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밴드의 의리
축축한 지하 하수관의 콘크리트 벽을 따라 찌르르한 진동이 울렸다. 폐허가 된 제9구역의 남부 피난처에서 터진 김중사의 화염방사기 폭발음이 이곳 지하 수로까지 미세한 메아리로 전해지고 있었다.
"형, 조금만 더 참아요. 거의 다 왔어요!"
민우가 작은 어깨로 윤시우의 허리를 부축하며 이를 악물었다. 소년의 이마에는 땀방울과 송글송글 맺힌 핏방울이 흙먼지와 뒤섞여 엉망이었다. 시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자락이 마치 밤안개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푸르스름한 반투명 상태로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양자 붕괴율 65% 돌파.
심장 부근의 가슴팍을 짓누르는 고통은 단순한 물리적 통증이 아니었다. 독고진이 빌려준 양자 위장복 코트를 벗어던진 대가는 가혹했다. 가슴에 새겨진 푸른색 균열 모양의 괴사 흉터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보랏빛 광채를 미세하게 머금은 검은 피가 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세포가 나선형으로 해체되는 감각이 척수를 타고 뇌를 마비시켰다. 귀청을 찢는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아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지옥의 불길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민우야... 아이들은... 무사하냐?"
갈라진 목소리로 시우가 묻자, 민우는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김춘자 할머니가 블랙마켓 대피소에서 애들을 다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했어요. 우리 뒤를 따라 저항군 가이드가 안내하는 통로로 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형 몸부터 신경 써요."
시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이내 입안 가득 고이는 비린 검은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 에이지스 특별수색대의 추격 사이렌 소리가 먼 하수구 환기구 너머로 유령처럼 윙윙거렸다. 그들의 기계 사냥개들이 언제 이 지하 수로의 냄새를 맡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 그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제9구역의 유일한 반군 세력, 지하 저항군 ‘언더그라운드’의 비밀 본거지뿐이었다.
어둠 속을 기어오르듯 전진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빗물 배수관의 끝자락에서 거대한 철제 격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버려진 지하철 3호선 터널의 비상 회차로였다.
철컥! 웅웅웅!
갑작스럽게 터널 천장에 매달린 서치라이트 수십 개가 일제히 불을 밝히며 시우와 민우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차가운 전자기 스파크 소리와 함께, 붉은색 천 머리띠를 이마에 단단히 동여맨 무장 괴한 수십 명이 어둠 속에서 총구를 겨누며 들이닥쳤다.
"움직이지 마라!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 자리에서 정수를 추출해 버리겠다!"
그들 사이를 헤치며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 키 190cm에 달하는 압도적인 체구, 덥수룩한 턱수염 아래로 단단하게 다물어진 입술, 그리고 등 뒤에 메고 있던 거대한 기계식 고철 방패를 바닥으로 쾅 내려놓는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성벽 같았다.
지하 저항군 ‘언더그라운드’의 대장, B급 중장갑 방어계 능력자 김성태였다.
김성태는 먼지투성이 보안경 너머로 시우의 반투명하게 흔들리는 신체 윤곽과 가슴의 흘러내리는 검은 피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등 뒤에 거치된 고철 방패 ‘이글리스’의 압력 센서가 활성화되며 웅장한 기계음을 흘렸다.
"에이지스의 첩자 놈이 결국 쥐새끼들을 이끌고 본거지까지 기어들어 왔군. 방금 남부 구역에서 엄청난 양자 에너지 폭발이 감지되었다. 에이지스 수색대의 이목을 우리 아지트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되지."
"아닙니다! 성태 아저씨! 이 형은 에이지스 사냥개들을 막아준 사람이에요! 우리 피난처가 불탈 때 목숨을 걸고...!"
민우가 시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지만, 김성태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9구역에서 에이지스의 기만과 배신을 수없이 목격해 온 그에게 정체불명의 강력한 이능력자는 그저 시한폭탄에 불과했다.
"민우야, 비켜라. 저놈의 몸에서 뿜어지는 파동은 일반적인 각성자의 수준이 아니다. 에이지스가 심어둔 특급 기갑 스파이일 가능성이 높아. 검증되지 않은 자는 이 터널에 들일 수 없다."
