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 7의 첩보선
붉은 머리띠의 거친 감촉이 이마를 조여왔다. 버려진 지하철 3호선 터널의 습한 공기 속에서, 윤시우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았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푸른색 잔상. 양자 붕괴율 65%의 경고등은 가슴 깊은 곳에서 여전히 박동치며 뼈를 깎아내는 듯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육체가 보내는 비명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시우는 표정을 굳힌 채 숨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지금 그가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터널 중앙에 배치된 낡은 철제 테이블 위로 푸른색 홀로그램 불빛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저항군 ‘언더그라운드’의 총사령관 김성태가 거구의 몸을 숙인 채 테이블을 짚었다. 그의 등 뒤에 거치된 고철 방패 ‘이글리스’가 웅장한 금속성 기계음을 내며 유압식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왔군, 시우.”
김성태의 목소리가 터널 내부의 무거운 공기를 울렸다. 그의 시선이 시우의 이마에 묶인 붉은 머리띠에 머물렀다. 모의 대결에서의 의심은 사라졌지만, 전장의 사선을 함께 넘어야 할 동지로서의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김성태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맞은편의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우리 팀의 가장 날카로운 두뇌다. 에이지스의 통신망을 찢어발길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지.”
어둠 속에서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두꺼운 뿔테안경 너머로 지적인 눈빛을 반짝이는 그녀, 저항군의 정보원 신유리였다. 그녀의 손에는 에이지스의 군용 폐자재를 조잡하게 납땜해 만든 초소형 퀀텀 해킹 디바이스가 쥐여져 있었다. 유리는 시우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한마디 대꾸도 없이 디바이스를 홀로그램 단말기에 연결했다.
치지직!
찰나의 전자기 스파크와 함께 유리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푸른색 홀로그램 모니터가 기하학적인 원형 격자망을 그리며 펼쳐졌다. 화면 가득 에이지스 군부의 복잡한 전뇌 보안 코드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에이지스의 보급품 수송로 ‘루트 7’을 통과하는 보안 장갑차의 실시간 좌표를 해킹할 거야.”
유리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녀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전뇌 세포 동조 조율법을 가동했다. 뇌 신경망에 기계적 주파수를 직접 주입하는 고도의 연산법이었다. 유리의 눈동자 주변의 미세혈관들이 기하학적인 회로 모양으로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계산 속도가 일반인의 수십 배로 폭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에이지스 본사의 방어벽 역시 만만치 않았다. 유리가 군부 기밀망의 1차 격벽에 접속하는 순간, 모니터 화면이 붉은색 경고등으로 물들며 사나운 노이즈가 발생했다.
위이이잉!
“3중 방화벽 가동. 해킹 툴을 역으로 부식시키는 전자기 독소 프로토콜이야.”
유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뇌 세포의 극심한 칼로리 소모로 인해 그녀의 눈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빠르게 내려앉았다. 기밀망의 방화벽은 유리의 퀀텀 디바이스 회로를 태워버릴 듯이 거센 전자기 왜곡 파동을 역방향으로 격발하고 있었다. 유리는 뇌의 부하를 견디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주파수 동조율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우는 가슴의 찌르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유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찾는 ‘프로토타입 차원 안정기’가 저 루트 7의 장갑차에 실려 있다는 확증이 필요했다. 하지만 유리가 군부의 철벽같은 보안망과 싸우는 동안, 시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시우 형.”
그때, 터널 안쪽의 임시 수련장 방향에서 땟국물 묻은 낡은 후드티를 입은 소년이 걸어 나왔다. 의형제 민우였다. 소년의 목에 걸린 태엽식 구리 나침반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민우의 뒤편에는 지적인 눈매를 지닌 여성 저항군, 고은아가 은사 장갑을 낀 손을 가볍게 털며 서 있었다.
“은아 누나가 내 염동력 제어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잘 안 돼요.”
민우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년의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각성 초기의 붉은 마력 기류가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고은아 수녀가 시우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의 염동력 잠재력은 엄청나요. 하지만 힘을 방출하는 통로가 너무 좁아서 마력이 뇌 신경계로 역류하고 있어요. 이대로 두면 뇌 신경이 완전히 타버릴지도 몰라요.”
그 순간, 민우가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소년의 뺨에 푸른 핏줄이 돋아나며 주변의 고철 파편들이 날카로운 기류를 두르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단거리 염동력이 격발되는 순간이었다.
“민우야, 멈춰!”
