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의 사슬, 흔들리는 심안
백골령(白骨嶺)의 바람은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품고 있었다. 사방에 흩어진 이름 모를 야인들의 백골이 달빛 아래에서 하얗게 풍화되어 가는 쓸쓸한 돌산 고개. 방금 전 일류 낭인 무정검사와의 혈투가 남긴 흔적들이 얼어붙은 청석 바닥 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사방으로 튀어 굳어버린 핏방울들과 서리꽃, 그리고 부러진 명검의 조각들이 백골령의 안개 속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설하(Seol Ha)는 한빙철검(寒氷鐵劍)을 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허벅지와 옆구리의 깊은 검상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하얀 얼음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단전의 내력은 이미 구 할 오 푼 이상 소모되어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뒤틀린 태음신맥의 한기가 온몸의 경맥을 거꾸로 타고 올라와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오한이 몰아쳤다. 무엇보다 검신 표면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미세한 균열들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강한 충격만 더해져도 이 유품 검은 영구히 산산조각 날 터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제갈휘(Jegal Hwi)는 청죽장(靑竹杖)을 짚은 채 고요히 서 있었다. 하얀 붕대로 가려진 그의 두 눈가와 관자놀이, 그리고 왼쪽 귀밑으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려 창백한 뺨을 타고 적셨다. 청혈단이 완전히 고갈된 최악의 상태에서 청혈심공 2단계(淸血心功)를 무리하게 펼쳐 상대의 약점을 분석한 대가였다.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이 뇌맥을 압박했고, 왼쪽 귀에서는 폭풍우가 치는 듯한 이명이 몰아쳤다. 그러나 그의 평정심만큼은 차가운 얼음과 같았다.
“크하하하! 이 장님 놈과 부엌데기 년이 제법이구나!”
안개 속을 찢고 나타난 철사방주 조광렬(Jo Gwang-ryeol)의 광기 어린 폭소가 백골령을 흔들었다. 검붉은 사파 장포를 걸친 그의 거구 뒤로, 횃불을 든 철사방 무사들이 겹겹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조광렬의 굵은 왼손에는 녹슨 쇠사슬이 쥐어져 있었고, 그 사슬 끝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삼월이(Sam-wol)와 칠성이(Chil-seong)가 목덜미를 조인 채 벼랑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방주님…… 살려주십시오…… 흑……”
삼월이의 목줄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쇠사슬을 타고 붉게 흘러내렸다. 칠성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조광렬이 사슬을 거칠게 잡아당기자, 칠성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벼랑 아래로 떨어질 듯 요동쳤다.
“설하야! 이 장님 놈의 노비 계집년아! 무릎을 꿇고 저 장님 놈의 목을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들의 목을 이 자리에서 차례로 썰어 벼랑 아래로 던져버리겠다!”
조광렬이 톱날 모양의 거대한 강철대도(혈조도)를 치켜들며 칠성이의 목덜미를 사슬로 더욱 팽팽하게 조였다. 사슬이 조여드는 소리가 백골령의 정적을 깨뜨렸다.
설하의 푸른 눈동자가 분노와 절망으로 뒤틀렸다. 그녀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단전의 마지막 한 줌 남은 내력을 억지로 쥐어짜려 했다.
지직, 쩌적!
그 순간, 뒤틀린 기맥에서 역류한 한기가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설하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검을 쥐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내상 반탄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설하야.)
제갈휘의 나직하고 차가운 전음입밀(傳音入密)이 설하의 고막을 맑게 때렸다.
(스승님…… 하지만 삼월이가…… 칠성이가……)
(호흡을 멈추고 진기를 단전에 묶어두거라. 네가 미세한 살기라도 흘리는 순간, 조광렬의 손가락 마디가 반응할 것이다. 저자는 다혈질이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류의 사냥개다. 네 검 끝이 저 사슬에 닿기도 전에 아이들의 목뼈가 먼저 부러질 것이다.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단 한 치의 진기도 운용하지 마라.)
설하는 스승의 단호한 목소리에 떨리는 검 끝을 바닥으로 내렸다. 눈물이 가슴을 적셨지만, 그녀는 스승의 이성을 신뢰했다.
제갈휘는 천천히 청죽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탁.
지팡이 끝이 백골령의 차가운 청석 바닥에 닿았다. 아주 미세한 진동이 대나무 결을 타고 제갈휘의 손가락 끝으로 전달되었다.
