을 펼칠 수 없었기에, 오직 상대의 내력 흐름을 간파하여 무력화하는 맥상타혈술(맥상타혈술)을 전개했다.
타각!
부러진 철검의 뭉툭한 끝부분이 간수의 오른쪽 손목 안쪽, 기혈이 모이는 핵심 혈도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으아악!"
간수는 비명을 지르며 쥐고 있던 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손목의 기혈이 순간적으로 마비되어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사마건의 왼팔 마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통제 불가능한 열기가 그의 가슴을 가로질러 오른손으로 고스란히 전도되었다. 부러진 철검의 녹슨 검신 위로 검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검 끝에 섬뜩하고 사악한 광무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 이 기운은 뭐지? 정파의 내공이 아니야! 마교의 요술이다!"
나머지 두 간수가 사마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살기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폭주하는 마맥의 힘을 얻은 사마건의 신형은 그들의 예측보다 훨씬 빨랐다.
사마건은 아버지가 가르쳐주었던 백록송풍검보(백록송풍검보)의 초식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부드럽고 예리하게 소나무 사이를 흐르는 바람 같아야 할 검로가, 마맥의 파괴적인 괴력과 결합하자 기형적이고 잔혹한 살인기로 변모했다.
‘백록송풍검 - 송풍파랑(松風파랑)!’
부러진 철검이 허공을 가르며 무겁고 궤멸적인 파공음을 내뿜었다. 그것은 소나무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태풍에 뿌리째 뽑혀 대지를 짓밟는 듯한 폭렬한 일격이었다.
쿠우웅!
검붉은 마기를 두른 철검의 단면이 무기를 놓친 간수의 가슴팍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콰드득!
뼈가 산산조각 나는 끔찍한 파열음이 공동을 가득 채웠다. 간수의 가슴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며 몸이 뒤편 암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한 채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오른팔의 근육이 마맥의 폭발력을 견디지 못하고 투두둑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피부 틈새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지만, 사마건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마지막 남은 두 간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괴물 같은 놈...! 죽여라! 당장 죽여!"
남은 두 간수가 공포에 질려 동시에 사마건을 향해 도를 휘두르며 연합 공격을 감행해 왔다. 사방에서 좁혀오는 도날의 궤적이 사마건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오른팔의 근육이 파열되어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 힘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사마건은 이빨을 악물며 왼손 끝을 그들을 향해 튕겨냈다. 체내에서 날뛰던 극음(極陰)의 마기를 손가락 끝에 모아 방출하는 변칙 기습 기술이었다.
쉭! 쉭!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 차가운 탄환, 음기탄(음기탄) 두 발이 허공을 가르며 간수들의 얼굴을 정확하게 저격했다.
"으아아악! 내 눈! 눈이 얼어붙는다!"
간수들은 갑자기 눈앞을 덮친 지독한 한기와 함께 시야가 암흑으로 변하자 비명을 지르며 공세를 멈추었다. 그들의 도날이 허공을 갈지자로 흔들리며 흐트러졌다.
사마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마지막 간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른손에 쥔 부러진 철검의 끝부분을 간수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푸학!
쇠붙이가 살을 찢고 뼈 사이를 파고드는 둔탁한 감각이 손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간수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사마건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
그 순간, 사마건의 왼손 피부가 기괴하게 일렁이더니 검붉은 빛에서 점차 쇳빛처럼 어둡고 딱딱하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마맥의 기형적인 열기가 그의 가슴을 타고 급격하게 역류해 올라왔다.
두근!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더니, 이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식어내렸다. 심장박동이 일순간 멈춰버린 듯한 극단적인 오한과 함께 사마건의 시야가 흐려졌다.
‘마맥의 열기가... 심장을 침범하려 하고 있다... 어르신이 박아둔 혜명침이... 흔들리는 건가...’
사마건은 마지막 간수의 시신을 밀쳐내며 비틀거렸다. 전멸한 간수들의 시신이 피웅덩이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첫 살행(殺行)의 대가는 참혹했다. 오른팔의 근육은 갈가리 찢어졌고, 왼손 끝은 마기의 침식으로 인해 감각이 죽어 괴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정신마저 사악한 살기에 오염되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폐광 입구 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낯익은 기운이 실려 왔다.
스으으.
소나무 사이로 부는 거친 바람 같은 검기. 백록검파 특유의 송풍검기(松風劍氣)였다. 단순한 하급 간수들이 아닌, 백록검파의 정예 순찰대와 추격조가 폐광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서늘한 전조였다.
사마건은 비틀거리는 다리로 백무흔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 살아남아야만 은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복수를 집행할 수 있었다.
사마건은 부러진 철검을 움켜쥔 채, 마맥의 폭주하는 열기를 식히고 적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폐광 깊숙한 암흑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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