김성태가 오른손으로 고철 방패 이글리스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에이지스 장갑차의 외판 티타늄 장갑을 뜯어내어 조립했다는 거대 방패가 사나운 기계음을 내며 충격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직접 저 가면을 벗겨주지."
스릉!
김성태가 이글리스 방패의 하단을 지면을 향해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콰아아앙!
방패 내부의 유압식 완충 장치가 과부하되며 지면을 타고 강력한 대지 분쇄 충격파가 시우를 향해 덮쳐왔다. 콘크리트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도약하여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전 전투에서 세 번째 분신 감마의 소환을 시도하다가 박살 난 전뇌 세포의 마비 반동이 다리 근육을 강타했다.
"윽...!"
다리에 쥐가 나며 무릎이 꺾였다. 피할 타이밍을 놓친 시우의 눈앞으로 김성태의 거구와 함께 거대한 강철 방패의 단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콰직!
김성태는 사정없이 이글리스 방패의 모서리로 시우의 가슴팍을 찍어 눌렀. 80kg이 넘는 방패의 무게와 중장갑 근력이 시우의 부러진 갈비뼈를 압박했다. 숨통이 턱 막히며 시우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방패의 붉은 녹 부분을 적셨다.
"말해라. 네놈을 보낸 자가 강태오냐, 아니면 본사의 서준혁이냐?"
김성태의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시우는 짓눌린 방패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며 냉정하게 연산했다. 정면 정공법으로는 이 거구의 방어력을 뚫을 수 없다. 심장의 괴사 통증이 극에 달해 마력을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했다. 방패를 정면으로 밀어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렇다면 방패의 사각지대, 오직 뒤편의 공간만을 노려야 했다.
시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전뇌 세포의 고열 통증을 무시한 채, 한백현에게 배운 양자 동조 주파수를 뇌리 속에 기하학적으로 정렬했다. 이번에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일반 분신 소환이 아니었다. 소닉붐 소음을 최소화하는 ‘무음 위상 동기화’ 규칙의 극한 기동이었다.
‘위상 동기화... 기압 축 조율.’
시우는 김성태의 등 뒤, 방패가 가리지 못한 차가운 공기층의 기압 수치를 0.001초 만에 계산해 냈다.
스윽.
김성태의 방패 아래 깔려 있던 시우의 육체가 푸른색 잔상 노이즈를 일으키며 거짓말처럼 투명하게 사라졌다.
"뭐?!"
김성태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이글리스 방패가 허공의 흙먼지만을 짓눌렀을 뿐, 그 아래 있어야 할 사내의 형체가 온데간데없이 증발한 것이다. 방패 전면의 압력 센서가 급격한 부하 상실로 삑삑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스으읍.
김성태의 등 뒤, 차가운 하수구 바람이 머무는 허공에서 미세한 보랏빛 아른거림과 함께 윤시우의 본체가 실체화되었다. 콰앙 하는 기압 파열음조차 없었다. 완벽한 무음 위상 전환이었다.
스릉.
시우는 오른손에 쥔 양자 단검 페이즈 블레이드를 가볍게 쥐었다. 단검의 칼날 주변 위상이 비틀리며 은은한 보랏빛 스파크를 튀겼다. 시우의 단검 끝날은 김성태의 덥수룩한 수염이 자라난 경동맥 피부 앞 정확히 1cm 지점에 멈춰 서 있었다.
"거기까지."
시우의 나직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김성태의 귓가를 때렸다.
터널 안의 모든 무장 대원들이 숨을 죽였다. 김성태의 거구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글리스 방패의 완충 장치가 지직거리며 뒤늦게 열을 방출하고 있었으나, 이미 승부는 결정된 뒤였다. 시우가 조금만 마력을 주입했다면 위상 왜곡 칼날은 김성태의 목뼈를 두부처럼 가볍게 관통했을 터였다.
"크으윽...!"
하지만 승리의 카타르시스도 잠시, 무리하게 무음 조약 위상 전환을 가동한 대가가 시우의 뇌를 강타했다. 머릿속이 깨질 듯한 편두통과 함께 왼쪽 안구에서 미세한 피가 흘러내렸다. 시우는 이를 악물고 단검을 쥔 손을 꼿꼿이 유지하려 애썼다.
"성태 아저씨! 제발 그만해요!"
