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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철검의 무게, 식탁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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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날카로운 쇳소리가 어두운 대나무 숲의 정적을 찢었다.


설하의 손에서 빠져나간 녹슨 빙가 철검이 바닥의 얼어붙은 낙엽 위로 굴러떨어졌다. 검신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다섯 손가락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고, 관절은 마치 혹한 속에 방치된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 으으……”


설하는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극심한 오한에 몸을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은 핏기를 잃고 퍼렇게 변해 있었고,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서리 김이 허공으로 길게 흩어졌다. 뒤틀린 태음신맥의 한기를 역행시켜 강제로 검 끝으로 밀어낸 대가는 참혹했다. 그녀의 여린 살결 위로 서리가 돋아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심장마저 얼어붙어 숨이 끊어질 판이었다.


스스슥.


바닥을 쓰는 대나무 지팡이 소리와 함께 회색 마의를 입은 제갈휘가 다가왔다. 하얀 붕대로 단단히 눈을 가린 그는 내력이 전혀 없는 수척한 몸이었으나, 그 걸음걸이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탁.


제갈휘는 청죽장 끝으로 설하의 맥을 짚는 대신, 그녀의 어깨 요처를 가볍게 찔렀다.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지자 폭주하던 한기가 일시적으로 흩어지며 설하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무리하게 한기를 발출한 탓에 체내의 음양(陰陽)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네 육체가 극음의 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얼려 죽이려 하는구나.”


“스스…… 스승님…… 전, 괜찮습…….”


“말하지 마라. 호흡이 흐트러지면 단전의 빙결이 심장으로 직행한다.”


제갈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그의 손끝은 설하의 이마에 맺힌 차가운 땀방울을 조용히 닦아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엽락소축의 어두운 주방을 향해 나직하게 외쳤다.


“점례 아주머니, 가마솥의 불을 지피고 내가 어제 일러둔 약재들을 준비해 주십시오.”


“예, 예! 제갈 도련님! 진즉에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요!”


주방 안쪽에서 푸짐한 체구의 점례 아주머니가 황동 약탕기를 들고 서둘러 뛰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만황곡의 가난한 고아들을 돌보며 따뜻한 정을 나누어 주던 그녀는, 밤마다 피를 토하며 수련하는 설하를 자식처럼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제갈휘는 주방 평상에 설하를 앉히고, 점례가 가져온 약탕기 앞으로 다가갔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코끝은 약탕기에서 피어오르는 미세한 약 향만으로도 성분의 비율을 완벽히 읽어내고 있었다.


“냉혈초(冷血草) 세 뿌리에, 온양재(溫陽材)인 적삼과 육계의 비율을 일 대 삼으로 맞추었습니까?”


“그럼요! 도련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수점 한 자리까지 저울로 달아 정확히 넣었습니다요. 근데 도련님, 냉혈초는 성질이 극도로 차가운 약초인데, 어째서 몸이 얼어붙은 아이에게 이리 차가운 약을 먹이시는 겁니까요?”


점례가 의아한 듯 물었다. 보통 상식으로는 몸이 차가워진 자에게는 뜨거운 성질의 약재만 가득 넣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제갈휘는 찻잔에 정성스럽게 탕약을 따르며 나직하게 설명했다.


“태음신맥의 한기는 밖에서 불어온 추위가 아니라, 단전 내부에서 스스로 뿜어져 나오는 근원적인 냉기입니다. 여기에 무작정 뜨거운 온양재만 들이부으면, 체내에서 극양(極陽)과 극음(極陰)이 충돌하여 경맥이 풍비박산이 나고 각혈을 하며 즉사하게 됩니다. 불을 끄기 위해 기름을 붓는 격이지요.”


그는 찻잔을 설하의 입가에 가져다 대어 주었다.


“차가운 냉혈초로 체내의 폭주하는 한기를 일시적으로 동화시켜 진정시킨 뒤, 미세하게 섞인 온양재의 기운을 타고 한기를 경맥 외부로 서서히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음양조화탕(陰陽調和湯)의 묘리입니다. 마시거라.”


