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수배령, 사방의 적
횃불의 붉은 빛이 사마건의 핏기 없는 얼굴과 쓰러진 백무기의 시신을 비추는 순간, 전령들의 서늘한 병기 소리가 골짜기를 채웠다.
“무릎을 꿇어라, 마교의 세작 사마건! 무림맹 집법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항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하겠다!”
백록검파의 외교 장로 백무정이 보낸 전령들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골짜기의 공기를 찢어발기듯 차갑고 날카로웠다. 전령들이 쥔 쇠사슬과 장창들이 횃불 불빛을 받아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사마건은 피 묻은 한철단검을 쥔 채 백무기의 시신 앞에서 비틀거렸다. 오른팔 경맥은 백무기의 철혈장(鐵血掌)을 정면으로 받아낸 여파로 완전히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다. 전신에 새겨진 수십 군데의 검상에서는 끊임없이 붉은 피가 흘러내려 하얀 얼음 바닥을 적셨다.
가장 끔찍한 것은 왼쪽 뺨이었다. 백무기와의 극심한 정사 진기 충돌 속에서, 왼쪽 뺨 귀밑까지 회색빛 죽은 피부가 확장되어 완전히 고착되어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송장의 얼굴을 한쪽 면에 기워 붙인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가슴속 깊이 박힌 황금빛 혜명침은 미친 듯이 진동하며 심장을 찔러왔고, 찢어진 경맥 사이로 고인 진기가 요동치며 입안 가득 쇠 냄새 나는 선혈이 울컥 솟구쳤다.
“소가주님……!”
바닥에 쓰러진 곽칠이 신음하며 사마건의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곽칠의 전신 역시 채찍질로 짓겨져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부러진 다리는 이미 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꺾여 있었다. 열두 살 난 곽두수는 아버지를 감싸 안은 채 눈물 가득한 눈으로 포위망을 노려보았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단전이 파괴된 몸으로 마맥의 힘을 억지로 짜내어 일류 고수인 백무기를 처단한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사마건은 이빨을 악물었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아직 백현태의 목을 베지 못했다.’
사마건은 왼손으로 품속을 더듬었다. 지난번 처단한 독인 살사(殺死)의 시신에서 약탈해 두었던 만독의 비약 병들 중,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는 연막탄이 손끝에 걸렸다. 사마건은 마지막 남은 마맥의 한기를 왼손 끝에 모아 연막탄의 뇌관을 강하게 눌러 터뜨린 뒤, 대지 위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펑! 콰아아앙!
순식간에 얼음 골짜기 전체를 뒤덮는 지독한 회색 연기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눈을 찌르는 매캐한 연기와 함께 전령들의 비명과 당황한 고함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
“콜록! 연막이다! 적을 놓치지 마라!”
“사슬을 던져라! 입구를 봉쇄해!”
그 혼란을 틈타 사마건은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대신해 왼손으로 곽칠의 덜덜 떨리는 어깨를 무겁게 짊어졌다. 그리고 곽두수의 손목을 움켜쥔 채, 흑강 보법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어두운 대나무 숲속으로 몸을 던졌다.
오른쪽 발목 가죽 장화를 스쳤던 백무기의 붉은 철혈검기가 남긴 기이한 열독(熱毒) 상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를 태우는 듯한 고통을 유발했다. 어긋나 있던 오른쪽 무릎 관절까지 비틀리며 절뚝거리는 걸음이었지만, 사마건은 이빨이 깨져라 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직 어둠만이 그들의 유일한 아군이었다.
***
이튿날 아침, 흑강현 관청의 거리는 평소와 달리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관청의 포교들과 군졸들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거리 도처에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수배 전단을 붙이고 있었다. 수배 전단 한가운데에는 사마건의 몽타주와 함께 붉은 글씨가 서슬 푸르게 적혀 있었다.
