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숲의 숨겨진 성역
축축하고 차가운 진흙이 뺨을 적셨다. 썩은 갈대와 고인 물의 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뺨을 스치는 밤바람은 뼈를 깎아낼 듯 차가웠지만, 설무강은 손가락 끝마디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구간 노예 출신의 희섭이 부러진 마개조 철판 마차를 끌고 남궁세가의 경기마 추격대를 유인하기 위해 황야 반대편으로 말을 몰아간 것은 반 시진 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광부 대장 마칠과 수제자 아성은 설무강의 무거운 육체를 부축하여 양주성 경계의 갈대숲 습지대로 깊숙이 기어들어왔다.
“대장, 조금만 참으십시오. 거의 다 왔습니다.”
마칠이 이빨을 악물며 무강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무강의 육체는 일반인보다 세 배는 더 무거웠다. 골밀도 한계 돌파(Density Breakthrough)의 부작용으로 뼈가 무쇠처럼 단단해지다 못해 비정상적으로 무거워진 탓이었다. 마칠과 아성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한 진흙 속으로 무릎까지 푹푹 빠져들었다. 수백 명의 피난 노예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소리 없이 갈대숲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양주성 경계의 갈대숲(Reed Beds of Yangju Border)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갈대들이 끝없이 펼쳐진 천연의 미로였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 삼엄한 어둠과 질척이는 진흙이야말로 추격대의 기마병들을 따돌릴 수 있는 유일한 장벽이었다.
“여기입니다. 이곳에 막사를 치겠습니다.”
아성이 갈대숲 안쪽의 비교적 마른 웅덩이 지대를 찾아내고 나직하게 말했다. 마칠은 피난 노예들을 신속하게 통솔하여 갈대를 꺾어 지붕을 만들고 흙을 다져 임시 막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가축처럼 쫓기던 민초들의 손길은 처절하리만치 빨랐다.
흙바닥에 깔린 거친 가죽 거적 위에 누워진 설무강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 외에는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어떠한 근육도 반응하지 않았다. 뼈마디가 마치 단단한 쇳덩이 자물쇠로 잠긴 것처럼 서로를 옥죄고 있었다.
“대장…….”
아성이 무릎을 꿇고 다가왔다. 소년의 짧은 머리칼은 진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앳된 얼굴은 극도의 피로로 핼쑥해져 있었다. 아성은 낡은 무명 천 조각을 차가운 오수에 적셔 무강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무강의 오른쪽 뺨에는 남궁태의 예리한 창궁검기가 남기고 간 가느다란 찰과상 흉터가 붉은 선을 그리며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아성의 손길이 그 흉터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무강의 뇌리에 사촌 형 설무현의 비참한 죽음과, 무참히 쓰러져간 광산 동료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
‘내가 일어서야 한다. 이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다.’
무강은 마음속으로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손가락 끝마디조차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무력감이 그의 영혼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평생을 지배층의 채찍 아래서 굴종하며 살았던 노예 시절의 공포가 다시금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드는 듯했다. 하지만 무강은 이빨을 악물었다. 단전이 파괴된 몸으로 사부 독고벽의 유지를 이어받아 정파의 위선을 맨몸으로 부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아성아, 대장 몸에 손대지 마라. 지금은 미세한 자극조차 위험하다.”
약방 의원 백강혁이 술 냄새를 풍기며 어두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무강의 가슴 상처에서 묻어난 검은 피와 지혈용 혈갈가루의 붉은 흔적이 엉겨 붙어 있었다. 백강혁은 무강의 가슴팍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골밀도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어. 골쇄초를 생으로 삼키고 무리하게 대진각을 시전한 탓에, 뼈의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며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거다. 쳇바퀴가 맞물려 굳어버린 것처럼 말이지.”
백강혁은 침통을 열어 길고 단단한 은침을 꺼냈다. 그리고 무강의 가슴뼈 아래 깊숙이 박힌 호심침 주변 혈도를 지그시 눌렀다.
“가슴뼈 아래 호심침이 심장을 자극해 숨통은 붙여놓고 있지만, 이대로 골격이 석화(石化)되면 전신의 혈류가 막혀 결국 심장이 멈추게 된다. 움직이지 못하는 석상이 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거지.”
무강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오직 차가운 안광으로 백강혁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어떻게 해야 이 관절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지 묻는 집요한 무인의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백강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이었다.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뼈의 온도를 급격히 낮추어 골막의 팽창을 가라앉히고, 벌어진 뼈마디 사이의 틈새를 고의로 넓혀두어야 해. 그래야 훗날 양주성의 비밀 대장간 철기방에 도달했을 때, 뼈 사이에 탄성 철사를 심는 시술을 감당할 수 있다. 즉, 지금부터 철사융골 준비 단계(Wire Fusion Prep)로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철사융골 준비 단계. 뼈를 완전히 붙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틈새를 벌려 금속 물질을 이식받기 적합한 구조로 만드는 과도기적 경지였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신 뼈 속에 끓어오르는 골막의 염증성 고열을 식혀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뼈 속 깊은 곳의 온도를 단숨에 낮출 수 있는 극저온의 약재가 없다. 북강 황야의 밤바람 따위로는 이 무쇠 같은 철골의 열기를 식힐 수 없어.”
백강혁의 목소리에 깊은 좌절감이 묻어났다. 품속에 든 독각사 담즙은 훗날 시술 시 신경 마취제로 써야 하기에 지금 낭비할 수 없었다. 무강의 호흡은 갈수록 거칠어졌고, 그의 피부 아래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증식한 골막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임시 막사 밖에서는 마칠이 피난 노예들을 다독이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질척이는 진흙 소리와 갈대 부딪히는 소리만이 쓸쓸하게 울려 퍼지는 밤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우우우우우―!
자욱한 안개 너머, 갈대숲 외곽의 어둠 속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불길하고 거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단순한 들개의 소리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냥개들의 군집된 포효였다.
“적습이다……!”
경계를 서던 마칠이 막사 안으로 다급하게 머리를 들이밀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남궁세가의 북강 지부장 남궁무가 보낸 특수 사냥개들이 마차를 버리고 습지대로 숨어든 피난민들의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오고 있었다. 컹! 컹! 안개를 뚫고 좁혀오는 사냥개들의 울음소리가 갈대숲의 고요를 무참히 찢어발겼다.
설무강은 누운 채로 차갑게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칠흑 같은 무력감 속에서, 사냥개들의 서늘한 울음소리가 그의 전신 철골을 무섭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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