설하는 떨리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탕약에서는 쌉싸름하면서도 기묘하게 따뜻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모금 들이켜자, 신기하게도 뼈마디를 찌르던 차가운 통증이 가라앉으며 단전 주변의 굳어 있던 기혈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아……”


따뜻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자 설하의 하얗게 질려 있던 뺨에 붉은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는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버림받은 부엌데기로 살며 조롱과 매질만 당해왔던 그녀였다. 자신의 아픔을 이토록 치밀하게 분석하고 어루만져 주는 존재는 오직 이 눈먼 스승 한 사람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리고 점례 아주머니도요.”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매일 밤 그렇게 피를 토하며 칼질을 해대니 몸이 배겨나겠냐. 어서 많이 먹고 기운 차려라.”


점례 아주머니는 안도하며 설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주방으로 돌아가 따뜻하게 찐 감자와 약선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탁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음식의 온기는 엽락소축의 쓸쓸한 가을밤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제갈휘는 청죽장을 무릎 위에 얹고 평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붕대 아래 감춰진 먼 눈은 설하가 앉아 있는 방위를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설하야. 네가 방금 펼친 한설지풍의 위력은 삼류 고수(三流 高手)의 반열에 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네가 쥐고 있는 그 검으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설하는 바닥에 떨어진 녹슨 빙가 철검을 바라보았다. 검신을 만져보니, 방금 전의 수련 여파로 인해 붉은 녹 표면에 미세한 미세 균열이 가 있었다. 가벼운 외날 검은 그녀가 품은 무시무시한 극음의 진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태음역행수련법은 한기를 검 끝으로 강제로 쏟아내는 무공이다. 검이 너무 가볍거나 밀도가 낮으면, 진기가 검신에 머물지 못하고 역류하여 네 손목과 어깨 경맥을 역으로 파괴한다. 네게는 진기를 완벽히 흡수하고 전도할 수 있는 무겁고 단단한 중검(重劍)이 필요하다.”


“무거운 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만황곡 암벽 지대에서 소량 채굴되는 묵철광(墨鐵鑛)이 필요하다. 묵철은 일반 철보다 밀도가 세 배 이상 높아 진기 전도율이 극도로 뛰어나며, 그 자체의 묵직한 무게감으로 가벼운 검술의 한계를 보완해 준다. 그 묵철로 전용 수련검을 제련해야 한다.”


제갈휘는 소매 안에서 질기고 질긴 황실 장서각 한지(韓紙) 한 장을 꺼냈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손가락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한지 위에 미세한 기하학적 선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황실 병기창의 극비 문서에 기록되어 있던 고대 신병기의 구조와 무게 배분 공식을 복원한 정교한 무기 설계도였다.


“날이 밝는 대로 이 설계도를 들고 마을의 이씨 대장간(Lee's Smithy)으로 갈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만황곡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씨 대장간은 이른 시간부터 붉은 화덕의 열기와 망치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깡! 깡! 깡!


거대한 쇠망치를 가볍게 휘두르는 백발이 성성한 사내, 이춘삼(Lee Choon-sam)은 그을린 가죽 앞치마를 입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군부 병기창의 수석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소문답게, 그의 우람한 상체와 단단한 근골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노인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리문이 열리며 청죽장을 짚은 제갈휘와 그 뒤를 따르는 설하가 대장간 마당으로 들어섰다.


“누구냐? 이른 아침부터 쇠 두드리는 소리를 방해하는 놈들이.”


이춘삼은 망치질을 멈추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뱉었다. 그의 눈길이 제갈휘의 눈을 가린 하얀 붕대와 설하의 가냘픈 체구에 닿자, 이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장님 서생과 부엌데기 계집이 대장간에는 무슨 일이지? 밭 갈 갈퀴라도 부러졌나?”


제갈휘는 대장간 내부의 화덕 열기와 쇠 냄새를 청풍감각으로 읽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품속에서 정갈하게 접힌 장서각 한지를 꺼내어 이춘삼 앞의 모루 위에 올려놓았다.