[ 천하공적(天下公敵) 마교 세작 사마건. 백록검파의 장로 백무기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마공을 부려 도주함. 발견 즉시 현장에서 사살할 것을 허가함. - 무림맹주 제갈무쌍 ]
백록검파의 외교 장로 백무정이 무림맹에 올린 날조된 보고서가 하루 만에 천하수배령이라는 거대한 올가미가 되어 사마건의 목을 죄어온 것이었다. 제갈무쌍의 서인이 찍힌 수배령이 발포되자, 흑강현은 순식간에 사마건을 사냥해 공을 세우려는 정파 무인들과 군졸들의 살기로 뒤덮였다.
“마교의 세작이라니…… 사마세가가 어떤 가문인데 그런 위선을 부린단 말인가.”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에 낡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마건은 골목길 어둠 속에서 수배 전단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갈라진 목소리에는 뼈저린 냉소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
왼쪽 뺨의 회색빛 죽은 피부는 삿갓 아래 그림자 속에서도 기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매수된 포교 최동수의 군졸들이 창을 들고 거리를 누비며 조금이라도 사마세가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하층민들과 광부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하고 있었다.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거리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사마건은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무복 안으로 숨긴 채, 왼손으로 품속의 한철단검 자루를 꽉 쥐었다.
바스락.
그때, 등 뒤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들렸다. 사마건은 즉시 몸을 돌려 왼손의 한철단검을 내지르려 했다. 단검 끝에 차가운 음기가 맺히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 사형! 저 개똥이입니다!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얼굴에 꼬질꼬질한 때가 묻은 소년, 곽두수의 친구이자 시장 고아인 개똥이가 싹싹 빌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개똥이의 품에는 관군들의 수색망을 감시할 때 쓰는 작은 철제 딱따기가 숨겨져 있었다.
“개똥이냐.”
사마건은 검을 거두었으나 경계의 눈빛은 풀지 않았다. 개똥이는 주위를 급히 살피며 사마건의 누더기 소매를 잡아당겼.
“지금 큰길은 최동수 포교가 직접 관군들을 풀어서 쥐새끼 한 마리 통과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무림맹 집법대 놈들까지 합류해서 눈에 불을 켜고 사형을 찾고 있어요. 이쪽 지하 수로를 통해 움직여야 합니다.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개똥이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복잡한 골목길 구석의 낡은 하수구 덮개를 열었다. 사마건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개똥이의 뒤를 따라 어둡고 축습한 지하 수로로 몸을 숨겼다.
지하 수로는 썩은 물 냄새와 쥐들의 찍찍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은 지상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개똥이는 앞장서 걸으며 주기적으로 딱따기를 가볍게 쳤다.
딱. 딱.
그것은 지상에 있는 개방의 어린 거지들과 주고받는 신호였다. 지상에서 딱따기 소리가 길게 한 번 들려오면 관군 순찰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었고, 짧게 두 번 들리면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사마건은 개똥이가 전해주는 딱따기 신호에 맞춰 관군들의 이동 타이밍을 정밀하게 읽으며 포위망을 우회했다.
“성문 쪽은 상황이 어떠냐?”
사마건이 어둠 속에서 물었다.
개똥이는 안색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최동수 포교가 성벽 위에 수십 명의 궁수들을 배치해 두고, 성문 입구에는 침입자가 발을 디디면 강철 창이 튀어나오는 기기관문 장치까지 새로 설치했습니다. 정면으로 나가려다가는 온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가 될 겁니다. 절대로 정면 돌파는 하시면 안 됩니다.”
사마건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공권력과의 정면 충돌은 무의미한 피만 흘릴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의 몸은 백무기와의 사투로 내상이 깊어져 있어, 대규모 군사들과 맞붙을 여력이 없었다. 은밀하게 움직여 흑강현을 빠져나가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사마건은 품속에서 흑강현 동전과 몇 안 남은 은자 주머니를 꺼내 개똥이에게 건넸다.
“이것으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고, 계속해서 성문과 나루터의 동태를 살펴다오.”
“감사합니다, 사형! 꼭 무사하셔야 합니다.”
개똥이는 은자를 받아 품에 소중히 넣고는, 사마건을 흑강현 기루 뒤편에 위치한 곽칠의 마구간으로 인도했다.
