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 다니는 사자
밤안개는 차가운 진흙 냄새를 머금은 채 낮게 깔려 있었다. 키를 훌쩍 넘는 갈대들이 사방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웅성거렸다. 양주성 경계의 갈대숲(Reed Beds of Yangju Border)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습지의 무덤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설무강은 축축한 흙바닥에 누운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골밀도 한계 돌파(Density Breakthrough)의 부작용은 가혹했다. 뼈마디가 스스로 단단해지다 못해 쳇바퀴처럼 서로를 맞물며 석상처럼 잠겨버린 상태. 손가락 끝마디 하나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력감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대장……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백 의원님이 약재를 정리하고 계십니다.”
앳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수제자 아성이었다. 소년은 오수에 적신 낡은 무명 천 조각으로 무강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있었다. 무강의 오른쪽 뺨에는 남궁태의 예리한 창궁검기가 남기고 간 가느다란 찰과상 흉터가 붉은 선을 그리며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성의 거친 손끝이 그 흉터 주변을 스칠 때마다, 무강의 뇌리에는 사촌 형 설무현의 짓무른 시신과 흑철곡 지하에서 무참히 죽어간 광부들의 환영이 피어올랐다.
일어서야 했다. 이대로 굳어버린 채 가축처럼 목이 썰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몸은 무거운 무쇠 주괴가 되어 대지에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때, 막사 입구의 갈대 장막이 거칠게 걷히며 백강혁이 들어섰다.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무강의 가슴 상처에서 묻어난 검은 피와 지혈용 혈갈가루의 흔적이 거뭇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아성아, 뒤로 물러서라. 지금 무강이의 몸은 작은 자극에도 골막이 비명을 지르는 상태다.”
백강혁은 침통을 열어 길고 단단한 은침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신의(神醫)로서의 집착과 제자를 향한 초조함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골쇄초를 생으로 삼키고 대진각을 시전한 대가다. 뼈의 온도를 급격히 낮추어 골막의 팽창을 식히지 않으면, 전신의 기혈이 막혀 심장이 먼저 터질 거다. 뼈의 온도를 낮추고 틈새를 억지로 벌려두는 철사융골 준비 단계(Wire Fusion Prep)로 넘어가야만 살 수 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 극저온의 냉각 매개체가 없어.”
무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목구멍의 관절마저 굳어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오직 차갑게 가라앉은 안광만이 백강혁의 얼굴을 찌를 듯 응시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이 육체의 자물쇠를 풀고 적들의 목을 꺾을 수 있는지 묻는, 광기 어린 무인의 투지였다.
바로 그 순간, 갈대숲 외곽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불길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
단순한 산짐승의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훈련받은 사냥개들의 군집된 포효. 컹! 컹! 안개를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사냥개들의 발소리가 습지대의 진흙을 짓밟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좁혀오고 있었다.
막사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마칠이 다급하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대장, 남궁세가의 북강 지부장 남궁무가 직접 이끄는 정예 수색대입니다! 놈들이 사냥개를 앞세워 피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포위망이 좁혀집니다!”
남궁무(Namgung Mu). 연무장에서 설무강의 맨손에 보검 창천검이 부러지고 어깨가 박살 난 방계 천재 남궁태의 수치와 원한을 갚기 위해, 그리고 천검문과의 추악한 밀약이 담긴 뇌물 장부를 회수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추격해온 자였다. 일류 초입의 강맹한 검기를 지닌 남궁무가 이끄는 수색대가 들이닥친다면, 일어서지도 못하는 무강과 부상당한 노약자 노예들은 고스란히 도살당할 터였다.
‘내가 미끼가 되어야 한다.’
무강은 마음속으로 피를 토하듯 결심했다. 동료들이 숨은 이 임시 막사로 적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일어설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저들의 시선을 돌려야 했다.
무강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사부 독고벽의 가르침을 끌어올렸다.
