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시간
차가운 구원의 약물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감각은 역설적이게도 지독한 빙결과도 같았다.
윤시우는 깊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눈을 떴다. 콧수염을 자극하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 축축한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나직한 기계음. 이곳은 에이지스 군부의 눈을 피해 지하 저항군 ‘언더그라운드’가 구축한 임시 아지트, 버려진 지하철 3호선 터널이었다.
“정신이 드나, 시우?”
낮고 피로에 찌든 목소리가 들렸다. 시우가 고개를 약간 돌리자, 기름때 묻은 의사 가운을 걸친 오지훈이 담배를 물지 않은 채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서은주가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푸른빛이 도는 응급 보조 약물을 주사기에 채우고 있었다.
시우는 상반신을 일으키려 했으나, 전신을 관통하는 무시무시한 마비감에 억눌려 신음했다. 왼쪽 손목이 묵직했다. 시우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피부 신경망을 파고들어 뼈에 영구적으로 고정된 ‘휴대용 차원 안정기’가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약물 챔버에서는 차가운 나노 수액이 일정 주기로 정맥에 주입되고 있었으나,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수치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양자 붕괴율: 40% - 안정화 중]
[경고: 양자 회귀(Quantum Recall) 사용 반동으로 인한 이능력 봉인 수치 100%]
[잔여 봉인 시간: 167시간 42분]
“억지로 움직이지 마라.”
오지훈이 시우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경고했다.
“이우진과의 사투에서 목숨을 건진 건 기적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네 체내의 양자 신경망이 완전히 타버렸어. 일주일 동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거다. 지금 네 몸은 일반인보다도 취약한 상태야.”
시우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팍의 푸른 괴사 흉터가 욱신거리며 지독한 통증을 뿜어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시우를 괴롭히는 것은 머릿속을 맴도는 기괴한 공허함이었다.
분명 누군가와 함께 웃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었던 것 같다. 고철 더미가 쌓인 마당에서 퉁명스럽게 탕약을 건네던 노인의 얼굴. 하지만 그 세부적인 표정이나 목소리, 함께 나눴던 대화의 파편들이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있었다. 양자 회귀의 뼈아픈 대가인 ‘기억 상실’이 그의 영혼 일부를 뜯어간 것이다.
“은주 누나... 스승님은요?”
시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서은주는 대답 대신 시우의 목 뒤에 양자 조절 패치를 붙여주며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태 대장님이 이우진을 격퇴한 고속도로 아래에서 너를 수거해 이곳으로 옮겼어. 한 노인네는 고물상을 지켜야 한다며 남으셨고... 하지만 지금 지상은 지옥이다.”
은주의 말대로 터널 환기구를 타고 흘러드는 바깥의 공기는 오존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루트 7 수송선 습격 사건에 격노한 에이지스 특별수색대장 강태오가 제9구역 전체에 삼엄한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하늘에는 무인 정찰기 스카이아이가 붉은 서치라이트를 번뜩이며 슬럼가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있었고, 지상에는 각성자들을 사냥하기 위해 기계 사냥개 하운드 부대가 깔려 있었다.
그때, 터널 입구의 철제 격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형! 시우 형!”
절박한 비명과 함께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의형제 민우였다. 소년의 야윈 몸은 온통 흙먼지와 굳어버린 피로 얼룩져 있었고, 목에 걸린 태엽식 구리 나침반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민우의 눈동자 속에는 각성 당시 일렁였던 붉은 마력 기류의 불씨가 분노와 공포로 뒤섞여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민우야? 무슨 일이야? 한 노인네는?”
오지훈이 급히 다가가 민우의 어깨를 잡았지만, 민우는 지훈을 뿌리치고 시우의 침상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소년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흙먼지를 씻어내리며 흘러내렸다.
“형... 스승님이... 할아버지 고물상이...!”
민우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떨렸다. 시우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마비된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 민우의 옷자락을 쥐었다.
“진정하고 말해, 민우야. 고물상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민우는 오열하며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시우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한백현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고대 차원 수호자의 표식이 새겨진 청동 펜던트였다. 하지만 펜던트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처참하게 반으로 부러져 있었고, 표면에는 거무스름한 양자 방사능 독액이 묻어 굳어 있었다.
민우의 입을 통해 지옥 같았던 고물상의 참상이 터져 나왔다.
몇 시간 전, 사채업자 서영철의 밀고를 받은 에이지스 특별수색대와 기계 사냥개 하운드 09가 고물상 아지트를 기습했다. 고철로 만든 정문은 하운드의 전자기 충격에 단숨에 박살 났고, 문지기였던 털보 삼촌은 집행관 아레스의 고주파 진동 단도에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전사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형이 여기 있다는 걸 놈들이 알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힘이 봉인된 형을 살려야 한다고...”
