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집과 보랏빛 위장
붉은색 서치라이트가 골목 입구를 쓸고 지나가는 찰나, 윤시우는 숨을 죽였다.
스카이아이(SkyEye)의 광학 렌즈가 뿜어내는 열선이 머리칼을 스치며 지독한 오존 냄새를 풍겼다. 시우는 한 팔로 민우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김춘자 할머니를 무너진 콘크리트 벽 뒤로 밀착시켰다. 웅웅거리는 무인 비행체의 모터 소리가 머리 위에서 불길하게 회전했다. 심장 부근의 푸른 괴사 흉터가 맥박에 맞춰 욱신거렸다. 붕괴율 50%. 전뇌 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열감이 척수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시우는 단 한 모금의 숨소리조차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적들의 수색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촘촘했다. 방금 전 에이지스 장병들을 때려눕힌 탓에 제9구역 전체에 비상경보가 격발된 상태였다.
서치라이트의 붉은 광선이 골목 구석을 한 번 더 훑은 뒤에야 멀어졌다. 시우는 민우를 안아 올렸다. 소년의 코밑에는 방금 전 염동력을 억지로 쥐어짜다 흘린 붉은 코피가 굳어가고 있었다.
“할머니, 제 옷자락을 잡으세요. 여기서 더 지체하면 기계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고 들이닥칠 겁니다.”
시우는 한백현 노인이 일러준 지하 탈출로를 떠올렸다. 에이지스의 레이더망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공백지대. 버려진 지하철 3호선 선로를 따라 형성된 무법의 암시장, 지하 시장 ‘블랙마켓’으로 통하는 하수 배관 입구였다.
시우는 녹슨 철망을 뜯어내고 차가운 오수가 흐르는 지하 터널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할머니와 민우를 조심스럽게 인도하며, 어둠이 짙게 깔린 하수관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방을 진동하는 썩은 물 냄새 사이로 끈적한 기계 기름 냄새와 석탄 타는 냄새가 섞여 들기 시작했다. 선로 모퉁이를 돌자, 어둠 속에 숨겨진 거대한 지하 세계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무너진 선로 위에 조잡하게 조립된 컨테이너들과 빛바랜 천막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붉고 노란 불법 네온사인들이 지직거리며 안개 낀 지하 공기를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이곳이 바로 에이지스의 독점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며 독자적인 경제망을 유지하는 블랙마켓 상인 연합의 심장부였다. 사설 경비병들이 고철 소총을 든 채 통로를 감시하고 있었고, 절박한 표정의 각성자들과 암시장 밀매상들이 은밀하게 속삭이며 물건을 주고받았다.
시우는 한백현이 쥐여준 구식 지하철 승차권 모양의 암시장 출입증을 입구 리더기에 인식시켰다. 삑 하는 기계음과 함께 낡은 철문이 열렸다. 시우는 민우와 할머니를 상인 연합의 비호 아래 있는 임시 대피소에 안전하게 머물게 한 뒤, 단독으로 블랙마켓 가장 깊숙한 구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제9구역의 수배자가 된 자신이 지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줄 유일한 보명 장비, ‘양자 위장복’을 소지한 무기 밀매상 독고진을 찾는 것.
폐기된 전철 객차를 개조해 만든 철제 작업실 앞. 짙은 담배 연기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전선 더미와 불법 무기 부품들이 가득한 탁자 너머로 한 남자가 보였다.
독고진이었다.
그는 어두운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금테 선글라스를 낀 채, 입에 두꺼운 시가를 물고 있었다. 가죽 재킷 안감에는 온갖 기괴한 기계 장치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독고진은 시우가 들어서는 순간에도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한 노인네가 보낸 쥐새끼가 결국 사고를 치고 기어들어 왔군.”
독고진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걸걸했다. 그는 천천히 선글라스를 코끝으로 내리며 시우를 응시했다. 독고진의 눈동자가 시우의 가슴팍을 향해 고정되었다. 낡은 가죽 코트 틈새로, 시우의 심장 부근 괴사 흉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 양자 붕괴 광채가 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너, 몸뚱이가 아주 기가 막힌 주파수로 쪼개지고 있군. 그 양자 붕괴율 센서 불빛 좀 봐라. 일반적인 각성자의 파동이 아니야. 다른 평행세계의 냄새가 나.”
독고진이 시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래를 하자고? 좋아. 그 가슴팍에 흐르는 순수 양자 정수(Quantum Essence)를 딱 한 바이알만 추출해서 넘겨라. 그러면 에이지스의 감시망을 완벽히 피해 갈 수 있는 내 최고의 보물, 양자 위장복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지. 어때, 꽤 남는 장사 아닌가?”
시우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양자 정수의 추출. 그것은 현재 50%에 달하는 자신의 양자 붕괴율을 단숨에 폭주시킬 자살행위였다. 정수를 빼앗기는 순간, 몸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평행세계의 먼지가 되어 소멸할 터였다. 독고진은 시우의 절박함을 이용해 그의 생명력을 사냥하려 하고 있었다.
“내 정수를 원하면, 먼저 네 목숨부터 내놓아야 할 거다.”
시우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의 음성에는 분노 대신 뼛속까지 시려오는 차가운 살기가 실려 있었다.
“허어, 쥐새끼가 제법 사납게 구는군. 여긴 블랙마켓 상인 연합의 규정이 지배하는 곳이다. 무력을 쓰면 즉시 처단당할 텐데?”