***
곽칠의 마구간은 삼엄한 기루의 감시망 뒤편에 숨겨진 허름한 공간이었다. 마구간 내부의 매캐한 말똥 냄새와 짚단 타는 냄새가 오히려 사마건에게는 일말의 안도감을 주었다.
사마건이 마구간 뒤편의 비밀 밀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짚단 위에 누워 있던 곽칠이 신음하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의 전신은 흰 붕대로 감겨 있었고, 붕대 틈새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소가주님…… 무사하셨군요.”
“칠 아저씨, 움직이지 마십시오. 내상이 깊습니다.”
사마건은 급히 곽칠을 만류하며 침상 옆에 앉았다. 곽칠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사마건의 무사함에 눈물을 흘렸다.
“백무기 그 극악무도한 자를 처단하셨으니, 가문의 원혼들이 조금이나마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림맹의 천하수배령이 떨어졌으니 이제 이곳 흑강현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때, 밀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곽두수가 들어왔. 소년의 얼굴은 긴장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품속에 무언가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형님! 아버지의 은밀한 연락망을 통해 사천 지방에서 전령이 다녀갔습니다. 이 서신을…….”
곽두수가 품속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은밀한 서신 한 통을 꺼내 사마건에게 전했다. 사마건은 왼손으로 서신을 받아 밀랍을 깨고 종이를 펼쳤다.
서신에 적힌 필적을 확인하는 순간, 사마건의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생사조차 알 수 없어 매일 밤 심장을 쥐어짜며 기도했던 유일한 혈육, 누이동생 사마혜(司馬慧)의 필적이었다.
[ 오라버니, 저는 살아있습니다. 현재 사천 지방의 당가 주변에 신분을 숨긴 채 은거하고 있습니다. 백록검파의 사냥개들이 저를 찾기 위해 사천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으니, 부디 몸을 보존하시어 제게 와 주십시오. ]
“혜아가…… 살아있었구나.”
사마건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들었다. 단전이 깨지고 가문이 멸문당한 나락의 바닥에서도 그를 버티게 했던 유일한 희망의 불씨가 마침내 눈앞에 실재하는 진실로 다가온 것이다. 사마혜의 생존 위치가 사천 당가 주변이라는 사실은, 이제 사마건이 목숨을 걸고 나아가야 할 명확한 행선지가 되었다.
“소가주님, 아가씨가 살아계신다니 이 늙은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곽칠이 감격에 겨워 울부짖었다. 곽두수 역시 사마건의 옷자락을 잡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마구간 바깥에서 기루의 행수 연화(蓮華)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나으리들! 이 누추한 기루 마구간까지 포교 나으리들이 어쩐 일이십니까? 저희 기녀들이 나으리들을 위해 최고급 대나무 죽엽청을 준비해 두었으니, 안쪽에서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최동수의 포교들이 기루 주변을 가혹하게 수색하려 하자, 연화가 기녀들을 동원해 관원들에게 술과 뇌물을 먹여 수색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쓰는 소리였다. 바깥의 쇳소리와 거친 발자국 소리가 마구간 벽 너머로 가깝게 서성였다.
사마건은 깊은 숨을 내쉬며 가슴 품속에 사마혜의 서신을 소중히 넣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한철단검을 고쳐 잡았다. 비록 단전은 파괴되었고 전신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의 안광에는 그 어떤 절망도 꺾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결의와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혜아야, 기다려라. 이 오라버니가 반드시 너를 구하러 가마.’
사마건이 한철단검의 차가운 자루를 움켜쥐는 순간, 개똥이가 숨이 턱에 찬 채 마구간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사형! 큰일났습니다! 최동수가 백록검파의 사주를 받아 흑강 나루터의 모든 배들을 압수하고, 강물 길을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나루터 검문이 극도로 강화되었습니다!”
최동수가 백록검파의 사주를 받아 흑강 나루터의 모든 배들을 압수하고 검문을 극도로 강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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