은아의 외침이 터지기도 전에, 민우의 마력 순환계가 급격히 꼬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오른 고철들이 제어력을 잃고 폭주하며 민우 본인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민우의 뇌압이 한계치까지 치솟으며 소년의 코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뇌 신경망이 파열되기 직전의 백래시 위기였다.
“형...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민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다. 공중에 떠 있던 무거운 무쇠 지게 부품들이 낙하하며 소년의 머리를 짓누르려던 그 찰나, 시우의 육체가 움직였다.
스윽.
시우는 자신의 양자 붕괴 통증을 억누르며 단숨에 민우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민우를 한 팔로 안아 올리는 동시에, 오른손가락으로 소년의 목 뒤 경동맥과 뇌 송과체로 이어지는 미세 혈류 지점을 정확히 짚었다.
‘양자 동조 호흡법.’
스승 한백현에게 배웠던 태초의 우주 호흡법이었다. 시우는 자신의 체내에 흐르는 미세한 양자 주파수를 손가락 끝을 통해 민우의 경동맥으로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들이쉬고 내쉬는 일정한 호흡의 주기를 민우의 폭주하는 뇌파 파형에 강제로 동조시키는 비술이었다.
“민우야, 내 호흡을 따라 해라. 들이쉬고, 내쉬고. 네 뇌리에 일렁이는 불꽃을 가슴 아래로 가라앉혀.”
시우의 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민우의 귀청을 때렸다. 시우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푸른빛 서리가 민우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폭주하던 민우의 붉은 마력 기류가 시우의 정교한 주파수 제어에 반응하며 서서히 안정적인 궤도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은아 수녀가 자신의 특수 은사 장갑을 가동해 민우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잔여 염력 파동을 미세하게 분산시켰다. 공중에 떠돌던 고철 파편들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하아... 하아...”
민우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평탄해졌다. 소년은 코피를 닦아내며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잔존해 있던 붉은 기류는 이제 폭주하는 화염이 아닌, 차분하게 다듬어진 불씨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고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우를 향해 깊은 경외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놀랍네요. 이토록 정교하게 타인의 폭주하는 마력을 진정시키다니... 일반적인 각성자의 통제력을 아득히 초월했어요.”
“스승님께 배운 기초일 뿐입니다.”
시우는 덤덤하게 말하며 민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마력을 방출해 동조를 유도한 대가로, 시우의 전뇌 세포 역시 징벌 같은 편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왼쪽 안구의 미세혈관이 파열되는 불쾌한 압박감이 전해졌으나, 시우는 이마의 붉은 머리띠를 다시 한번 질끈 동여매며 내색하지 않았다.
“뚫었어!”
그때, 저항군 정보실 방향에서 신유리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우와 김성태는 즉각 유리의 모니터 앞으로 뛰어갔다. 퀀텀 해킹 디바이스의 화면이 붉은색 경고등을 지워내고 선명한 녹색의 암호 디코딩 화면을 띄우고 있었다. 3중 방화벽의 전자기 독소를 우회하는 다차원 수식 연산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루트 7을 지나가는 에이지스 군용 장갑차의 실시간 적재 목록이야.”
유리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했다. 수십 개의 군수품 코드 사이로, 시우가 그토록 갈망하던 단 하나의 명칭이 푸른빛 글씨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프로토타입 차원 안정기 (Prototype Dimension Stabilizer) - 적재 완료]
“진짜 실려 있군.”
김성태가 침을 삼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우의 가슴속에서도 묵직한 생존의 불꽃이 요동쳤다. 드디어 생명선을 확보할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유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녀는 추가적인 보안 데이터를 띄우며 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떴다.
“문제는 수송대의 전력이야. 장갑차의 호위 책임자는 에이지스 사관학교 출신의 철저한 원칙주의자, 황대위(Hwang Dae-wi)야. 게다가 해킹한 데이터에 따르면, 루트 7 고속도로에 배치된 무인 감시탑들과 기갑 사이클 부대의 순찰 강도가 평소보다 2배 이상 강화되었어. 이건 단순한 수송이 아니라, 완벽한 요격 진형이야.”
습격 예정 도로인 루트 7의 삼엄한 방어선이 홀로그램 지도 위에 붉은색 점들로 빽빽하게 늘어섰다. 습격 타이머가 지직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가동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단 몇 시간뿐이었다.
시우는 이마의 붉은 머리띠를 만지작거리며 붉게 물든 지도를 응시했다. 함정이 도사리는 사선이었지만, 그곳을 찢어발기지 않으면 자신에게 미래는 없었다. 새로운 전운이 버려진 지하철 터널의 어둠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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