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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세계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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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하늘에 새겨진 보랏빛 상흔. 그것은 거대한 칼날로 세계를 찢어놓은 듯한 차원의 균열이었다. 균열 너머에서 일렁이는 기괴한 보랏빛 광휘가 무너진 고층 빌딩의 콘크리트 잔해 위로 낙진처럼 스산하게 흘러내렸다. 서울 제9구역. 이곳은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영광을 잃고 차원의 붕괴와 에이지스 군부의 가혹한 철권통치 아래 버려진 가난하고 황폐한 슬럼가였다.


"컥, 으아아악...!"


윤시우는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척추는 굳어 있었고, 전신의 근육은 마치 유리 가루로 채워진 것처럼 서걱거리며 마비되어 있었다. 감각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파괴된 슬럼가의 폐허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텅 빈 공백이었고, 오직 육체를 안에서부터 찢어발기는 극심한 고통만이 실시간으로 뇌 신경을 난도질했다.


시우는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손을 본 순간, 그는 숨을 멈췄다.


손끝의 윤곽이 미세하게 번들거리며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디지털 노이즈가 잔뜩 낀 홀로그램처럼, 그의 손가락은 현실의 공간에 온전히 고정되지 못하고 몇 겹의 잔상으로 분열되어 흔들렸다. 유전자가 나노 단위로 해체되고, 세포가 먼지처럼 분해되는 양자 붕괴의 고통. 시우의 전용 패널티 스케일이 가리키는 양자 붕괴율은 이미 70%를 훌쩍 넘어선 위험 지대였다. 이대로 두면 그의 존재 자체가 이 우주의 인과율 속에서 영구히 삭제될 터였다.


"살아야... 한다."


본능적인 갈망이었다. 시우는 체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기묘한 마력을 쥐어짜려 했다. 왜곡된 물리 법칙을 강제로 비틀어 자신의 육체 상태를 고정하려는 처절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가혹한 패착이었다. 통제력을 잃은 양자 에너지가 전신의 혈류를 역방향으로 밀어 올렸다.


"우욱, 컥...!"


시우는 가슴을 쥐어짜며 검은 피를 토해냈다. 콘크리트 바닥에 흩뿌려진 피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보랏빛 광채를 미세하게 머금은 검은 액체는 대기 중으로 기화하며 스산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스스로 힘을 제어하려 할수록 유전자 해체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시우의 눈동자가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번갈아 빛나며 초점을 잃어갔다. 완전히 마비된 육체는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너져 내렸고, 죽음의 공포가 그의 의식을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던 그 순간이었다.


터벅, 터벅.


잿더미를 밟는 무거운 발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이거 참, 차원의 경계가 찢어지더니 하늘에서 보통 물건이 떨어진 게 아니군."


걸걸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 시우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백발을 대충 뒤로 묶어 올린 노인이었다. 먼지와 기름때가 잔뜩 낀 작업용 보안경을 쓰고 있었고, 한쪽 눈은 빛을 잃은 의안이었다. 노인의 양손은 거친 흉터와 기름때로 절어 있었고, 어깨에는 고철 부품들을 조잡하게 덧댄 낡은 진공관 라디오가 매달려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전자기 소음이 흘러나왔는데, 신기하게도 그 소음이 시우의 뇌리를 강타할 때마다 요동치던 양자 파동이 미세하게 공명하며 억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의 이름은 한백현이었다. 제9구역의 눈먼 고물상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은둔자.


백현은 시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과 보랏빛의 불안정한 아우라를 보더니, 보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두면 사방 10미터의 분자 구조까지 함께 길동무로 삼아 소멸하겠어. 쯧, 성가신 녀석이군."


백현이 주저 없이 시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우는 본능적인 경계심에 남은 힘을 쥐어짜 방어하려 했으나, 백현의 움직임은 마비된 시우의 감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백현의 거친 손가락이 시우의 경동맥과 가슴 중앙의 혈도를 정확하게 찔러 들어왔다. 그 순간, 시우의 전신을 찢어발기던 통제 불능의 양자 에너지가 백현의 손끝에서 주입된 묵직한 인과 공명 주파수에 의해 강제로 봉인되듯 가라앉았다.


"끄응...!"


시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백현은 시우의 양자 주파수를 감지하고, 자신의 내력을 역방향으로 조율해 시우의 폭주하는 파동을 억누른 것이다. 백현은 쓰러진 시우를 가볍게 짊어졌다.


"살고 싶다면 엄살 부리지 마라, 꼬맹이."


백현은 시우를 데리고 제9구역 한구석에 위치한 자신의 고물상으로 향했다. 고철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허름한 마당을 지나, 백현이 정문의 비밀 고철 스위치를 조작하자 묵직한 진공관 철문이 스파크를 뿜으며 열렸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끝에는 한백현의 고물상 지하 아지트가 숨겨져 있었다.


