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가의 눈물과 강철의 그물
지하 아지트의 천장에서 미세한 흙먼지가 부슬부슬 떨어져 내렸다. 녹슨 파이프라인을 타고 흐르는 오수의 불쾌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윤시우의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시우는 거친 가마니 위에 누워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 정중앙, 심장 부근에 새겨진 푸른색 괴사 흉터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맥동할 때마다 전뇌를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억지로 참으려 하지 마라. 양자 붕괴율이 50%를 넘어선 상태에서 마력을 강제로 억누르면, 네 신경계가 먼저 타버릴 게다.”
어둠 속에서 나직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백현이었다. 노인은 한쪽 눈의 의안을 번뜩이며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진공관 라디오의 내부 회로를 납땜하고 있었다. 지난 전투의 충격파로 인해 완전히 그을려 버린 라디오의 진공관 끝에서 지독한 납땜 냄새와 함께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왔지만, 시우의 양자 파동을 진정시켜 주던 특유의 억제 주파수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에이지스 놈들의 정찰병을 처리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방사된 특이 양자 주파수가 하늘에 떠 있는 ‘스카이아이(SkyEye)’ 감시 위성에 잡혔을 게 확실해. 지금 제9구역 전체에 삼엄한 경계령이 내려진 상태다. 당분간은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야 해.”
백현의 경고는 차가웠지만 사실이었다. 시우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죽 코트 자락을 매만졌다. 분신 알파가 고주파 진동 단도에 꿰뚫려 소멸할 때 겪었던 영혼이 찢기는 듯한 통증은 아직도 그의 신경 세포 곳곳에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분신이 파괴되면 본체의 영혼 수명이 영구히 단축된다는 가혹한 등가교환의 법칙. 시우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기억을 잃은 자신을 지켜준 노인과 이 황량한 슬럼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일주일 안에 에이지스 군부의 수송선을 습격해 세포 붕괴를 막아줄 ‘차원 안정기’를 확보해야만 했다.
답답한 아지트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시우는 백현의 만류를 뒤로하고 낡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지상으로 향했다.
고물상 문을 열고 한 걸음 내딛자마자, 서울 제9구역의 황량하고 비참한 풍경이 시우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늘은 거대한 보랏빛 차원 균열로 인해 찢겨 있었고, 그 틈새로 흘러나온 기괴한 오로라가 무너진 고층 빌딩 폐허 위를 유령처럼 일렁였다. 공기 중에는 미세한 방사능 낙진이 섞여 있어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칼칼하게 가라앉았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들은 고철 더미를 뒤지며 쓸만한 부품을 찾고 있었고, 성인들은 에이지스 군부가 강제로 규정한 에너지 채굴장에 동원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들이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채굴한 미량의 이능력 정수를 바쳐야만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에이지스가 발행한 조잡한 마그네틱 전자 칩, ‘하프 코인(Half Coin)’ 몇 장뿐이었다. 그 하프 코인이 없으면 오염되지 않은 정제수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배급제 사회. 이곳은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배제된 거대한 가두리 수용소였다.
시우는 씁쓸한 마음을 누르며 슬럼가 한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국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천막을 덧댄 그곳은 이 비정한 디스토피아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김춘자 할머니의 가게였다.
“어이구, 시우 총각 왔구만. 얼굴색이 왜 이렇게 흙빛이야? 또 굶고 다녔지?”
얼룩진 앞치마를 두른 김춘자 할머니가 걸걸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퍼부으며 뚝배기를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비록 고기 건더기는 거의 없고 시래기만 가득한 맑은 국밥이었지만, 시우에게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따뜻한 일상의 상징이었다.
“형!”
가게 안쪽에서 땟국물 흐르는 낡은 후드티를 입은 야윈 소년이 반갑게 달려왔다. 민우였다. 소년은 시우가 고물상에서 주워 준 태엽식 구리 나침반을 소중하게 목에 건 채, 시우의 양자 제어 동작을 흉내 내며 씩 웃어 보였다. 시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소년의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시우에게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어지는 유사 가족과 다름없었다.
그 평화로운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막 문이 거칠게 찢어지듯 열리며, 에이지스 특별수색대 마크가 선명히 새겨진 하급 장병 세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전자기 스캐너를 앞세우며 군화발로 식탁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봐, 노인네. 이번 주 이능력 정수 상납 수치가 기준치 미달이야. 당장 부족한 만큼 이능력을 추출하든가, 아니면 하프 코인을 더 내놔!”
장병들의 거친 목소리에 김춘자 할머니가 손을 떨며 애원했다.
“군인 나리들, 제발 한 번만 봐주이소. 이번 주에는 손님도 없었고, 제 몸에 남은 마력이라곤 이제 찌찌개 끓일 불꽃 피우는 것밖에 안 남았심더. 여기서 더 추출해가면 저 진짜 죽심더...”
“죽는 건 네 사정이고! 법령대로 집행한다. 잡아!”
장병 한 명이 허리춤에서 조잡한 주사기 형태의 이능력 강제 추출 장치를 꺼내 들고 할머니의 경동맥을 향해 들이밀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할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할머니 괴롭히지 마, 이 나쁜 놈들아!”