그때, 터널 안쪽의 어둠 속에서 낡은 진공관 라디오의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소리와 함께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백발을 뒤로 대충 묶고 작업용 보안경을 쓴 노인, 한백현이었다.
"성태야, 그 무식한 방패는 치워라. 내 제자가 네 목을 베지 않은 것만으로도 네놈은 오늘 목숨을 한 번 빚진 게야."
"한 노인장...?!"
김성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한백현의 등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과거 차원 수호자 시절의 희미한 인연이 그들의 눈빛 사이로 교차했다. 김성태는 천천히 이글리스 방패를 내리며 시우의 단검 끝에서 비켜섰다. 시우 역시 단검의 위상을 끄고 그것을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으나, 전신의 힘이 빠져 비틀거렸다.
백현은 시우의 어깨를 묵묵히 부축하더니, 시우의 셔츠 깃을 거칠게 잡아당겨 뒤로 젖혔.
"이걸 봐라."
터널의 붉은 서치라이트 불빛 아래, 시우의 심장 부근에 새겨진 참혹한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푸른색과 보랏빛 균열이 피부를 파먹어 들어가며 검은 피를 내뿜고 있는 세포 괴사의 흔적. 그것은 단순히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다차원으로 분열되며 소멸해 가고 있는 절대자의 끔찍한 등가교환 흉터였다.
저항군 대원들 사이에서 나직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김성태 역시 그 기괴하고 비장한 흉터를 보며 침을 삼켰다.
"이 녀석은 에이지스의 스파이가 아니다. 오히려 에이지스 군부와 그 배후의 사냥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냥하려는 최고의 특급 타깃이지."
한백현의 목소리가 터널 내부의 습한 공기를 무겁게 울렸다.
"이 녀석의 유전자는 지금 매초 단위로 붕괴하고 있다. 스스로를 쪼개어 슬럼가의 아이들을 구한 대가다. 저항군 대장이라는 녀석이 약자를 지키다 죽어가는 각성자를 첩자로 몰아 죽이려 들다니, 언더그라운드의 의리가 고작 이 정도였더냐?"
김성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묵묵히 고철 방패를 등 뒤에 거치하며 시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거친 무인이었지만 불의를 저지르고 핑계를 대는 성격은 아니었다.
"...내가 미숙했다. 제9구역의 생존자들을 구한 은인에게 무례를 범했군. 사과하지."
성태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백현과 시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노인장, 그렇다면 이 자가 살아남을 방법은 정녕 없는 겁니까? 저 흉터는 일반적인 야매 약초나 진통제로는 도저히 수복할 수 없어 보입니다만."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우의 손목을 가리켰다.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에이지스 군부가 상층부로 수송하려는 프로토타입 '차원 안정기'가 필요해. 그것만이 시우의 양자 붕괴율을 강제로 제어하고 신체를 고정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선이다."
"차원 안정기..."
김성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저항군 대원 중 한 명에게 손짓했다. 대원이 건넨 붉은색 천 머리띠를 받아든 김성태가 그것을 시우의 눈앞에 툭 던졌다.
"마침 우리 정보원이 에이지스 군부의 수송 차량이 루트 7 고속도로를 통해 핵심 물자를 이송한다는 정보를 물어왔다. 그 장비가 네놈의 생명선이라면, 우리 저항군과 함께 그 수송선을 타격하자."
김성태가 시우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묵직한 거인의 완력이었지만, 이번에는 적의가 아닌 기묘한 동지애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에이지스의 숨통을 끊을 암호 칩이 필요하고, 너는 살아야 한다. 조건은 심플하다. 우리 터널에 머무는 대가로, 수송선 습격 작전의 선봉에 서라."
시우는 바닥에 떨어진 붉은 머리띠를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가식 없는 슬럼가 저항군들의 뜨거운 의리가 서린 붉은 천.
시우는 묵묵히 손을 뻗어 붉은 머리띠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단단히 동여맸다. 머릿속을 헤집던 편두통이 비장한 각오와 함께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좋다. 수송선은 내가 찢어발겨 주지."
시우의 차분하고 냉혹한 선언과 함께, 멸망 직전의 제9구역 지하 터널 속에서 새로운 동맹의 불꽃이 소리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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