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영협에 드리운 세 자루의 칼
독 안개가 완전히 걷힌 상류 우물가는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은 폭풍 전야의 적막에 불과했다.
지독했던 천해독파산의 비린내가 강바람에 씻겨 내려간 자리에는 오직 차갑게 얼어붙은 독고염의 시신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설하는 한빙철검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독 안개 속에서 내력을 무리하게 쥐어짜 빙벽수호를 전개한 탓에, 그녀의 단전은 텅 빈 것처럼 허전했고 전신 경맥은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독기에 녹아내린 왼쪽 소매 아래로 드러난 가냘픈 팔이 밤바람에 찌르듯 시려 왔고, 손끝의 푸른 동상 멍 자국은 단전의 한기가 폭주하려 할 때마다 욱신거렸다.
“하아... 하아... 스승님.”
설하가 비틀거리며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제갈휘는 바위에 기대어 앉아 조용히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손끝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눈먼 청년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었으나, 하얀 붕대 아래 감춰진 그의 심안(心眼)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깨어 있었다. 과도한 청혈심공 운용으로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지만, 제갈휘는 품속 깊은 곳에 독고염의 시신에서 수습한 팽무성의 비밀 서신을 갈무리하며 낮게 읊조렸다.
“숨을 고르거라, 설하야. 지금은 승리의 여운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다.”
“예? 하지만 독고염은 이미 처단했고 우물도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독고염은 시작에 불과했다. 철사방주 조광렬이 보낸 진짜 사냥개들이 이미 만황곡 외곽을 포위하고 좁혀오고 있어. 사방에서 느껴지는 파공음의 무게가 조광렬의 사냥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갈휘가 청죽장을 가볍게 들어 동쪽 협곡 방향을 가리켰다.
“무겁고 둔탁한 쇠사슬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 바람을 타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벼운 신법의 기척, 그리고 대지의 진동을 억누르는 묵직한 발걸음까지. 세 명이다. 철사방 최고의 해결사라 불리는 철검삼랑(鐵劍三郞) 삼형제가 움직인 것이 틀림없다.”
철검삼랑.
설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만황곡의 부엌데기로 살아가던 시절에도 그 악명만큼은 귀가 닳도록 들었던 자들이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며, 한 번 표적으로 삼은 사냥감은 기어코 목을 베어 가죽을 벗긴다는 잔혹한 일류 살수들이었다.
“그들이... 벌써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그들의 합공 무력은 일류 극성에 달한다. 지금처럼 단전이 비어 있고 경맥이 상한 네 몸으로는 평지에서 그들 삼형제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백전백패다. 정면 충돌은 피해야 한다.”
제갈휘는 청죽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록 내력이 전혀 없는 폐인의 신체였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황실 장서각에서 외웠던 천하 모든 무공과 병법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무경칠서 주해본(武經七書 註解本)에 이르기를, 적의 형세가 하나로 뭉쳐 단단할 때는 지형의 험준함을 빌려 그 마디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제갈휘의 심안 속에서 만황곡 주변의 지형도가 기하학적인 선으로 그려졌다. 빽빽한 소나무 숲과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항상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시야를 차단하는 천혜의 사지.
“귀영협(鬼影峽)으로 간다.”
제갈휘의 단호한 목소리에 설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귀영협은 만황곡 외곽에 위치한 험준한 바위 협곡으로,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져 주민들조차 접근을 꺼리는 기분 나쁜 음지였다. 하지만 그만큼 안개가 짙고 도주로가 좁아 소수의 아군이 대군을 상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전장은 없었다.
“제가 스승님을 업겠습니다.”
설하는 망설임 없이 제갈휘의 가냘픈 신형을 등에 업었다.
“빙천보(氷天步)를 전개하되, 발끝에 한기를 극도로 미세하게 실어 흔적을 남기지 마라. 안개 속으로 숨어드는 유령처럼 움직여야 한다.”
“예, 스승님.”
설하는 발끝에 미세한 극음의 진기를 주입했다.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아주 얇은 얼음 막이 형성되면서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고 신형이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귀식토납법으로 호흡마저 극한으로 줄인 상태였기에, 짙어지는 밤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사제지간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 줄기 서늘한 바람과 같았다.
* * *
바람이 바위 틈새를 통과하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귀영협의 입구.
스스스스...
짙은 안개 장막을 뚫고 세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장선 사내는 전신에 굵은 쇠사슬을 감고 백근 무게에 달하는 무거운 무쇠 대도를 어깨에 거칠게 얹은 철검삼랑의 첫째, 철일랑(Chul-il-rang)이었다. 그의 거친 수염 사이로 이빨이 허옇게 드러났다.
“흐흐흐, 독고염 그 독벌레 놈이 결국 우물가에서 굳어버렸더군. 시신이 아주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데, 조광렬 방주가 말한 그 기괴한 계집년의 솜씨가 분명해.”