‘뼈는 부러질수록 단단해지고, 강철은 두드릴수록 예리해진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순간 외공은 무너진다!’
무강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리고 전신의 잠겨 있는 골격을 향해 의지적인 압력을 가했다. 뼈마디를 비틀어 체형을 바꾸는 금단의 신체 제어술, 골격 재배치 비결(Skeletal Realignment Secret)이었다.
득, 으드드득!
소름 끼치는 파골음이 무강의 몸 안쪽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척추뼈마디 사이의 틈새를 억지로 뒤틀어 늘리고, 양쪽 어깨 관절의 요골과 척골을 아래로 비틀어 내렸다. 가슴뼈 아래 박힌 호심침(Heart-Protecting Needle)이 심장 경맥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내부 통증이 밀려왔다. 허파가 찢어질 듯한 극통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으나, 무강은 단 한 마디의 신음도 지르지 않고 흙을 씹으며 비명을 삼켰.
전신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며, 비정상적으로 굳어 있던 뼈마디 사이에 미세한 유격이 생겼다. 하반신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지만, 상반신의 어깨와 팔꿈치 관절은 기괴한 각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무강은 백강혁과 아성을 매섭게 노려보며 눈빛으로 지시했다.
‘나를 진흙 구덩이로 밀어라.’
백강혁은 무강의 뜻을 알아채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놈…… 기어코 개죽음을 자처하는구나.”
하지만 백강혁은 무강의 어깨를 붙잡고 막사 옆의 축축한 진흙 구덩이 속으로 그의 무거운 육체를 밀어 넣었다. 아성이 눈물을 흘리며 무강의 몸 위에 썩은 갈대와 끈적한 진흙을 덮어 씌웠다. 피 냄새와 기척을 지우기 위한 처절한 은폐였다.
무강은 진흙 속에 엎드린 채 숨을 죽였다. 자폐식 호흡법(Self-Sealing Breathing Method)을 가동하여 맥박을 극도로 늦추고 허파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자욱한 밤안개, 그리고 갈대숲의 비린 냄새가 그의 전신을 완벽하게 감싸 안았다. 일어설 수 없는 사자는 진흙 속에서 발톱을 숨긴 채 기어 다니는 야수가 되었다.
저벅, 저벅.
갈대를 헤치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남궁세가의 푸른 무복을 입은 검수 한 명이 횃불을 높이 든 채 무강이 숨은 구덩이 앞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검수의 손에는 예리한 정철 검이 쥐여 있었고, 그의 안광은 사나운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근처에서 피 냄새가 끊겼다. 샅샅이 뒤져라! 남궁태 도련님을 그 꼴로 만든 괴물 노예 놈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지부장님의 명령이다, 발견 즉시 사지를 잘라라!”
검수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가 횃불을 내밀자 붉은 불빛이 무강이 엎드린 진흙 구덩이의 표면을 비추었다.
무강은 골음감지(Bone Sound Perception)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귀를 막은 듯한 진흙 속이었지만, 다가오는 검수의 발가락 뼈가 젖은 흙을 딛는 미세한 마찰음과 그의 오른쪽 무릎 관절이 회전하는 소리가 무강의 뇌리에 입체적인 지도로 그려졌다.
적과의 거리, 단 세 걸음.
무강은 골격 재배치 비결을 가동해 어깨 관절을 한 번 더 뒤틀었다. 기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굳어버린 하반신 때문에 상체를 앞으로 뻗는 리치가 아슬아슬하게 부족했다.
바스락.
무강이 팔을 뻗어 적의 목덜미를 직접 꺾으려 했으나, 손끝이 허공을 가르며 미세한 갈대 마찰음이 발생했다. 실책이었다.
“음? 누구냐!”
검수가 번개처럼 고개를 돌리며 바닥의 미세한 진흙 흔적을 포착했다. 무강이 기어간 자리에 남은 검푸른 진흙의 뒤틀림이었다. 검수는 망설임 없이 창천검을 고쳐 쥐고, 무강이 숨은 갈대 더미를 향해 검 끝을 내리찍으려 했다.
