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의 첫 피비린내
조팽이 품속에서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대장간 문설주 쪽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장간 내부의 열기 속으로, 일촉즉발의 피비린내 나는 살기가 은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화덕의 붉은 불꽃이 대장간의 어두운 벽면을 일렁이며 비추고 있었고, 타오르는 석탄 냄새와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이춘삼이 모루 위에 올려놓은 황실 비전 묵철검 설계도는 붉은 불빛을 받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핏줄처럼 붉게 일렁였다.
제갈휘는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님에 불과했다. 하얀 붕대로 단단히 가려진 두 눈은 미동조차 없었고, 낡은 마의를 걸친 채 그저 평범한 대나무 지팡이인 청죽장을 바닥에 짚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귀밑 기맥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청혈심공 1단계와 청풍감각을 극대화한 그의 심안(心眼)에는, 대장간 문설주 뒤편에서 기척을 죽이며 다가오는 조팽의 거친 호흡과 단검의 차가운 쇳소리가 기하학적인 선과 수치로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발걸음이 무겁고 천박하구나. 철사방의 멧돼지가 대장간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제 발로 들이닥친 모양이군.’
제갈휘는 입가에 미세하고도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청죽장 끝으로 대장간 흙바닥을 가볍게 툭 쳤다. 둔탁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뻗어 나갔다.
“들개 한 마리가 문설주 뒤에서 침을 흘리고 있군요, 이 어르신.”
제갈휘의 나직한 목소리가 대장간의 정적을 깼다.
“엉? 무슨 소리냐?”
이춘삼이 눈살을 찌푸리며 화덕의 집게를 내려놓는 순간, 문설주 뒤에 숨어 있던 조팽이 칫, 하고 혀를 차며 모습을 드러냈다. 멧돼지처럼 우람한 체구에 거친 가죽 옷을 걸친 조팽은 품속에서 날카로운 사파 단검을 꺼내 흔들며 대장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눈먼 책사 놈이 귀는 밝구나. 이춘삼 영감, 대장간에서 무림맹의 허가도 받지 않은 수상한 무기 설계도를 펼쳐놓고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거지?”
조팽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모루 위의 황실 비전 설계도를 향했다. 그는 설계도가 지닌 가치를 완벽히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범상치 않은 보물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설하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녹슨 빙가 철검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제갈휘는 청죽장 끝으로 설하의 발등을 가볍게 내리누르며 전음입밀을 보냈다.
(참아라, 설하야. 대장간 내부에서 무공을 펼치면 이춘삼 어르신이 위험해진다. 저 어리석은 자는 내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쫓아낼 수 있다.)
설하는 스승의 전음에 입술을 깨물며 검을 쥔 손을 멈췄다.
제갈휘는 청죽장을 앞으로 가볍게 내밀며 조팽의 방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 소방주, 품속의 단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 검지 마디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군요. 사대도법의 기초인 완력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체내의 탁기가 손끝으로 쏠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로 단검을 휘두르면, 상대의 목을 베기도 전에 스스로의 완력에 손목 관절이 어긋날 텐데…… 철사방의 가르침이 이토록 허술합니까?”
“뭐, 뭐라고? 이 장님 새끼가 미쳤나!”
조팽의 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무공 약점을 단번에 짚어낸 장님의 독설에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것이다. 그는 단검을 치켜들며 제갈휘를 향해 돌진하려 했다.
그때, 이춘삼이 거대한 뇌화망치를 모루 위에 쾅!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붉은 불꽃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대장간 전체가 흔들렸다. 군부 병기창 수석 대장장이 시절 다져진 그의 단단한 기세와 무시무시한 괴력이 조팽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팽! 내 대장간에서 쇠붙이를 함부로 휘두르지 마라! 네 아비 조광렬이 와도 내 대장간의 불꽃은 함부로 꺼뜨리지 못한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이 망치로 네 대가리를 고철처럼 두드려 주마!”
이춘삼의 웅장한 호통에 조팽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이 외고집 영감의 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조팽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제갈휘와 설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두고 보자, 이 장님 새끼와 부엌데기 년…… 내 반드시 아버님과 흑사도 대장님께 일러바쳐 너희의 목을 매달아 주마!”
조팽은 설계도를 빼앗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대장간 문을 거칠게 박차고 밖으로 도망쳤다.
대장간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춘삼은 뇌화망치를 내려놓으며 제갈휘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갈 선생, 조팽 저 녀석이 철사방의 돌격대장 흑사도에게 밀고할 걸세. 흑사도는 조광렬의 사냥개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네. 당장 만황곡을 떠나게.”
제갈휘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어르신, 약속대로 묵철광을 가져올 테니 설계도대로 검을 준비해 주십시오. 설하야, 엽락소축으로 돌아간다.”
