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가라앉는 독기
흑사도가 흘리고 간 붉은 핏자국 위로, 밤바람을 타고 스며드는 불길한 독초의 쓴 향기가 제갈휘의 코끝을 다시 한번 자극했다.
늦은 밤, 자시(子時)의 어둠이 만황곡의 깊은 계곡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엽락소축 뒷마당의 대나무 평상에 앉아 있던 제갈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방금 전 흑사도와의 격렬했던 생사결의 여파로 그의 귀밑에서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미세한 피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청혈심공 2단계를 과도하게 운용한 대가로 뇌의 기맥이 욱신거리는 극심한 편두통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그 고통조차 초월한 채, 밤바람의 미세한 흔들림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었다.
스스스.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것은 단순한 흙먼지 냄새가 아니었다. 썩은 가죽이 타들어 가는 듯한 지독한 비린내, 그리고 혀끝을 마비시키는 찰나의 쓴맛. 눈먼 사서 제갈휘의 머릿속에 가두어 둔 거대한 도서관, 제갈세가 총명기(聰明記)의 서가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권의 비급과 기문이록들이 스쳐 지나간 끝에, 하나의 이름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사천 당가의 방계 독수, 독고염(獨孤炎). 그리고 놈이 사용하는 비전의 기형 맥독…… 천해독파산(天海毒破散).’
제갈휘의 붕대 아래 먼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천해독파산은 물에 녹으면 무색무취해지며, 단 한 방울만으로도 전신의 경맥을 서서히 마비시켜 반나절 내에 목숨을 앗아가는 지독한 맥독이었다.
“설하야.”
제갈휘가 나직하게 부르자, 어둠 속에서 녹슨 빙가 철검을 쥔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설하가 즉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는 흑사도의 도풍에 스친 가벼운 상처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손끝은 한해빙천검을 무리하게 전개한 탓에 푸른 동상 멍 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예, 스승님. 명을 내리소서.”
“철사방주 조광렬이 흑사도의 패퇴에 완전히 미쳐버린 모양이구나. 사파의 독수를 고용해 만황곡 주민들의 유일한 젖줄인 상류 우물에 독을 풀려 하고 있다. 지금 당장 우물가로 가야 한다.”
“우물에 독을……! 그 가난하고 순박한 이웃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입니까?”
설하의 목소리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서렸다. 평생을 버림받고 구박받던 자신에게 따뜻한 감자를 나누어 주던 송영감과 이웃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파의 탐욕에는 자비가 없는 법이다. 설하야, 네 몸의 상처와 내력이 온전치 않음을 안다. 하지만 이 우물이 오염되는 순간, 만황곡의 모든 생명은 끝이다. 내가 네 눈이 되어 줄 테니, 나를 업고 달려라.”
설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허리에 차고 제갈휘의 가냘픈 신형을 등에 업었다. 내력이 전혀 없는 제갈휘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으나, 그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천하의 그 어떤 중검보다도 무거웠다.
스스스슥!
설하는 발끝에 미세한 한기를 실으며 빙천보(氷天步)를 전개했다. 젖은 안개와 밤바람을 가르며, 사제지간은 만황곡의 가파른 바위 언덕을 넘어 상류 우물가를 향해 번개처럼 질주했다.
* * *
만황곡 상류, 기분 나쁜 독성 연못의 기운이 감도는 우물가.
은은한 달빛 아래, 온몸에 기괴한 뱀 비늘 모양의 문신을 새긴 사내가 서 있었다. 보라색 마스크를 써 얼굴을 가린 사내, 사천 당가의 방계 독수 독고염이었다. 그의 손에는 시커먼 진흙으로 빚은 듯한 기분 나쁜 점토 항아리가 들려 있었다. 항아리 마개를 열자, 밤바람을 타고 지독한 천해독파산의 독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흐흐흐, 이 가난한 골짜기 놈들. 감히 무림맹의 사냥개인 철사방에 저항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이 우물 물을 단 한 모금이라도 마시는 순간, 너희의 오장육부는 서서히 썩어 들어갈 것이다.”
독고염이 비열한 웃음을 터뜨리며 항아리를 우물 입구로 기울이려던 그 찰나였다.
쉬이이익!
어둠 속에서 매서운 서리 바람과 함께 푸른 검기를 머금은 설하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설하의 손에 쥐어진 녹슨 빙가 철검이 시린 파공음을 내며 독고염의 손목을 향해 매섭게 찔러 들어갔다.
“어떤 놈이냐!”