위기의 순간, 무강은 타겟을 바꾸었다. 목이 닿지 않는다면, 대지를 딛고 있는 적의 가장 아래쪽 관절을 노려야 했다.
팟!
진흙 속에서 검푸른 철빛의 손아귀가 전광석화처럼 튀어나왔다. 설무강의 단단한 강철 아귀가 검수의 오른쪽 발목뼈를 정확하게 움켜잡았다.
“엇……?!”
검수가 경악하며 검을 내리치려던 찰나, 무강의 손가락 끝에 무시무시한 완력이 집중되었다.
단골수: 꺾기(Bone-Shattering Snap)!
콰지직! 콰득!
소름 끼치는 파골음이 안개 속에서 고요하게 터져 나왔다. 내공 한 푼 실리지 않은 순수한 철골의 아귀 힘이 검수의 발목 관절과 무릎뼈를 역방향으로 무자비하게 비틀어 버렸다. 단단한 경골과 비골이 일격에 바스러지며 관절구가 완전히 탈골되었다.
“으아아……!”
검수가 극심한 쇼크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려 했다. 그의 입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 무강은 몸의 마비를 버텨내며 다른 손을 뻗었다. 그의 단단한 철골 손바닥이 쓰러지는 검수의 후두부를 움켜잡고,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성대 주변 인대를 물리적으로 강하게 압박했다.
꺽, 끄으윽…….
목구멍이 물리적으로 눌린 검수는 비명 한 자락 지르지 못한 채 눈동자를 뒤집었다. 무강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척추뼈를 가볍게 비틀어 끊어버렸다. 검수의 신체가 끈적한 진흙 바닥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소리 없는 완벽한 암살이었다.
무강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리하게 관절을 뒤틀어 골격을 재배치한 대가로, 그의 양쪽 어깨 인대가 심각하게 늘어나 전신 골막에 타오르는 듯한 염증성 고열이 다시금 치솟았다. 가슴뼈 아래 호심침이 경맥을 찌르며 검은 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지만, 무강은 그것을 강제로 삼켜냈다.
무강은 쓰러진 검수의 품을 거친 손길로 수색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묵직하고 차가운 가죽 주머니가 걸려 나왔다.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서 핏자국이 묻은 두꺼운 장부 한 권이 나타났다. 무강은 밤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비치는 횃불 불빛에 의지해 장부의 첫 장을 넘겼다.
장부의 표지에는 남궁세가 북강 지부의 인장과 함께 기이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갈대숲 소탕 및 화전(火箭) 배치 계획서]
무강의 안광이 순간적으로 매섭게 흔들렸다. 장부의 내용은 단순한 수색 일지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지부장 남궁무가 천검문 본산의 추격대와 결탁하여, 이 갈대숲 전체에 대규모 화공(火攻)을 가해 도망친 노예들과 설무강 일행을 흔적도 없이 태워 죽이려 한다는 극비의 계획이었다.
장부의 마지막 장에는 붉은 글씨로 화공의 개시 시간이 적혀 있었다.
[금일 삼경 기점, 동쪽과 남쪽 관문에서 일제히 화전 발사. 반 시진(半 時進) 내에 갈대숲 전체를 소각함.]
반 시진.
남은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이었다.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설무강과, 습지대 웅덩이에 숨어 있는 수백 명의 노약자 노예들은 화공이 시작되는 순간 꼼짝없이 이 거대한 갈대 무덤 속에서 불타 죽을 운명이었다.
설무강은 가죽 장부를 손아귀에 꽉 쥐었다. 부러진 뼈마디 사이에서 솟구치는 고열과 뺨의 가느다란 흉터가 불타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엄습하는 가운데, 갈대숲 저편에서 붉은 횃불의 무리가 안개를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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