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빙한수(氷寒水)의 서늘한 구원
안개는 붉은 횃불빛을 머금고 핏빛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진흙 구덩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설무강의 눈동자가 갈대 틈새로 비치는 불빛을 따라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 단골수(斷骨手)로 발목을 꺾어 침묵시킨 남궁세가 검수의 시신이 그의 바로 옆에서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무강의 왼손아귀에는 피와 진흙에 젖은 가죽 장부, 즉 남궁세가의 화공 계획서가 꽉 쥐여 있었다. 장부 표지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 끝마디가 바르르 떨렸다. 내공이 한 푼도 없는 육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골격 재배치 비결(Skeletal Realignment Secret)을 가동하여 굳어버린 상반신의 관절을 억지로 비틀어 움직인 대가는 참혹했다. 양쪽 어깨의 인대는 사정없이 늘어나 불타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고, 전신의 뼈마디에서는 골밀도 한계 돌파(Density Breakthrough)의 부작용으로 인한 염증성 고열이 무섭게 들끓고 있었다.
‘반 시진…….’
삼경(三更)이 시작되는 순간, 이 갈대숲 전체가 거대한 불바다로 변할 것이다. 남궁세가와 천검문의 무인들이 사방에서 화전(火箭)을 쏘아 도망친 노예들과 자신을 한꺼번에 태워 죽이려 하고 있었다. 일어서기는커녕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하반신의 마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뺨에 새겨진 남궁태의 검기 흉터가 불덩이를 얹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강은 이빨을 악물었다. 신음 소리 대신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상반신의 남은 아귀힘만으로 진흙 바닥을 짚었다. 단전이 깨진 무인에게 기적은 없었다. 오직 스스로의 뼈를 비틀고 흙을 움켜쥐는 처절한 기동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으드득, 뼈가 진흙 속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강은 임시 막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막사 안에서는 백강혁(Baek Gang-hyeok)과 아성(A-seong)이 숨을 죽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무강이 장막을 걷고 막사 바닥으로 쓰러지듯 들이닥치자, 백강혁이 경악하며 달려왔다.
“무강아! 이 미친놈이 기어코……!”
백강혁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무강은 대답 대신 왼손에 쥔 가죽 장부를 탁자 위로 던졌다. 피와 오물에 젖은 장부를 펼쳐 든 백강혁의 눈동자가 장부에 적힌 글귀를 따라 무섭게 흔들렸다.
“화공……? 삼경에 이 갈대숲 전체를 소각하겠다고? 남은 시간은 반 시진도 되지 않는다!”
아성이 공포에 질려 무강의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대장, 어떡해요…… 놈들이 불을 지르면 우리는 꼼짝없이…….”
“정신 차려라, 아성아!”
백강혁이 소리치며 무강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끝에 닿은 무강의 피부는 용광로의 쳇바퀴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슴뼈 아래 깊숙이 박힌 호심침(Heart-Protecting Needle)이 요동치는 심장의 발작을 막기 위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 진동이 경맥을 자극할 때마다 무강의 가슴에서 시큼한 마찰 흉통이 뿜어져 나왔다.
“뼈 속의 고열이 심장과 뇌까지 치솟고 있다. 이대로 화공이 시작되기도 전에 열독(熱毒)으로 심장이 터져 죽을 거다! 뼈의 온도를 급격히 낮추어 골막의 팽창을 식히지 못하면 철사융골 준비 단계(Wire Fusion Prep)로 넘어가는 것은커녕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
백강혁의 의학적 경고는 절망적이었다. 이 축축하고 썩어가는 갈대숲 습지대에는 무강의 뼈 속 열독을 식혀줄 극저온의 냉각 매개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막사 한구석의 어둠 속에서 날렵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튀어나왔다. 결사대의 정찰 조장이자 척후병인 삼수(Sam-su)였다. 삼수의 갈색 가죽 옷은 이미 진흙과 풀독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영악한 눈빛만큼은 어둠 속에서 쥐새끼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대장, 백 의원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삼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남궁세가 북강 철강 지부(Namgung Clan Northern Steel Branch)의 지하 보관고에 제련용 냉각수로 쓰이는 만년 빙하의 정수, 빙한수(Ice Cold Spring Water)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놈들이 철광석을 제련할 때 쳇바퀴처럼 뜨거워진 정철을 식히기 위해 공수해 온 비보(秘寶)입니다. 제가 침투해 훔쳐오겠습니다.”