그의 등 뒤에서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비쩍 마른 사내, 둘째 철이랑(Chul-i-rang)이 쌍검의 날을 서로 맞부딪치며 음산하게 웃었다.
“안개 속에 서리 향이 미세하게 남아 있어. 도망친 방향은 이 귀영협 안쪽이다. 제 발로 막다른 사지로 걸어 들어갔군.”
삼형제의 막내이자 기형병기인 쇠사슬 채찍을 허리에 감은 철삼랑(Chul-sam-rang)이 혀를 차며 협곡 내부를 쏘아보았다.
“장님 놈과 상처 입은 계집년이다. 멀리 가지 못했을 터. 첫째 형님, 단숨에 목을 베어 조광렬 방주에게 가져가고 무림맹 강남지부의 현상금을 챙깁시다.”
“가자. 쥐새끼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시간이다.”
철일랑이 무쇠 대도를 고쳐 잡으며 험준한 바위 틈새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묵직한 가죽 장화가 자갈을 짓밟는 소리가 안개 속으로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 * *
귀영협 내부, 세찬 바람이 안개를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좁은 바위 틈새.
설하는 깎아지른 절벽 중턱에 간신히 몸을 숨길 수 있는 좁은 바위 크레바스 안쪽에 제갈휘를 내려놓고 검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협곡 아래쪽에서부터 전해지는 철검삼랑의 살기는 독고염의 음독함과는 격이 다른, 날것 그대로의 폭력적인 쇳내를 풍기고 있었다.
“스승님, 적들이 협곡 입구로 진입했습니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습니다.”
설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제갈휘는 차가운 바위벽에 등을 기댄 채 청죽장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의 귀밑에서는 다시 한번 미세한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청혈심공 2단계를 기동하여 협곡 내부의 바람 소리, 바위에 부딪쳐 굴러가는 자갈 소리, 그리고 적들의 미세한 호흡 간격까지 실시간으로 머릿속에서 해체하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라, 설하야. 적들의 무력이 강할수록 그들의 합공 진형은 지형의 제약을 크게 받는다. 귀영협의 폭은 넓은 곳이 세 자, 좁은 곳은 한 자 반에 불과해. 저들이 아무리 유기적인 합공을 자랑한다 한들, 이 좁은 미로 속에서는 한 번에 한 명씩밖에 들어올 수 없다.)
제갈휘의 전음이 설하의 귓전을 맑게 울렸다. 그 고요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는 설하의 요동치던 심장을 단숨에 진정시키는 묘약이었다.
(첫째 철일랑은 무거운 대도를 휘두른다. 그의 초식은 파괴적이지만 회전 반경이 넓어 이 좁은 바위 틈새에서는 대도 끝이 암벽에 걸릴 수밖에 없어. 둘째 철이랑은 쌍검을 쓰며 기습에 능하니 어둠 속에서 네 배후를 노릴 것이다. 셋째 철삼랑은 쇠사슬 채찍으로 네 발을 묶으려 들 테지. 저들의 진형을 강제로 찢어놓아야 한다.)
제갈휘는 청죽장 끝으로 바닥의 흙을 살짝 긁으며 지형의 공명을 읽었다.
(설하야, 지금부터 귀식토납법을 운용해 전신의 기척을 완전히 지워라. 그리고 내가 전음하는 좌표에 따라 한빙철검의 한기를 바위벽에 미세하게 흘려보내라. 적들이 안개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스스로 갈라지게 만들 것이다.)
“예, 스승님.”
설하는 검을 고쳐 잡고 깊은 호흡을 들이쉬었다. 단전의 한기가 검신을 타고 차가운 바위벽으로 스며들었다. 바위 표면에 얇은 서리 막이 형성되며, 협곡 내부의 안개가 급격히 냉각되어 한층 더 짙고 차가운 백색 장막으로 변해갔다. 시야는 이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려졌다.
지직... 지지직...
바위벽이 얼어붙는 미세한 소리 너머로, 드디어 적들의 발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철사슬이 거친 돌바닥을 긁는 둔탁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귀영협 전체를 기분 나쁘게 뒤흔들었다.
“쳇, 안개가 갑자기 왜 이렇게 짙어지는 거야? 얼어 죽을 정도로 춥군.”
철일랑의 거친 목소리가 바로 협곡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왔다.
설하는 좁은 바위 틈새에 신형을 바짝 밀착시킨 채 검을 쥔 손가락 마디를 하얗게 불태웠다.
스스스...
안개 속에서 세 자루의 칼날이 뿜어내는 차가운 살기가 좁은 절벽 틈새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협곡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설하의 푸른 눈동자가 짙은 백색 안개 장막 너머, 서서히 좁혀오는 적들의 희미한 실루엣을 향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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