민우의 뇌리에 각인된 한백현의 마지막 모습이 시우의 귓가를 때렸다.
백현은 힘이 봉인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시우와 민우를 지하 비밀 수로 퇴로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신을 추격해 온 집행관 아레스와 수색대원들 앞을 홀로 막아섰다. 내력의 90%가 봉인된 늙은 수호자였지만, 백현은 시우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남은 생명력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백현이 전신의 미세 혈류를 폭발시키며 전방에 강력한 전뇌 장벽을 전개했을 때, 고물상 마당은 푸른 격자망의 빛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상대는 무자비한 사신, 집행관 아레스였다. 아레스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초당 수만 번 진동하는 고주파 진동 단도를 휘둘렀다. 분자 결합 자체를 찢어발기는 칼날의 연속 참격 앞에 백현의 전뇌 장벽은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나며 파열되었다.
장벽이 깨짐과 동시에 백현의 육체는 에이지스의 양자 방사능 독액 포탄에 직격당했다. 노인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아레스의 군대는 쓰러진 백현을 쇠사슬로 묶어 에이지스 제9구역 수용소 지하 깊은 곳, 악독한 생체 실험실 ‘랩-9’으로 끌고 갔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절 밀쳐내면서 이 부러진 펜던트를 쥐여주셨어요. 그리고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형한테 가라고... 세상을 구하는 건 힘이 아니라 의지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민우가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시우는 반으로 부러진 청동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부러진 단면의 거친 질감이 손바닥을 찔렀다.
그 순간, 뇌리 깊은 곳에서 무언가 쩍 갈라지는 듯한 충격이 일었다. 기억 상실의 fog 너머로, 자신을 거두어 따뜻한 탕약을 달여주던 노인의 퉁명스럽지만 자애로웠던 실루엣이 분노의 불길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사지로 걸어 들어간 스승.
그를 구해야 한다. 당장 에이지스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스승을 빼내 와야 했다.
시우는 이빨을 깨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전뇌 세포의 신경망을 강제로 가동해 존재하지 않는 양자 분신을 소환하려 주파수를 쥐어짜 냈다.
지직! 파지직!
그 순간, 시우의 전신에서 푸른 스파크 대신 끔찍한 전자기 과부하 노이즈가 폭발했다. 뇌 신경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에 시우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왼쪽 손목에 이식된 휴대용 차원 안정기가 경고음과 함께 터질 듯이 붉은 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이능력 봉인 상태에서의 무리한 마력 가동 감지]
[경고: 전뇌 세포 붕괴율 급증 - 현재 55%]
[경고: 생체 프로토콜 과부하 - 즉각 가동을 중단하십시오]
“컥...! 우욱!”
시우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와 회색 콘크리트 바닥을 적셨다. 보랏빛 광채를 머금은 피는 대기 중으로 기화하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전신이 반투명하게 흔들리며 몸의 윤곽이 먼지처럼 흐려지려 했다. 억지로 힘을 쓰려 할수록 유전자의 해체가 가속화되는 지독한 등가교환의 법칙이었다.
“시우야! 안 돼! 제발 그만둬!”
서은주가 비명을 지르며 시우의 가슴을 억눌렀고, 오지훈은 황급히 그의 목 뒤에 추가 신경 차단 주사를 주입했다. 차가운 약물이 주입되자 요동치던 붉은 경고등이 서서히 가라앉았으나, 시우의 전신은 깊은 무력감과 절망으로 차갑게 식어 내렸다.
힘이 없다.
무한한 평행세계를 지배하던 절대자였던 자신이, 정작 자신을 믿어주고 구원해 준 단 한 명의 스승조차 구하지 못한 채 이 어두운 터널 구석에 누더기처럼 누워 있어야만 했다. 스스로를 쪼개지 않으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던 무의식 속 경구가 뇌리를 잔인하게 후벼팠다.
시우는 붉게 점멸하는 손목의 안정기와 부러진 청동 펜던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가 배어 나오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그의 눈동자가 파란색과 보라색의 기괴한 불꽃으로 번뜩였다.
에이지스 군부, 그리고 집행관 아레스.
스승을 짓밟고 자신들의 영생을 위해 이 세계의 고혈을 빠는 그 배신자들의 심장부에,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파멸의 쐐기를 박아넣으리라.
이능력이 봉인된 지옥 같은 일주일의 시간 속에서, 절대자의 차가운 분노가 심연보다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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