* * *
바람이 대나무 숲을 거칠게 흔들며 스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엽락소축 뒷마당의 좁은 비밀 공터. 바닥에는 제갈휘가 대나무 지팡이로 그려놓은 보법의 기하학적인 궤적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위로 떨어진 대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고 있었다.
설하는 녹슨 빙가 철검을 쥔 채 제갈휘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가벼운 상처가 남아 있었고, 전날의 무리한 수련으로 인해 전신 경맥이 미세하게 욱신거리고 있었다.
제갈휘는 대나무 평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점례 아주머니가 끓여준 차를 조용히 들이키고 있었다. 그의 귀밑 기맥이 파르르 떨리며 청혈심공 2단계의 초감각 영역이 활성화되었다. 주변 10장 이내의 모든 미세한 공기 파동과 대나무 잎사귀가 부딪치는 마찰음이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입체 지형도로 시각화되고 있었다.
“설하야, 묵철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 녹슨 철검이 네 유일한 뼈대다. 오늘 밤, 그 뼈대에 가문의 한(恨)을 실어야 할 것이다.”
“스승님, 철사방의 추격대가 이리로 오고 있습니까?”
“바람을 타고 피비린내와 거친 쇳소리가 밀려오고 있구나. 멧돼지들이 사냥개를 이끌고 숲을 짓밟으며 다가오고 있다.”
제갈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뒷마당 대나무 숲의 울창한 장막을 뚫고 거친 발자국 소리들과 함께 횃불의 붉은 빛이 일렁이며 다가왔다.
스스스슥! 콰창!
대나무 울타리가 무참히 부서지며, 검은 두건을 쓰고 이가 빠진 거대한 대도를 어깨에 멘 사내가 선두로 걸어 나왔다. 철사방의 돌격대장, 흑사도(Heuk Sado)였다. 그 뒤로 조팽과 십여 명의 철사방 무사들이 횃불을 든 채 엽락소축 뒷마당을 겹겹이 포위했다.
“흐흐흐, 과연 조팽 소방주의 말대로 기괴한 장님 놈과 부엌데기 년이 여기 숨어 있었군.”
흑사도는 이가 빠진 검은 대도를 바닥에 쿵 내려놓으며 비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비린내 나는 거친 사파의 살기가 뿜어져 나와 대나무 숲의 한기를 한층 더 무겁게 짓눌렀다.
“장님 서생, 네놈이 대장간에서 우리 사대도법을 모욕했다지? 감히 철사방의 무공을 논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리고 저 계집…… 한기를 다룬다는 의심스러운 년이 바로 장서각의 생존자이거나 그 가솔이렷다!”
설하는 침묵을 지키며 녹슨 철검을 비스듬히 내려 잡았다. 그녀의 전신이 실전이라는 극단적인 긴장감과 공포로 인해 미세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평생 매질과 조롱만 당해왔던 부엌데기 소녀에게, 일류 초입의 살기를 뿜어내는 흑사도의 거구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다.
제갈휘는 찻잔을 평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찻잔이 대나무 바닥에 닿는 미세한 소리가 설하의 귓전을 맑게 울렸다.
(설하야, 적의 기세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호흡을 늦추고 귀식토납법(龜息吐納法)을 운용해라. 전신의 진기를 단전으로 모으고, 내 목소리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해라.)
스승의 전음입밀이 설하의 고막에 직접 꽂혔다. 신기하게도 스승의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설하의 쿵쾅거리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차가운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죽어라, 이 삼류 잡종 년아!”
흑사도가 포효하며 검은 대도를 비스듬히 치켜들고 쇄도했다. 그의 대도 끝에서 거칠고 붉은 흙먼지 같은 도풍이 피어오르며 설하의 머리 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철사방 사대도법(沙大刀法)의 일초식, ‘모래바람의 일격’이었다.
콰아아앙!
설하는 급히 검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실전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무게중심을 뒤로 빼지 못했다. 흑사도의 무지막지한 완력과 대도의 무게가 정면으로 충돌하자, 설하의 녹슨 철검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앗……!”
도풍의 잔여 기운이 설하의 왼쪽 어깨를 스치며 마의가 찢어지고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가벼운 도상(刀傷)이었으나, 상처의 고통보다 적의 압도적인 힘에 밀렸다는 공포가 그녀의 눈동자를 흔들었다.
“하하하! 역시 삼류 부엌데기 년이구나! 검 한 번 제대로 쥐어보지 못한 년이 장님 놈의 말장난에 속아 칼장난을 치다니!”
조팽이 뒤에서 횃불을 흔들며 비열하게 웃어댔고, 철사방 무사들도 조롱 섞인 야유를 보냈다.
제갈휘는 여전히 평상에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붕대 아래 먼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 총명기 기억술이 가동되며, 방금 흑사도가 휘두른 대도의 궤적과 사대도법의 역학적 약점이 0.1초 만에 완벽히 분해되어 해체되고 있었다.