백강혁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거기는 남궁세가의 정예 무사들이 겹겹이 포진한 호랑이 굴이다! 네 삼류 경신법으로 침투하는 것은 자살행위야!”
“지리를 아는 것은 저뿐입니다.”
삼수가 허리춤에서 낡은 청동 집음기를 매만지며 무강을 응시했다. 무강은 말없이 눈빛으로 삼수를 바라보았다. 그 차갑고 묵직한 안광 속에는 수하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는 무언의 명령이 담겨 있었다. 삼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잎처럼 소리 없이 막사 밖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남궁세가 북강 철강 지부는 웅장한 목조 장벽과 삼엄한 철갑 경비병들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지부 외곽의 언덕 위에서, 삼수는 진흙 바닥에 몸을 밀착한 채 숨을 죽였다.
경비병들의 순찰 주기는 빈틈이 없었고, 곳곳에 감시 진법의 눈이 흐릿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파의 도둑이라면 장벽 근처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삼수에게는 광산 노역 시절부터 단련된 기막힌 척후 능력이 있었다.
삼수는 코를 킁킁거렸다. 밤안개 사이로 미세하게 흩날리는 독특한 냄새가 그의 후각 신경을 자극했다. 맵싸하면서도 서늘한 냄새, 제갈세가의 진법가들이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뿌려두는 진안산(塵眼散) 가루의 향이었다.
‘진안산 가루의 냄새가 동쪽 장벽 아래쪽에서 가장 옅다. 저곳이 결계의 흐름이 왜속되어 오작동을 일으키는 사각지대다.’
삼수는 영악하게 웃었다. 그는 소리를 죽이기 위해 특수 제작한 얇은 천 신발을 신고, 벽을 타는 벽호공(壁虎功)을 발동하여 소리 없이 목조 장벽을 넘어섰다. 순찰 무사들이 횃불을 들고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삼수는 그림자 속으로 완벽하게 동화되어 기척을 지웠.
지하 제련소와 연결된 지하 보관고의 철문 앞. 두 명의 철갑 경비병이 굳건히 서 있었다. 삼수는 품속에서 들개 뼈다귀 몇 개를 꺼내 반대편 어둠 속으로 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지자 경비병들의 시선이 일시적으로 쏠렸다.
삼수는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바람처럼 미끄러져 들어가 철문의 자물쇠 홈을 얇은 쇠꼬챙이로 쑤셨다. 철컥,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보관고 내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방 한가운데의 현철 거치대 위에, 두꺼운 이중 가죽 주머니로 밀봉된 빙한수 독이 놓여 있었다. 만년 빙하의 정수답게 가죽 주머니 표면에는 하얀 서리가 촘촘하게 굳어 앉아 있었다. 삼수는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자신의 등 뒤에 묶었다. 살을 에어내는 듯한 냉기가 가죽을 뚫고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으나, 삼수는 이빨을 부딪치며 참아냈다.
그때였다. 보관고 밖에서 사나운 사냥개들의 짖는 소리가 날카롭게 안개를 찢었다.
우우우우―! 컹! 컹!
침입을 감지한 남궁세가의 특수 사냥개들이 수색 무사들을 이끌고 지하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삼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침입자다! 보관고로 가라!”
무사들의 거친 함성과 가죽 장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퇴로는 막혔다. 삼수는 이빨을 악물며 보관고 천장의 환기구 틈새를 바라보았다. 좁고 축축한 하수구 틈새. 채광 노역 시절 좁은 바위 틈을 기어 다니며 다진 축골(縮骨)의 재능이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삼수는 자신의 어깨 관절을 스스로 비틀어 부피를 줄인 뒤, 좁은 환기구 구멍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거친 돌기가 피부를 찢어 발겨 피가 흘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어둠 속을 기어 나갔다. 등 뒤에 묶인 빙한수 주머니의 냉기가 그의 체온을 급격히 떨어뜨려 의식이 흐려졌지만, 설무강의 차가운 안광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버텨냈다.