사방의 벽면은 구식 진공관 라디오와 고철 부품, 먼지 쌓인 고서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한구석에서는 약초를 달이는 구식 증류기가 보랏빛 김을 내뿜으며 끓고 있었다. 차가운 에이지스 군부의 기술 문명과는 대조되는, 조잡하지만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비밀 공간이었다.


백현은 시우를 아지트 중앙의 거친 거적때기 위에 정좌시켰다. 시우의 육체는 여전히 반쯤 투명화된 상태로 흔들리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미세한 유전자 해체 현상이 이제 손목과 팔뚝까지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내 눈은 멀었지만, 네 영혼 세포가 먼지처럼 흩어지는 소리는 아주 잘 들린다." 백현이 보안경을 벗으며 의안을 드러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호흡해라. 우주의 미세한 박동에 네 폐부를 맞추는 거다. 조금이라도 주파수가 어긋나면 네 폐는 안에서부터 녹아내릴 거다."


백현이 시우의 등 뒤에 앉아 거친 두 손을 시우의 견갑골 사이에 밀착시켰다. 웅장하면서도 차가운 에너지가 백현의 손끝을 통해 시우의 척추로 주입되었다.


"들이쉬어라. 네 전신의 세포를 열고, 대기 중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양자 진동을 받아들여라."


시우는 백현의 지시에 따라 억지로 숨을 들이쉬었다.


"흐읍...!"


공기를 마시는 순간, 시우의 콧구멍과 입술 주변으로 새하얀 푸른빛 서리가 서리기 시작했다. 전신의 피부 균열 흉터가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요동쳤다. 그것은 단순히 공기를 들이쉬는 호흡이 아니었다. 우주의 양자 미동 주파수와 자신의 혈류를 강제로 동기화시키는 고도의 기공 수련, '양자 동조 호흡법'이었다.


"내쉬어라. 네 체내에 쌓인 왜곡된 엔트로피를 뱉어내라."


"후우..."


시우가 숨을 내뱉자, 그의 모공과 입에서 보랏빛 연기가 뿜어져 나와 아지트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동반했다. 우주의 거대한 법칙을 불완전한 인간의 육체에 강제로 맞추는 대가는 가혹했다. 시우의 심장 부근 세포들이 나노 단위로 타들어 가며 영구적으로 괴사하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듯한 작열감이 일어났다. 시우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악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전신의 뼈가 삐걱거렸고, 땀과 함께 검은 혈액이 피부 틈새로 배어 나왔다.


"버텨라! 자아를 놓치는 순간, 너는 이 세상의 먼지 중 하나로 돌아갈 뿐이다!"


백현의 호통이 시우의 귓전을 때렸다. 백현은 전뇌 주파수를 차단하는 기공을 극대화하여 시우의 뇌세포가 과부하로 타버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지독한 사투 끝에,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시우의 요동치던 심장 박동이 백현이 주입한 주파수와 완벽하게 동조되었다. 전신으로 퍼져나가던 반투명화 현상이 멈추고, 그의 육체 윤곽이 다시 현실의 공간에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요동치던 시우의 양자 붕괴율 수치는 위험선인 70%에서 안전선인 40%대로 급격히 하락했다.


시우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 중앙, 심장 부근에는 세포 괴사의 흔적인 푸른색 균열 흉터가 짙은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능력을 사용하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비장한 육체적 대가였다.


백현은 숨을 몰아쉬는 시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지트 깊은 곳의 낡은 나무 상자에서 먼지 쌓인 가죽 노트를 꺼내 시우의 앞에 툭 던졌다.


"이게... 무엇입니까?" 시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본능은 그 노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네가 잃어버린 과거의 파편이자, 이 부서진 세계의 진실이 담긴 기록이다."


시우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빛바랜 공백 페이지들을 지나, 첫 장에 정교한 고대 문자로 적힌 문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세상을 구하려는 자는, 가장 깊은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쪼개야 하리라. 그것이 차원을 관장하는 수호자의 운명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시우의 전뇌 세포가 강렬하게 진동했다. 뇌리를 스치는 알 수 없는 거대한 기억의 폭풍. 우주적 기함을 이끌고 보랏빛 균열 너머의 거대한 적과 맞서 싸우던 절대자의 형상이 찰나의 환영처럼 그의 무의식을 두드렸다. 시우는 가슴의 푸른 흉터를 움켜쥐며 숨을 삼켰다.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에 다중 우주의 명운을 뒤흔들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때, 백현이 무거운 어조로 덧붙였다.


"지금의 호흡법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일주일이다. 일주일 내로 에이지스 군부의 수송 차량을 습격해 프로토타입 '차원 안정기'를 탈취해 네 손목에 이식하지 않으면, 네 유전자는 다시 해체되기 시작할 거다. 선택해라, 꼬맹이. 여기서 조용히 먼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지로 뛰어들어 네 진짜 이름을 찾을 것인가."


시우는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푸른 흉터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고대 노트의 문장을 꽉 쥔 채, 보랏빛 안개가 일렁이는 아지트의 어둠 속을 매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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