독고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항아리를 뒤로 빼고 신형을 뒤로 날렸다. 그의 가죽 장화가 지면에 닿자마자, 검은 독혈 같은 탁기가 바닥의 풀들을 순식간에 검게 말려 죽였다.
독고염은 차가운 안개 속에서 드러난 설하의 창백한 얼굴과 그녀의 검에 서린 서리 기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허어, 네년이 바로 흑사도의 팔을 부러뜨렸다는 그 의심스러운 년이로군. 한기를 다루는 검술이라…… 과연 무림맹주께서 탐낼 만한 가치가 있겠어.”
설하의 등에서 내린 제갈휘는 청죽장을 땅에 짚은 채, 우물가 옆의 바위 뒤에 조용히 몸을 숨겼다. 그의 청풍감각이 활성화되며, 독고염의 호흡 소리와 그의 손목 기맥에서 흐르는 기계 장치의 미세한 마찰음이 귀를 찔렀다.
(설하야, 방심하지 마라. 저자의 소매 속에 사천 당가 방계의 기계식 암기 장치인 독고염의 비침기(飛針器)가 장착되어 있다. 소리 없이 무형침(無形針)을 발사하는 음독한 물건이다. 저자의 호흡이 가빠지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
스승의 전음이 설하의 머릿속을 맑게 울렸다. 설하는 검을 비스듬히 쥐고 귀식토납법을 운용하며 호흡을 극한으로 낮추었다.
“어린 계집년이 겁도 없이 독공의 대가 앞에 서다니, 네년의 피를 이 우물에 먼저 뿌려주마!”
독고염이 코웃음을 치며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순간, 그의 소매 속에서 미세한 태엽이 풀리는 지지직 소리가 들렸다. 육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독침 열 발이 부채꼴 모양으로 허공을 가르며 설하의 전신 요처를 향해 소리 없이 쇄도했다. 무형침 사격이었다.
(정면은 사지다! 우측 이 보, 빙천보를 전개해라!)
제갈휘의 전음이 떨어짐과 동시에, 설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우측으로 던졌다. 발끝이 지면을 얼리며 미끄러지듯 이동하자, 그녀가 서 있던 허공을 향해 소리 없는 파공음이 스쳐 지나갔다. 푸스스스! 독침들이 뒤편의 소나무 기둥에 박히자마자, 거대한 소나무가 검게 부식되며 진액을 쏟아냈다.
“아니, 내 무형침을 피했다고?”
독고염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자신의 암기를, 그것도 삼류 수준으로 보이는 어린 계집이 완벽한 타이밍에 회피한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연이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어떠냐!”
독고염이 광분하며 양손 소매를 동시에 휘둘렀다. 이번에는 이십 여 발의 무형침이 설하의 도주 경로를 완전히 차단하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침의 궤적이 부채꼴로 넓게 퍼진다! 정면 돌격은 자살행위다. 좌측 일 보 후퇴 후, 한빙철검의 한기를 지면으로 내리뻗어라! 우물 주변의 지면을 얼려 독가루가 공기 중으로 비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설하는 스승의 지시에 따라 즉시 좌측으로 몸을 빼며 한빙철검을 지면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한설지풍!”
콰아아앙!
설하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파괴적인 극음의 한기가 우물 주변의 흙바닥을 순식간에 하얗게 얼려버렸다. 단단한 얼음 장막이 지면을 덮치자, 독고염이 흩뿌린 독침들이 얼음 바닥에 부딪쳐 지직 소리를 내며 얼어붙은 채 튕겨 나갔다. 독침에 묻어 있던 천해독파산의 독가루 역시 차가운 한기에 얼어붙어 공기 중으로 퍼지지 못하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이, 이년이 내 독공의 궤적을 완벽히 읽고 있어!”
독고염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계집의 뒤편, 바위 그늘 아래 조용히 서 있는 눈먼 사서의 존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장님의 귀밑에서 미세한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장님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계집의 보법이 신산귀모하게 변하는 광경.
‘저 장님 놈이 배후에서 지시하고 있는 건가? 소리만으로 내 암기의 방위를 읽어내다니, 말도 안 된다!’
독고염의 눈에 살기와 광기가 번뜩였다. 그는 우물 독살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 최후의 살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소매 속에서 더 거대하고 짙은 검은색 독 안개가 부르르 떨리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장님 놈부터 찢어 죽여주마!”
독고염이 포효하며 소매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우물 주변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지독한 천해독파산의 독 안개가 설하와 제갈휘의 시야를 완벽히 가로막기 시작했다. 설하의 호흡이 가빠지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독기에 가슴에 미세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독고염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자욱한 독 안개 속에서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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