독고진이 비열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려 했다. 사설 경비병들을 부르려는 수작이었다.
그 손가락이 맞부딪치기 직전, 시우가 오른손을 가볍게 뻗었다. 소리도, 예고도 없었다.
시우는 전뇌 세포의 신경망을 아주 미세하게 자극하여, 양자 단검 페이즈 블레이드의 위상 왜곡 주파수를 손가락 끝에 실었다. 아주 미미한, 단 0.001초 동안의 차원 위상 전환(Phase Shift)이었다.
스윽.
독고진이 물고 있던 시가의 빨갛게 타오르던 끝부분이 기하학적으로 깔끔하게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독고진은 단 한 줌의 열기도, 바람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다. 공간의 위상 자체가 비틀려 시가의 분자 구조를 잘라낸 것이었다. 만약 시우가 조준점을 그의 목덜미로 잡았다면, 독고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갔을 터였다.
독고진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려 선글라스 테를 타고 떨어졌다.
“...공간 자체를 베어냈다고? 위상 왜곡인가.”
독고진의 눈빛이 탐욕에서 경외감으로, 그리고 이내 영악한 장사꾼의 계산적인 눈빛으로 빠르게 변했다. 그는 잘려 나간 시가 꽁초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시우가 가진 이능력은 단순한 D급 각성자의 수준이 아니었다.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에이지스의 독점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규격 외의 파괴력이었다.
“하하하! 역시 한 노인네가 보통 물건을 보낸 게 아니었어. 마음에 드는군, 아주 마음에 들어.”
독고진이 태도를 싹 바꾸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탁자 아래의 두꺼운 강철 금고를 열고, 낡았지만 은은한 은빛 광막이 흐르는 낡은 가죽 후드 코트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독고진의 양자 위장복이다. 대재앙 당시 추락한 에이지스 정찰 위성의 잔해에서 추출한 ‘양자 차단 전도체’ 합금을 코트 내부 안감에 촘촘히 덧대어 만들었지. 이걸 입고 지퍼를 올리면, 에이지스의 고성능 레이더와 감시 위성의 주파수를 99% 차단해 준다. 지상으로 나가 수배자 신세를 면하기엔 이만한 물건이 없지.”
시우는 코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코트의 실버그레이 안감에서 미세한 전자기적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건이 뭐지?”
시우의 냉정한 질문에 독고진이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속삭였다.
“공짜는 없다고 했잖아? 계약을 하자고. 조만간 에이지스 특별수색대가 센트럴 돔에서 제9구역 전진기지로 향하는 극비 수송 차량 ‘루트 7’을 운행할 거다. 거기엔 네 유전자 붕괴를 막아줄 프로토타입 차원 안정기가 실려 있지. 넌 안정기를 훔치고, 난 그 차량에 실린 군부의 핵심 기밀 암호 칩과 에너지를 원해. 그 수송 차량의 이동 경로와 보안 코드를 훔쳐서 나한테 가져와라. 어때, 서로 윈윈하는 거래잖아?”
시우는 가만히 가슴의 괴사 흉터를 만졌다. 독고진과의 거래는 위험했다. 군부의 핵심 수송로를 습격해야 하는 파멸적인 미래의 채무 계약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지상으로 나가 안정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이 위장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거래는 성립했다.”
시우는 탁자 위의 양자 위장복을 집어 들어 거칠게 몸에 걸쳤다.
코트의 지퍼를 목끝까지 채우고 후드를 깊게 눌러쓰는 순간, 안감에 내장된 양자 차단 전도체 회로가 활성화되었다. 웅- 하는 미세한 진동음과 함께 시우의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던 푸른빛 붕괴 광채가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몸의 윤곽을 흐리던 불안정한 잔상들이 위장복의 은빛 광막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지독했던 전뇌의 두통이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아주 딱 맞는군. 거래가 깨지면 내 정보망이 널 에이지스보다 먼저 찾아낼 테니 딴생각은 말라고, 친구.”
독고진의 비열한 배웅을 뒤로하고, 시우는 블랙마켓의 어두운 출구 터널을 향해 걸어 나갔.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 위, 제9구역 외곽 장벽선 부근에는 이미 에이지스 특별수색대의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색대원들이 고성능 전자기 스캐너를 들고 지나가는 주민들의 이마를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고 있었다. 붉은색 레이저 감시망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검문소 입구.
시우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위장복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
삐빅- 삐빅-
앞서가던 각성자가 미세한 파동 기준치 초과로 경보음과 함께 장병들에게 끌려가 비명을 질렀다.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았다. 시우가 붉은 레이저 격자망을 통과하는 순간.
침묵.
스캐너의 붉은 광선이 시우의 온몸을 훑었으나, 코트 안감의 차단 전도체가 탐지 주파수를 완벽히 흡수하여 소멸시켰다. 단 한 발의 경보음도 울리지 않았다. 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장병들의 감시를 유유히 통과해 지상의 어두운 폐허 거리로 걸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후드 자락을 걷어 올린 시우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제9구역의 깨진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보랏빛 차원 균열. 하늘을 거대하게 찢어발긴 그 어둠의 틈새가 갑자기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균열 너머에서 불어오는 보랏빛 양자 폭풍의 기류가 대기를 짓누르며, 마치 거대한 괴수의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불길하고 차가운 인과율의 파동을 제9구역 전체에 흘리고 있었다.
시우는 가슴의 반지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파멸의 전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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