그와 동시에, 제갈휘의 머릿속에서 청혈심공 2단계의 심안(心眼)이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세찬 흐름, 벼랑 끝 바위의 경사도, 인질들의 가쁜 맥박 소리, 그리고 조광렬의 거친 호흡과 그가 쥔 쇠사슬의 장력이 머릿속에 삼차원의 기하학적인 선과 수치로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쇠사슬의 길이는 총 여덟 자 반. 조광렬의 왼손 손가락 세 마디가 사슬 고리를 감싸 쥐고 있다. 사슬의 장력은 칠성이의 몸무게 탓에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 조광렬의 검가 기맥은 우측 어깨와 단전 하부에 집중되어 있으나, 무리한 외공 수련으로 인해 좌우 균형이 어긋나 있다.’
제갈휘는 지면의 미세한 진동을 통해 쇠사슬 자물쇠 고리의 연결 요처를 정확히 매핑해 냈다.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의 가장 취약한 연결부 좌표가 그의 심안에 붉은 점으로 각인되었다.
제갈휘는 청죽장을 짚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 그의 걸음걸이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병약한 서생의 그것처럼 위태롭고 가벼웠으나, 그 눈빛만큼은 붕대 너머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곧고 깊었다.
“조 방주.”
제갈휘의 목소리가 백골령의 세찬 강바람을 뚫고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장님 놈이 겁도 없이 기어 나오는구나!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리더냐!”
조광렬이 대도를 휘두르며 도풍(刀風)을 일으켰다. 붉은 도기가 제갈휘의 발밑 청석 바닥을 쪼개며 먼지를 피워 올렸으나, 제갈휘는 단 한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바라는 것은 내 머릿속에 기억된 황실 장서각의 비급 목록과 약점 구결이 아닌가? 저 무고한 아이들의 피를 흘려 얻을 수 있는 것은 무림맹의 가혹한 질타뿐이다.”
“뭐라? 이깟 골짜기 놈들 몇 명 죽인다고 무림맹이 나를 벌할 것 같으냐!”
“벌하고말고.”
제갈휘가 청죽장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툭, 치며 멈춰 섰다.
“무림맹 강남지부 부방주 팽무성(Pyeng Mu-seong)이 너에게 내린 밀서의 내용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팽무성은 장서각의 생존자를 단독으로 차지해 맹주 천우진의 눈을 피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 하고 있지. 네가 이곳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저질러 소문이 본산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너를 토사구팽할 자는 바로 팽무성이다.”
조광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놈의 손가락이 사슬을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제갈휘는 심안으로 그 찰나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네놈이…… 그걸 어찌 아느냐?”
“독고염의 품속에서 나온 밀서에 팽무성의 사적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더군. 조 방주, 너는 그저 팽무성의 더러운 뒤처리를 맡은 사냥개에 불과하다. 개가 주인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가?”
조광렬의 안색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두려움이 그의 얼굴에 교차했다. 제갈휘는 그의 심리를 완벽하게 난도질하고 있었다. 무공이 없는 눈먼 사서의 지혜가, 천하를 호령하는 사파 방주의 심장을 조여 가고 있었다.
“닥쳐라! 이 주둥이만 산 장님 놈이!”
조광렬이 포효하며 쇠사슬을 당겨 칠성이의 목을 죄어 올렸다. 칠성이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숨이 막혀가는 소리가 백골령에 울렸다. 조광렬은 제갈휘의 기세를 꺾기 위해 칼끝을 제갈휘의 목덜미로 겨냥했다.
“더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면 이 아이의 목뼈를 먼저 부러뜨리겠다! 무릎을 꿇어라, 제갈휘!”
제갈휘의 목덜미에 조광렬의 살기 어린 도기(刀氣)가 닿았다. 내력이 전혀 없는 그의 육체가 적의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가쁘게 흔들렸다. 귀와 코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붕대를 붉게 물들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전신이 무너질 것 같은 극통이 밀려왔으나, 제갈휘는 청죽장을 굳건히 짚은 채 단 한 치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심안 속에서, 조광렬의 손가락이 쇠사슬을 쥐고 흔들릴 때 발생하는 미세한 진동의 주파수가 청죽장 끝을 타고 전도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펼쳐질 파멸의 일격을 위한, 보이지 않는 감각의 사슬이 이미 적장의 손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조광렬은 제갈휘의 오만한 자태에 극도의 모욕감을 느꼈다. 놈은 이 장님 서생의 pride를 완벽히 짓밟아 무릎 꿇리기로 결심했다.
“내 다리를 꿇리겠다고 했더냐? 좋다, 그렇다면 그 쓸모없는 다리뼈부터 가루로 만들어주마!”
조광렬이 이성을 잃고 폭호하며, 백근 무게의 거대한 강철대도를 아래로 크게 휘둘러 제갈휘의 무릎 관절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치려 했다. 도강의 붉은 바람이 제갈휘의 옷자락을 찢어발기며 덮쳐오는 일촉즉발의 절체절명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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