(설하야, 당황하지 마라. 사대도법은 위력은 강하나 초식을 전개한 직후 무게중심이 전방으로 고도로 쏠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흑사도의 다음 초식은 반드시 횡베기다. 놈이 대도를 회수하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
스승의 차분한 분석이 설하의 마음에 굳건한 닻을 내렸다. 설하는 어깨의 피를 무시한 채, 흘러내린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쥐새끼 같은 년, 이번에는 목을 날려주마!”
흑사도가 대도를 크게 휘두르며 횡베기로 설하의 허리를 양분하려 쇄도했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대나무 숲을 뒤흔들었다.
(지금이다. 빙천보(氷天步)를 밟고 우측 사각지대로 미끄러지듯 이동해라.)
제갈휘의 전음이 떨어지는 찰나, 설하는 발끝에 미세한 한기를 주입했다. 바닥의 낙엽 위에 서리가 하얗게 서리며, 설하의 신형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우측으로 굴러갔다. 빙천보의 묘리였다.
쉬이익!
흑사도의 거대한 검은 대도가 설하가 서 있던 허공을 허무하게 갈랐다. 엄청난 완력을 실어 휘두른 탓에, 초식이 빗나가자 흑사도의 거구가 전방으로 크게 쏠리며 중심을 잃었다. 그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가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적의 도법 회수가 지연되고 있다. 오른발 뒤꿈치를 지탱하고, 삼 보 뒤로 미끄러지듯 빠진 후 대각선 위로 찔러라. 한설지풍(寒雪之風)을 전개해라!)
설하는 스승의 지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신체로 구현해 냈다. 미끄러지듯 뒤로 빠지며 무게중심을 완벽히 잡은 설하가 단전의 태음역행 한기를 녹슨 철검 끝으로 폭발적으로 밀어 올렸다.
“한설지풍!”
설하의 외침과 함께, 녹슨 철검의 끝에서 시린 푸른빛의 검풍이 뿜어져 나왔다. 대나무 숲의 대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으며 하얀 눈꽃 파편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콰아아앙!
푸른 검풍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흑사도의 오른팔과 그가 쥐고 있던 검은 대도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끄아아악!”
대장간의 불꽃보다 더 뜨겁던 흑사도의 살기는 순식간에 비명으로 바뀌었다. 설하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극음의 한기가 그의 오른팔 피부와 근육, 그리고 뼈마디까지 순식간에 하얗게 얼려버렸다. 흑사도가 쥐고 있던 검은 대도는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지직, 소리를 내며 급격히 수축하더니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내, 내 팔이! 내 팔이 얼어붙는다!”
흑사도는 하얗게 동결되어 감각을 잃은 오른팔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얼어붙은 살가죽이 찢어지며 시린 동상 멍 자국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조팽과 철사방 무사들은 횃불을 떨어뜨린 채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장님 서생과 삼류 부엌데기 년이라 비웃던 이들이, 단 일초 만에 일류 수준의 돌격대장을 처참하게 몰락시킨 것이다.
제갈휘는 평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귀밑에서 미세한 핏줄이 터져 붉은 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청혈심공 2단계를 과도하게 운용하여 뇌의 기맥에 가해진 신체적 대가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조 소방주, 들개들을 데리고 당장 만황곡을 떠나십시오. 다음번에 이 숲을 짓밟는 자는, 팔 한 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휘의 나직하지만 뼛속까지 시린 경고에, 조팽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히익! 괴, 괴물 놈들! 당장 도망쳐라!”
조팽과 부하들은 동사하기 직전의 흑사도를 부축한 채, 자신들이 들고 온 횃불마저 버려둔 채 안개 낀 대나무 숲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도망쳐 나갔다.
정적이 다시 엽락소축 뒷마당을 채웠다.
설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하얗게 얼어붙은 자신의 녹슨 철검을 내려다보았다. 검신 표면의 균열은 더욱 깊어져 있었고, 그녀의 손끝에는 푸른 동상 멍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평범한 부엌데기의 것이 아니었다. 스승의 지혜를 통해 일류 고수를 꺾었다는 경이로운 성취감과 가문의 복수를 이룰 수 있다는 불굴의 투지가 그녀의 심장 속에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스승님…… 제가 해냈습니다.”
설하는 제갈휘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제갈휘는 소매로 뺨에 흘러내린 피를 묵묵히 닦아내며 청죽장을 고쳐 잡았다.
“잘했다, 설하야.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흑사도가 철사방 본타로 도망쳐 조광렬에게 우리 존재를 보고하면, 만황곡 전체를 집어삼킬 거대한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밀려올 것이다.”
제갈휘의 먼 눈이 밤하늘의 어둠을 향했다. 흑사도가 흘리고 간 피 냄새가 대나무 숲의 차가운 서리 한기 속으로 은밀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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