그때, 옆에 있던 민우가 독종 같은 눈빛으로 소리치며 바닥에 뒹굴던 뾰족한 돌멩이를 주워 장병의 얼굴을 향해 힘껏 던졌다. 딱! 돌멩이가 장병의 뺨을 스치며 얕은 상처를 냈다.
“이 쥐새끼가 어디서...!”
뺨에서 피를 흘리며 격노한 장병이 군화발로 민우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윽!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진 민우의 위로 장병의 거대한 군화발이 짓밟을 듯 무자비하게 내려앉으려 했다. 소년의 가슴뼈를 통째로 으스러뜨릴 기세였다.
시우의 눈동자가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번갈아 번뜩였다. 한백현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능력을 쓰면 붕괴율이 폭주하고 위성에 잡힌다. 하지만 눈앞에서 동생 같은 소년이 짓밟히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시우가 움직였다.
그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양자 에너지를 극한으로 억제했다. 분신을 소환하지 않는 순수한 신체 기동과 체술만을 사용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쉬익! 시우의 신형이 바람을 가르며 순식간에 민우의 전방을 가로막았다. 장병의 무거운 군화발이 민우의 가슴에 닿기 직전, 시우의 거친 손이 장병의 발목을 낚아챘다.
“뭐야, 이 새끼는...?”
장병이 당황해 목소리를 높이는 찰나, 시우가 손목을 가볍게 비틀었다.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불쾌한 파열음과 함께 장병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시우는 멈추지 않고 뒤에 서 있던 두 번째 장병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손목을 꺾어 이능력 추출 장치를 빼앗아 바닥에 짓밟아 으스러뜨렸다.
“이 자식이 테러범이다! 죽여!”
남은 장병들이 허리춤에서 고압 전류가 푸르게 일렁이는 전기 충격봉을 뽑아 들고 시우를 향해 동시에 휘둘렀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기 스파크가 시우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일반적인 체술로는 피할 수 없는 정밀한 집단 타격 궤적이었다.
‘차원 위상 전환(Phase Shift).’
시우는 최소한의 마력만을 전뇌 세포에 동조시켰다. 츠츳. 유리창이 미세하게 깨지는 듯한 기하학적인 보랏빛 잔상이 시우가 서 있던 자리에 아른거렸다. 콰앙! 소형 소닉붐 소음과 함께 시우의 신형이 0.001초 만에 장병들의 타격 궤적 뒤편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전기 충격봉은 허공을 갈랐고, 장병들은 자신들이 방금 무엇을 보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시우는 적들의 사각지대에서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주먹 끝에 최소한의 운동 에너지를 실어 장병들의 명치와 턱을 정밀 타격했다. 퍽! 콰직! 두 명의 장병이 단 한 발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다.
마지막 남은 장병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려 하자, 시우는 그의 전기 충격봉을 빼앗아 옆에 있던 녹슨 고철통에 처박아 강력한 합선 폭발을 유도했다. 퍼퍼펑! 전자기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며 장병들의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가자, 민우야! 할머니!”
시우는 주저 없이 민우를 한 팔로 안아 들고, 김춘자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 안개 짙은 슬럼가 골목길 속으로 빠르게 도주했다.
골목 구석, 에이지스의 감시카메라가 닿지 않는 어두운 폐허 건물 틈새에 도달해서야 그들은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시우는 가슴을 움켜쥐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무리하게 능력을 제어하며 위상 전환을 쓴 대가로, 심장의 괴사 흉터가 다시금 욱신거리며 전신에 지독한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에이지스 장병들을 직접 타격했으니, 이제 제9구역 특별수색대의 공식 블랙리스트 수배자로 등록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생존을 위한 시간 타이머가 더욱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형...”
시우의 품에 안겨 있던 민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땟국물 가득한 얼굴에 묻어나는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구해준 시우를 향한 경외감이자, 압도적인 힘을 향한 순수한 동경이었다.
민우가 시우의 양자 제어 동작을 흉내 내듯, 떨리는 작은 손가락을 허공에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민우의 깊은 갈색 눈동자 너머에서 기묘하고 붉은빛의 마력 기류가 아른거리며 폭발하듯 뿜어내기 시작했다. 소년의 강한 정신 집중 주파수가 대기 중의 양자 파동과 간접 공명을 일으킨 것이다.
징-!
골목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날카로운 고철 못 하나가 붉은빛 기류를 두르고 공중에 지이잉 소리를 내며 떠올랐다. 비록 3초를 버티지 못하고 민우가 코피를 흘리며 비틀거렸지만, 그것은 분명 공간의 물리 법칙을 왜곡하는 ‘단거리 염동력’의 확실한 각성 전조였다.
시우는 코피를 닦아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붉게 일렁이는 눈동자를 묵묵히 응시했다. 차가운 디스토피아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신앙처럼 따르는 소년의 각성을 바라보며 시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묵직하고 비장한 책임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소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결코 붕괴하여 소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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