***
갈대숲 임시 막사 안.
설무강의 상태는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그의 전신 피부는 거무죽죽한 철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고, 거칠게 내뱉는 숨결에서는 유황 연기 같은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무강아, 정신 차려라! 의식을 잃으면 심장이 멎는다!”
백강혁이 그의 혈도를 은침으로 찌르며 소리쳤지만, 무강의 눈꺼풀은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전신의 골막이 팽창하여 심장 경맥을 옥죄는 극도의 쇼크사 위기였다. 아성은 무강의 손을 잡고 꺼져가는 촛불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삼경을 알리는 첫 번째 야간 종소리가 멀리 양주성 관문 쪽에서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화공이 시작될 한계 시간이 도달한 것이다.
그때, 막사의 가죽 장막이 찢어지듯 열리며 삼수가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삼수의 전신은 피와 진흙, 그리고 서리로 뒤덮여 있었고, 그의 양손에는 얼어붙은 가죽 주머니가 꽉 쥐여 있었다.
“대장…… 가져…… 왔습니다…….”
삼수는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혼절했다. 백강혁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삼수의 손에서 빙한수 주머니를 낚아챘다. 주머니를 개봉하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한 안개를 내뿜는 극저온의 냉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강아, 버텨라!”
백강혁은 망설임 없이 빙한수를 사발째 무강의 전신에 끼얹었다.
치이이이이익―!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무강의 달아오른 철골 피부에서 하얀 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무쇠를 차가운 물에 담금질할 때 나는 둔탁한 파열음이 좁은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전신의 피부가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해 찢어지며 붉은 선혈이 증기와 뒤섞여 흘러내렸다.
“크으으으윽……!”
의식을 잃어가던 무강의 눈동자가 번쩍 뜨이며 핏빛 안광을 뿜어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극단의 열상(熱傷) 통증이 그의 전신 신경망을 난도질했다. 가슴뼈 아래 박힌 호심침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며 심장을 강하게 압박했다.
‘지금이다. 심상을 집중해라!’
무강은 마음속으로 사부 독고벽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찢어지는 비명을 삼키며, 뇌리에 전신 골격의 입체적인 구조를 그렸다. 골절 복원 심상 구결(Bone Restoration Visualization)이었다.
무강은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빙한수의 극한의 냉기를 의지적으로 조절하여, 전신의 들끓는 골막 안쪽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뼈 속의 열독과 빙한수의 냉기가 뼈마디 사이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라 서로를 잠그고 있던 고밀도의 뼈 세포들이 냉각되면서 서서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으드득, 드득, 으드러덕!
기기묘묘한 파골음이 무강의 전신에서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굳어 있던 하반신의 관절들이 풀리고, 어긋나 있던 척추와 허벅지 뼈마디가 물리적인 인장력을 회복하며 미세하게 벌어졌다. 뼈마디 사이에 철사를 꼬아 넣기 적합하도록 의도적으로 틈새를 벌려 고정하는 과도기적 경지, 즉 철사융골 준비 단계(Wire Fusion Prep)의 골격이 마침내 그의 육체 깊숙이 완성되었다.
무강의 감겼던 손가락 마디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쥐어졌다. 하반신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며 전신의 기혈이 막힘없이 소통하기 시작했다. 뼈 속의 고열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그의 눈동자가 칠흑 같은 심연의 이성을 되찾았다.
그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던 바로 그 순간.
쉬이이이이익―!
갈대숲 외곽의 밤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요한 습지대의 정적을 산산조각 냈다. 한 줄기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줄기의 붉은 불꽃 선들이 안개 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갈대숲 안쪽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일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화전(火箭) 대열이 마침내 삼경의 포격을 개시한 것이다. 화살 끝에 매달린 불꽃들이 마른 갈대잎에 닿는 순간, 거대한 화염의 장벽이 사방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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