“갈퀴가 아니라, 이 설계도대로 검 한 자루를 제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검? 장난치지 말고 돌아가라. 무림맹의 무기 통제령 때문에 허가받지 않은 무기는 쇠못 하나도 만들어줄 수 없다. 게다가 장님이 검은 알아서 무엇에 쓰려고?”


이춘삼은 코방귀를 끼며 한지를 거칠게 펼쳤다. 대충 훑어보고 던져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설계도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선들과 미세한 수치들을 확인하는 순간, 이춘삼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확장되었다.


“이…… 이것은 대체……”


그는 황급히 한지를 화덕 불빛 가까이 가져가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검날의 두께를 손잡이에서부터 끝부분까지 삼 대 일의 비율로 점차 줄여 무게중심을 전방 사 분의 일 지점에 고정시켰군. 게다가 진기 전도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검신 내부에 미세한 결을 내는 정련 방식이라니…… 이것은 과거 조정의 황실 직속 병기창에서만 극비리에 내려오던 백련정철(百鍊精鐵) 제련법이 아니더냐! 자네가 대체 이 신물 같은 도면을 어디서 구한 거지?”


이춘삼의 호흡이 가빠졌다. 평생을 쇠와 병기 제련에 바쳐온 그였기에, 이 설계도가 지닌 가치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신병기의 명세서임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제갈휘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출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춘삼 어르신의 실력이라면 이 검을 완벽히 구현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어떻습니까? 일생의 명작을 만들어볼 기회입니다.”


이춘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설계도와 제갈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장장이로서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아쉬운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지를 모루 위에 툭 내려놓았다.


“도면은 완벽하다. 내 평생 이런 검을 두드릴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 하지만 만들 수 없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춘삼은 대장간 구석에 쌓여 있는 고철 더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 검의 밀도와 무게를 견디고, 네가 품은 그 독특한 한기를 견뎌내려면 일반 철로는 어림도 없다. 주재료인 묵철광(墨鐵鑛)이 있어야 해. 하지만 만황곡의 모든 광산은 철사방(Chulsabang) 놈들이 장악하고 통행세조차 무지막지하게 뜯어가고 있지. 내게는 지금 묵철이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이춘삼은 모루를 쾅 내리치며 분노를 터뜨렸다.


“검을 얻고 싶다면, 만황곡 동쪽 절벽 깊은 곳에 방치된 폐광 구역으로 가서 직접 묵철광을 캐오거라. 놈들의 감시를 피해 광석을 가져온다면, 내 목숨을 걸고 무림맹의 눈을 피해 이 검을 제련해 주마. 어떠냐, 캐올 수 있겠느냐?”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였다. 철사방의 순찰대가 만황곡 구석구석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무거운 광석을 캐서 운반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짓이었다.


그러나 설하는 주저하지 않고 녹슨 철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차올랐다.


“가겠습니다. 묵철광을 반드시 캐오겠습니다.”


제갈휘는 청죽장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미세한 소리의 파동이 대장간 밖의 대나무 울타리 너머로 뻗어 나갔다.


그 순간, 제갈휘의 귀밑 기맥이 파르르 떨렸다. 청풍감각이 대장간 외부의 미세한 기류 변화를 포착한 것이다.


‘쥐새끼가 한 마리 꼬였군.’


대장간 밖, 거친 덤불 뒤편에서 멧돼지 같은 거구의 사내가 숨을 죽인 채 대장간 내부를 훔쳐보고 있었다. 철사방주 조광렬의 아들이자 포악하기로 소문난 조팽(Jo Paeng)이었다. 그는 최근 대장간 주변에서 수상한 철 제련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를 듣고 은밀히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팽은 대장간 화덕 불빛에 반사되어 붉게 빛나는 제갈휘의 하얀 붕대를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슥.


조팽이 품속에서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대장간 문설주 쪽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장간 내부의 열기 속으로, 일촉즉발의 피비린내 나는 살기가 은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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